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 신학, 복음 회심 전도 고난의 여행자

탁양현 | e퍼플 | 2019년 01월 25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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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제1장. 使徒 Paul 神學 一般



哲學처럼 虛妄한 학문이 있을까? 있다. 神學이다. 그런데 인간존재의 삶이 본래 허망한 탓에, 이런 학문들이야말로 삶 자체를 담아낸다.
그러니 길지도 않은 人生을 살아내면서, 이러한 학문을 알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면, 참으로 서글픈 노릇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슨 까닭에선지, 현대사회에서 유대민족은 대체로 善의 진영에 배치된다. 그런데 현실세계의 어느 민족이라도 善惡의 측면을 동시적으로 모두 지니고 있음은 周知의 사실이다.
어떻게 유독 유대민족만이 선하고, 이방민족은 악하겠는가. 그런데도 이러한 사유방식은 相對主義的 認識이 유도되지 않는 한, 인간존재에게 本性的인 것이다.
예컨대, ‘Schindler"s List’에 그려진 猶太人들의 受難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 시대의 史實이며, 그것이 현대의 猶太人의 image로서 규정될 수는 없다.
현대사회에서 유태인은, 세계의 금융과 자본을 실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유력한 세력 중 하나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세상의 裏面에서 행해지는 그들의 工作과 造作은, ‘스크루지’의 사채놀이처럼 지극히 資本中心的이어서, 결코 善하지 않은 경우가 許多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매순간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양, 온갖 매체를 통해 자신들의 受難史로써 宣傳煽動한다. 그러니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유념해야 한다. 이는, 유대민족 기독교문화의 기원에 대해, 오해하며 착각하는 하나의 역사적 事例다.

아울러 예컨대,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 ‘이브’를 제작했다는 신화적 발상 또한 그러하다. 이로써 유대민족의 문화에는, 조선왕조의 男尊女卑를 넘어서는 지독한 男性優越主義가 배치되게 된다. 현실세계의 여성은 한갓 남성의 갈빗대 하나에 불과하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초의 人間夫婦는 觸手不可의 善惡果를 따먹음으로써, 善의 세계였던 ‘에덴동산’에 善惡의 共居를 초래한다. 이후 基督敎는 善에 대한 간절한 志向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제 현실세계는, 결코 善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善의 갈망은, 惡에 대한 가혹한 排斥을 동시적으로 작동시킨다.

人類史에서 이러한 유대민족 기독교의 實體에 대해, 최초로 심각하게 苦惱한 사람은, 말할나위 없이 ‘F. W. Nietzsche(1844~1900)’다. 그러한 고뇌 끝에, 니체는 ‘神의 죽음(Gott ist tot)’을 선언한다.
니체는 中世와 近代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좇아 ‘신의 죽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上記한 바와 같이, 니체 이후에 世界大戰을 거치면서, 유태인과 기독교는 여전히 새로운 형태의 同一視를 시도하고 있다.
물론 改新敎는 유태인들과의 分離를 실현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늘 그 이면에서는, 유대민족의 수난을 信仰的 基底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러,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들에게는 天賦人權이 보장되었다. 설령 이것이 憲法的 규정에 불과할지라도, 이전의 역사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래서 이제 인간존재들은, 기본적인 自由와 平等을 향유하고 있다.
그런데 애당초 자유나 평등은 실현되기 어려운 認識的 槪念이다. 자유나 평등은 인간존재의 認識(想像) 속에서나 가능할 따름이다. 어쨌거나 현실세계의 모든 인간존재들이 同時的으로 자유로울 수 없으며, 평등할 수 없는 탓이다.
그러다보니 여러 이유로, 하늘로부터 부여된 자유와 평등을 부담스러워 하는 현상도 나타난다. 현대에 이르러 그러한 상황을 人文學的으로 정돈한 것이, ‘에리히 프롬’이 논변하는 ‘자유로부터의 逃避’다.
그렇게 자유나 평등으로부터 소외되는 상황에서, 인간존재들이 의지하는 것이 종교이며, 대표적인 것이 基督敎다. 그래서 니체는, 기독교가 그토록 선전하며 갈망하는, 신앙적 삶으로서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삶의 태도를, ‘노예의 도덕’이라고 비판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세계에서 天賦人權的 자유와 평등을 실제적으로 실현하기는 너무도 힘겨우므로, 차라리 그 힘겨움으로부터 도피해버리는데, 그러한 힘겨움으로부터의 도피처가 기독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애당초 ‘主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와 평등만을 전제할 따름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지 않는다면, 아예 자유와 평등은 말할 나위 없으며, 생명 자체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런 것이 사도 바울을 통해 傳道된 기독교의 福音原理다.

東西古今을 막론하고, 현실세계에서 眞善美를 强辯하는 세력은 지극히 道德主義的이다. 그래서 누구나 자의든 타의든, 그것에 쉬이 수긍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은 애당초 實現不可다.
이것이 ‘시치프스의 딜레마’가 지속되는 현실세계에서, 자꾸만 인간존재들이 神의 영역인 교회로 도피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그런 식의 도피처를 찾거나, 그것에 의지하여 삶을 꾸려내는 側은, 그나마 나은 편에 속한다. 실상 현대인의 대부분은, 그저 資本主義體制의 굴레마저도 넘어설 수 없다.
그러니 ‘奴隷道德’의 측에 배치되든, ‘資本道德’의 측에 배치되든, 죄다 派瀾苦海를 표류하는 苦難일 따름이다.

