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데리다의 해체적 사유와 전략은, 아직도 많은 오해와 왜곡 속에서 읽혀지는 듯하다.
많은 오류 중 하나는, 어떤 대상을 해체한다고 하면서도, 언제나 해체되는 대상이 사용하고 작동시겼던 개념과 사유의 메커니즘에 대한 엄격한 고민 없이, 그것을 다시 재사용하면서, 자신의 해체작업을 수행하려는 오류일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해체되는 대상의 표적을, 해체작업을 통해 깔끔하게 노려낼 수 있다는 오해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론적 실천으로서의 해체는, 현실적 실천으로서의 해체만큼이나 어렵고 복잡하게 전개되기에, 이러한 전면적 전복과 해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데리다의 텍스트로부터 배우는 것은, 바로 전통적 형이상학의 해체작업이라는 것이, 결코 명분과 의지만을 앞세운 슬로건만으로는 실천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이에, 주로 데리다의 텍스트가 제안하는, 엄격하면서도 통찰 깊은 몇몇 해체적 전략과 개념들을 이해하려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몇 개의 해체적 이론의 성찰은, 단순한 부분의 고찰이 아닌, 탈형이상학적 사유의 진행과 전개의 본질적인 속성을 드러내주는 작업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탈형이상학적 사유를 실험하고 실천한 철학적 텍스트들 중, 데리다의 텍스트와 관점과 교차하고 조우하는, 니체와 하이데거의 이론적 실천도 함께 이해하게 될 것이다.
데리다는 세계와 사물을 규정하는 형이상학적 관념에는, 안과 밖, 善과 惡, 現象과 本質 등의 이분법적 사유가 매우 깊게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메커니즘이 쉽게 전면적으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행사하고 규정해왔던, 오랜 관념적 전통의 모습을 정확히 파악하고, 어떻게 이러한 구조가 작동할 수 있었는지를 밝히는 작업을 수행한다.
텍스트의 해체는, 그 텍스트의 바깥에서, 그 바깥에만 존재하는 고유의 개념과 사유로 무장하여, 해체하려는 텍스트의 안으로 밀고 들어가는 방식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미 형이상학적 규정에 의해 만들어진, 안과 밖의 경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그것에 龜裂을 주는 작업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텍스트 내부에서의 균열이, 바로 해체적 전략의 엄격하고도 효과적인 전략이며, 이를 위해서는, 텍스트 내부로 일종의 ‘마스크’을 쓰고 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텍스트의 안에서 텍스트를 반복하고,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차이와 모순과 균열을 파악하는 지점이, 바로 안으로서의 바깥, 혹은 바깥으로서의 안을, 다시 새롭게 조망하는 탈형이상학적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해체적 작업의 전략을 따르게 되면, 언제나 근원과 표피, 본질과 현상이라는, 근원주의적 형이상학의 메커니즘 역시 흔들리게 되는데, 이 지점에서, 데리다가 말하는 근원의 보충이라는 논리가 작동된다.
根源이라고 말하여지는 중심, 本質이라는 개념과 형상은, 언제나 독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미 외부로부터의 개입과 침입을 받아들이는, 補充의 사태를 언제나 경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원의 보충을 인정하려 하지 않을 때, 純粹現前과 純粹根源을 향하는 형이상학적 욕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음이 추적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적 형이상학이 이러한 근원적 형이상학의 욕망을 간직한 채, 로고스 중심주의와 신학적 세계관과 공고히 결속된, 관념의 구조를 강제하고 있음을 파악한다.
특히 절대적 眞理/善의 발견과 구현이라는 사태는, 실존적인 관계로 구조화되기 전에, 형이상학적 메커니즘을 통해, 現存在者에게 떠맡겨지는, 형이상학적 빚의 경제구조로 전환된다.
나쁘고 저속한 것으로 강탈되어 존재자들에게 드러나는 진리는, 우리 존재자들에게 고스란히 債務로 남게 된다.
