탄탄한 구성과 충격적인 반전! 오싹하고 이상한 핏빛 공포소설
내 안에서 몸피를 부풀린 '그것'이 나를 집어삼켰다! 과연 '그것'은 실재하는가?
어렸을 때 불 꺼진 방에 잠자려고 누워서, '내가 잠들었을 때 인형(혹은 로봇)이 혼자서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지 않은가? 어린 시절에 한 번쯤 해봄직한 상상이 이 책에서는 현실에 소환되어 작동하고 있다. 어쩌면 책을 읽고 책장을 덮고 나면 책장, 선반, 침대, 책상에 장식으로 놓아둔 인형의 위치나 옷매무새를 확인할지도 모른다.
2018년 여름에 출간된 《지옥 인형》은 탄탄한 구성과 충격적인 반전으로 독자의 호평을 샀다. 《유리 인형》은 앞서 출간된 《지옥 인형》과 맥을 같이하는 '인형 시리즈' 공포소설이다. 인형은 '사랑이나 동물 모양으로 만든 장난감'이다. 인형이 공포물의 소재로 쓰일 경우, 사랑스럽고 포근한 이미지가 반전되면서 무섭고 차가운 존재로 다가온다. <사탄의 인형>의 '처키'와 <에나벨>에 나오는 인형이 대표적이 아닐까. 《유리 인형》에 등장하는 인형도 만만찮은 공포를 안겨줄 것이다.
'인형'과 '되살아난 시체'를 테마로 펼쳐지는 다섯 편의 호러픽션
평범한 일상에 불쑥 찾아온 '두 번 다시없는' 괴이한 공포와 환상 이야기
이 책에는 '인형'과 '되살아난 시체'를 테마로 총 5편이 실려 있다. 각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평범한 일상을 살던 중 '두 번 다시없는' 괴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망령의 귀환>은 전역하고 학교 앞에서 노점상을 하던 주인공에게 어느 날 후임이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공포에 하얗게 질린 후임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한다. 전장에서 망자가 된 전우가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날을 계기로 주인공은 외면하고 싶은 과거를 마주하게 된다.
<유리 인형>에는 아버지의 소설을 모래 훔쳐보는 아들이 나온다. 소설 속 소설에 나오는 '유리 인형'은 아들에게 점점 공포의 존재로 다가온다. 한밤중 들리는 또각또각, 발소리는 아들의 신경을 갉아먹는데….
<사라진 소설가>는 무명의 공포소설 작가가 주인공이다. 우연히 알게 된 미모의 마담 소개로 수상한 저택에 방문하게 된다. 그곳에서 또 다른 소설가를 만나면서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묘지 위에 지은 집>의 주인공은 청소와 함께 이물(異物)을 정화하는 일도 하고 있다. 어느 날, 언덕 위 이층집에 이사 온 가족에게서 청소 의뢰를 받는다. 그곳은 묘지 위에 지은, 귀기가 서린 집이었다.
<되살아난 시체들의 도시>는 주인공이 관 속에서 눈을 뜨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되살아난 시체와 살아있는 인간, 과연 도시의 주인은 누구일까?
다섯 편의 공포단편소설을 읽고 나면 진한 여운이 남는다. 공포뿐 아니라 재미와 감동까지 담겨 있어서 외국작가가 쓴 공포소설을 읽을 때와는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으로
몇 번이나 뜸을 들이며 주저한 끝에 녀석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상상도 못했던 것이었다.
“아베 중사님을 봤어요.”
덤불숲에 박혀서 나를 노려보던 아베의 피투성이 얼굴이 떠올랐다. 온몸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악착같이 나를 쫓아오던 아베 중사.
주변 공기가 갑자기 차갑게 느껴지며 축축하게 젖은 셔츠에서 한기가 돌았다. 피투성이의 아베가 소리 없이 등 뒤까지 와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겨우 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꿈에서 봤다는 거야?”
“아니요. 꿈이 아니었습니다. 실제였어요. 생생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둘 중 하나였다. 오승태가 나를 놀리고 있던가, 미쳤던가. 어떤 상황이든 나로서는 유쾌할 게 없었다.
-p.16 <망령의 귀환>
다시 거실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한쪽 벽면을 차지한 원목책장에 눈길이 갔다.
그곳에 인형이 있었다.
인형은 유리병 속에서 웃고 있었다. 뿌연 달빛이 반사된 인형의 얼굴은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 발 다가서는 순간 인형의 얼굴 위에 내 얼굴이 비쳤다. 흠칫 놀라며 물러났다. 인형이 다른 얼굴로 둔갑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순간적이지만 그 얼굴이 내 얼굴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p.70 <유리 인형>
“이 소설은 언제 쓰신 건가요?”
〈이상한 거래〉를 펼쳐 보이며 물었다.
“그 글이 특히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이 소설은 마치 제가 여기 올 걸 알고 쓰신 것 같아서요. 우연인가요, 아니면 예지력이라도 있으신가요?”
“어느 쪽 같습니까?”
-p.146 <사라진 소설가>
태성은 잠시 호흡을 고르며 곁눈질로 집안을 살폈다.
“죄송한데, 저 혼자 집안을 좀 둘러보고 싶은데요.”
“예? 혼자서요?”
도식은 멀뚱히 서서 태성을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나가 있을 테니, 천천히 둘러보세요.”
도식은 이마를 긁으며 현관 밖으로 나갔다. 혼자가 된 태성은 마스크를 꺼내 썼다. 공기가 무척 탁했다. 단순히 먼지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다. 이 집에는 뭔가 다른 기운이 떠다녔다.
그뿐이 아니었다. 창고 앞에서도 그랬지만, 집안 곳곳에 기이한 오물들로 가득했다. 눈에 보이는 먼지나 쓰레기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들은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곳에 분명 존재하고 있다. 분노, 살의, 증오, 원망 같은 감정의 응어리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고이고 고여 오물의 형태로 쌓여 있다. 쉽게 말해 귀기(鬼氣)가 형상화된 것이다.
-p.201 <묘지에 지은 집>
관 속에서 눈을 떴다.
새까만 어둠이 망막을 가로막았다. 실오라기 같은 빛조차 새어들지 않았다. 팔다리를 움직이니 딱딱한 널빤지가 만져졌다.
오동나무인지 소나무인진 모르겠으나 무척 단단했다. 똑바로 누워서 생각을 더듬었다. 어둠 속에서 지난날의 기억몇 개가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불 꺼진 극장에서 내 삶을 기록한 흑백영화가 상영되는 느낌이었다.
-p.258 <되살아난 시체들의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