현대사회는 인터넷에 토대를 둔 사이버 세계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기독교는 ‘먹방(맛집)’과 유사한 代理滿足을 주고, 불교는 ‘몸짱(얼짱)’과 유사한 代理充足을 준다. 이러한 비유는 아주 인상적이다.
天國을 도모하고 成佛을 모색하는 양, 현대인들은 자기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먹방’의 대리만족을 위해 온갖 사이트를 찾아헤매고, ‘몸짱’의 대리충족을 위해 갖은 사이트를 찾아나선다.
그런데 어쨌거나, 죄다 自我 自體의 실현은 아니며, 다만 代理的인 실현임을 유념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실제가 아니며, ‘시뮬라크르’일 따름이다. 그래서 결국, 천국에 가지 않는 한, 현실세계는 천국일 수 없으며, 成佛하지 않는 한, 인간존재는 부처일 수 없다.
그러다보니 그러한 한계를 너무도 잘 인식하는 각 종교는, 자꾸만 道德主義的이며 倫理主義的인 樣態를 드러낸다. 그러니 결국 현실세계의 어떠한 종교도, 마치 애당초 儒敎가 그러했던 것처럼, 지극히 도덕주의적인 종교로서 작동하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번쯤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보는 일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최근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대한 연구들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데, 우리가 그 기원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하면, 가장 먼저 의문시되는 질문이 있다.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는 누구인가?
예수인가 아니면 바울인가?
생각해보면, 예수는 어떤 종교를 만들도록 지시한 적이 없으며, 또한 예수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닌 유대교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기원을 생각할 때, 예수와 더불어 바울을 떠올릴 수 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울은 신약성경의 대다수 서신을 기록하였고, 누구보다 그리스도교를 전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학자들은, 전통적 그리스도교회가 ‘예수의 종교’ 보다, ‘바울의 복음’에 그 신앙적 기초를 두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바울서신에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인용이나 언급이, 사실상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바울의 서신에는 실제로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가르침과 지상적 활동이 누락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서신들이 복음서보다 일찍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바울은, 복음서에 그토록 빈번이 보도되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비유들에 대해서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하며, 심지어 복음서에 그토록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예수의 ‘수난사’ 조차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이처럼 바울은,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어 보이며, 특별히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속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義’에만 초점을 맞춘 듯이 보인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예수의 지상적 사역을 非歷史化하고, 그의 십자가 수난과 처형을 신학적으로 抽象化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바울은, 팔레스틴 땅에서 갈릴리 민중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지상적 예수보다, 만인의 죄를 씻어준 보편적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에 집중하고 있으며, 또한 예수의 의미를 과거에 맞추기 보다는, 끊임없이 자신의 공동체 안에 ‘現在化’하며, 세례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강조한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의 예수 이해는 ‘역사적 예수’에 기초해 있기보다는, ‘신앙의 그리스도’에 기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복음은, 유대적 종말사상의 특수성을 반영한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두기보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 속에 계시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미치는,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하나님의 義’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이렇게 바울이 예수의 말씀들을 언급하는 경우가 드물고, 암시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니체, 바우르, 브레데 등 몇몇 비평가들은, 바울이 예수의 전승을 그다지 많이 알지 못하였거나, 예수의 전승이나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한동안 많은 사람들은, 바울의 그리스도론으로부터 ‘역사적 예수’로 그 관심을 돌리는 것이, 참 그리스도교의 회복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바울이 가르친 복음이 예수의 정신이나 의도와 부합되는지, 예수의 종교와는 전혀 다른 것은 아닌지, 또는 예수의 교훈을 잘못 해석한 것은 아닌지를 묻는 이들도 있다.
만일 바울이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라면, 어떤 면에서 창시자이며, 어떤 점에서 예수의 추종자라고 할 수 있는가?
바울은 정말로 예수를 잘 알고 있었는가?
바울이 예수를 알았다면, 얼마나 구체적으로 그분의 삶과 사역과 교훈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는가?
바울의 신학은, 역사적 예수의 인격과 교훈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가, 아니면 그의 신학은 순전히 자기 회심경험에서부터 온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19세기 말로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신약학계에 커다란 문제로 던져져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바울의 이해문제’로 집약되어 토론되어 왔다.
앞의 질문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바와 같이, 지금까지의 예수와 바울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주로 역사적 문제와 신학적 문제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전자는 초대 그리스도교회에서, 예수와 바울의 역사적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알아보려는 시도였고, 후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대상이 누구인지, 즉 바울의 신앙 대상이 역사적 예수였는지, 아니면 자기 신학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였는지를 확인하려는 시도였다.
이제까지의 이 논쟁의 연속선상에 서서, 예수와 바울의 관련성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왜 바울은, 역사적 예수의 생애와 그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선포를 언급하지 않은 것일까?
그는 진정으로 ‘역사적 예수’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일까?
만일 이러한 바울의 침묵이 의도적이라면, 무슨 이유 때문일까?
또한 예수의 선포와 바울의 복음은 서로 상반되는 것일까, 아니면 바울의 복음이 예수의 선포를 더 발전시킨 것일까?
더 발전시킨 것이라고 한다면, 그 때 이 둘 사이의 연속성은 있을까, 없을까?
그리고 만약 둘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한다면, 그 연속성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구체적인 상황과 근거는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개연성 있는 답변을, 사회학적 해석(사회학적 방법론)을 통해 찾으려는데 있다.
간략하게 종합하자면, 바울이 예수의 종교를 조직, 발전시켰는가, 아니면 예수와 상관없는 새로운 신학을 수립했는가?
바울이 직면했던 특수한 상황들과 서신을 쓰게 된 상황, 바울의 의도와 목적 등을 토대로 한 사회사적 해석을 통해 다루면서, 예수의 신학과 바울의 신학이 상반되는 것인지, 아니면 바울의 신학이 예수의 사상을 적절하게 발전시킨 것인지를 심도 있게 연구하고 검토해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바울과 예수의 신학 사이에 구체적인 연속성이 있는가, 바울을 예수의 계승자라고 평가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밝혀내야 한다. 예수와 바울의 관계성 연구, 전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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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국제적인 환경 속에서 자란, 정통적 유대사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세계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셨다.
그가 열렬한 율법주의자였기 때문에, 다메섹에서의 초인적인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였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오직 그에게만 구원의 소망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바울이, 이 예수 그리스도를 땅 끝까지 증거해야 된다는 소명도 얻게 된다.
바울은 이방인의 생활 풍속과 사상, 그리고 로마제국의 법과 질서와 로마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 그것들을 누릴 수 있는 학문과 교양과 자격과 부도 갖춘 사람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복음을 들고, 로마 제국 안에 있는 도시를 전전하면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증거하였다.
그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선교한 것은, 바울로 하여금, 전도인이 되도록 섭리하신, 하나님의 예정된 섭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오늘날 복음이 세계 각처에 전달되고 있다지만, 아직도 이 땅에는, 복음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모든 인간의 구세주 되신 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런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잘못 이해하여,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믿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사람들은 오히려 기독교를 훼방하고 박해할 뿐 아니라, 전쟁까지도 불사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현상은, 마치 바울이 소명을 받기 전에 행했던 것과 유사하다. 바울의 소명과 선교에 대한 고찰, 김영호.