탕감되지 못하는 빚은, 언제나 존재자의 어깨에 눌려 있는데, 이 빚은 신학적 세계관에 의해 탕감되어지는, 기만적 전환의 순간을 맞는다. 본래 造作된 債務이므로, 그것에 대한 辨濟義務 또한 없다.
니체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존재자의 채무관계의 생성과 소멸의 메커니즘과 결합하는, 신학적 세계관의 은밀한 침투와 결속에 주목하고, 실존적 차원에서, 그 지점에 대한 비판과 해체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빚의 청산은, 이상주의적 전통적 형이상학에게 드러나는 진리 개념, 그리고 신학적 세계관과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실존적 차원에서, 매순간 해체되고, 재구조화되어야하는 과제로서 남는다.
그것이 푸코와 들뢰즈가, 각기 다른 길에서 실천한, 탈형이상학적 노력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언제나 현실의 실존적 공간에서, 매순간 수행되는 사유의 모험을 요구한다. 탈형이상학적 관점과 해체적 전략들 -데리다의 이론적 실천을 경유하여, 김진택.
데리다의 解體主義는, 방법론으로 소쉬르의 언어학의 두 원리인, 恣意性과 對立性을 형이상학적으로 확대 적용하는 데서 성립한다.
그렇게 하여, 그의 해체주의는 일체의 것을, 언어 특히 문자의 유희로 환원하려는 문자 환원주의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 일반인들이 자기들의 삶의 토대로 확신하는 ‘외적 자연세계’도, 데까르트의 방법적 회의의 최후의 도달점인 ‘사유하는 주체’도, 헤겔적 ‘절대정신’도, 버어클리의 ‘지각’, 칸트의 ‘경험’, 후설의 ‘현상학적 소여’,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 등이, 최후의 환원 불가능적인 토대로 간주하는 ‘지금여기’, 즉 ‘現前性’도 단순한 文字的 遊?, 즉 ‘差延’의 결과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문자 환원주의는, 버어클리의 지각 환원주의, 후설의 의식 환원주의, 하이데거의 존재 환원주의, 사르트르의 주체성 환원주의 등과 같이, 형이상학적 환원주의라고 평가한다.
따라서 문자 환원주의도, 觀念史 안에서 등장한 다양한 형이상학적 환원주의들이 갖는 가치 정도만, 자기의 고유한 가치로서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어떤 모종의 인식은, 외적 세계에 대한 인식이 아닌 것이 없다는 데서, 極端的인 唯物論的 還元主義가 등장할 수 있다.
또한 그 인식이 어떠한 인식이든, 주관의 개입을 상정하지 않는 인식은 없다는 데서, 극단적인 유아론적 환원주의가 등장할 수 있었듯이, 사실 말이나 문자로 표현되지 않는 인식을, 우리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문자 환원주의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發生學的 認識論 및 일반 체계론의 인식 의미에 의거하여, 이러한 문자 환원주의적 인식 의미를 비판하고자 한다.
발생학적 인식론 및 일반 체계론에 따르면, 인식 혹은 대상은 단지 존재적 형태적 양상에만 의존하는 것도 아니며, 주관의 구조적 개념적 언어적 차원에만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대단히 복잡한 다양한 차원의 교차에 의해 구성되며, 또한 끊임없이 변형된다.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모종의 인식이 있다면, 여기에는 적어도, 기능적 양상, 존재적 형태적 양상, 구조적 범주적 양상, 언어적 논리적 양상, 행동적 조작적 양상, 변형적 진화적 양상, 환경적 인습적 양상, 지향적 의도적 목적적 양상 등의 다양한 양상들이 복합적으로 관여하지, 오직 문자만의 작품은 아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 비판, 문장수.
데리다의 해체적 논리가, 서양형이상학의 전통적인 토대론적, 혹은 결정론적 사고를 비판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의 해체적 사고가 갖는 비판적인 힘과 한계를 알아보는 것이다.
이에 따라, 왜 해체인가?, 해체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어떻게 해체하는가?, 결과적으로 해체는 무엇을 할 수 있/없는가? 라는 물음을 묻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배경적 이해를 위해서, 해체적 사고의 등장과 관련이 있는, 20세기 유럽철학의 세가지 모티브, 반토대주의적 철학, 관계적 사고, 의식철학적 패러다임으로부터, 언어철학적 패러다임으로의 전회가 지적된다.
여기서 데리다의 해체적 프로그램이, 현대 유럽철학의 토대주의적 철학 전통에 대한 비판과 맥을 같이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가 토대주의적 철학의 전통을 비판하고, 그 전통을 해체해야만 하는 필연성을 주장하게 되는 방식이 논의된다.
여기서 전통적 철학의 해체는, 두 가지의 모순적인 작업에 관여하는 데, 그것은 서양의 전역사에 걸쳐서 철학이 구성되어온 방식을 상세하게 밝혀냄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구성될 수 없는 이유를 증명하는 것이다.
즉, 한편에서 해체는 철학의 가능성의 조건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에서는 철학의 불가능성의 조건을 보여준다.
데리다에 의하면, 철학이 가능해왔던 이유는, 그것의 활동이 토대론적 논리에 의거했기 때문이고, 철학이 불가능한 이유는, 철학은 해체적 논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토대론적 논리란, 자의 규정을 위해서 우선 自를 他와 구별하고, 그리고 자에 대해 타를 차별함으로써, 자의 권위에 의해 타를 자에 종속시키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 논리를 통해서, 자의 동일성의 세계는, 존재자의 토대적 지반이 된다. 이러한 권위적 논리에 포함되는 것은, 이분법적 논리와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다.
그러나 해체적 논리에 의하면, 同一性의 세계는 없다. 해체적 논리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은, 一者는 항상 그리고 이미 타자의 영향 혹은 보충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일자의 영역에 항상 타자의 계기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동일성은 타자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순수하고 배타적이라고 여겨졌던 일자의 세계는, 결정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해체적 논리는 동일성의 세계를 분열시킨다. 이런 관점에서, 토대주의적 논리는 결정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고, 반면 해체의 논리는 일자와 타자 간의 결정불가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토대주의적 논리와 해체주의적 논리 간의 이러한 차이점이 비교 분석된다.
데리다는, 그가 플라토의 텍스트 ‘파이드러스’를 분석할 때, 결정불가성의 논리로서의 이러한 해채적 논리를 적응시키는데, 데리다의 해체적 논리가 작용하는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위해서, 그가 ‘파이드러스’를 읽는 방식이 解體的 讀法의 한 예로서 논의된다.
데리다의 해체철학은, 철학의 한계에 대해 성찰하는 철학이다. 데리다가 강조하는 철학의 한계는, 주로 이분법적 논리에 의거한, 理性的 언어의 규정성이 갖는 한계이다.
그는 차연, 보충, 파종, 원본적-글, 일반적 텍스트 등의 새로운 언어를 통해서, 이성적 담론들이 그것에 근거하고 있으나, 동시에 그것들이 자신의 존립을 위해서 배제하거나 회피할 수 밖에 없는, 이성의 역설적이고 불가피한 타자적 영역을 소개한다.
그가 말하는 철학 혹은 이성의 타자란, 형이상학적 담론에서 동일성의 논리로는 모두 소화될 수 없는, 이미 그리고 항상 초과되어 있는 부분들이다.
이성의 타자가 항상 초과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에 대한 지적인 표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성적 담론도, 그것이 있음/없음, 안/밖, 앞/뒤, 현전/부재 등등의 틀 안에서 작용하며, 또한 지적인 표상이, 그 틀로부터 가능한 한에서, 그 틀 자체에 대한 반성을 할 수 없다.
이는, 마치 우리가 눈으로 사물들을 인식하지만, 눈 자체는 볼 수 없다는 사실과 유비를 갖는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