바울의 일생은 아주 드라마틱했다. 그는 초기 열성적인 유대교도였다. 유대교도의 입장에서 볼 때의 그리스도교는, 민족과 종교를 배반하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이 그리스도교를 핍박하던 바울이, 어느 날 결정적인 체험을 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바울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유대교적 열정이 오류였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로 한다. 이후 바울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열정적인 선교사로, 그리고 복음을 정리하여, 그리스도교를 체계화하는 신학자로서의 삶을 산다.
이 가운데 신학자의 부분은, 그의 의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때때로 교회 안에 발생하는 문제에 응답하기 위해, 그가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바탕으로 하여, 복음을 정리하고 재해석한 것들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일관성을 찾기 쉽지 않다. 이런 바울의 사상 가운데 매우 중요한 핵심적 요소는 ‘以信稱義(Justification by faith)’를 꼽을 수 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이 사상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결정적인 차이로 부각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와 전혀 다른 종교일 수는 없다. 예수 역시, 자신의 가르침이 유대교의 가르침으로부터의 철저한 단절이라고 말한 일이 없고, 그것은 바울이 경험한 신앙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서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는 것이, 유대교적 유산인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정립하는 일이다.
실제로 바울은, 유대교도였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복음이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과 율법 사이에는 상호관계가 있음을 규명하는 일이었다.
율법의 정신이 인간을 파괴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나, 기존의 율법 적용에 있어서, 유대교가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바울은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리고 율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율법의 정신이 중요하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그것은, 율법은 인간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기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복음 역시 마찬가지의 기능을 갖는다. 결국 율법과 복음은 같은 목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바울의 논지였고, 실제로 성서가 가르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단 율법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과정에서, 본래의 정신을 수용하지 못하고 율법 자체를 위한 것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런 율법은, 인간에게 인간의 범죄를 고발하고, 마침내 사망으로 인도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때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정신을 회복하는데, 이를 통해 인간에게 새롭게 구원의 길이 제시된다.
율법을 통해 죽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데. 이것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대속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복음의 길을 준비하는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 또한 바울의 입장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복음 안에 율법이 수렴되고, 비로소 율법의 정신이 구체적으로 되살아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으로 머무르지 않고, 본래 지니고 있던 우주적 주권을 가진 분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터전도 마련되었다.
그것은 유대교가 이스라엘만의 종교였던 것에 비해, 그리스도교가 세계종교로 확산되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율법과 복음의 문제를 분명하게 정리한 바울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그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신앙의 균형을 유지하는가에 관한 문제와 연관된다. 보다 성숙한 신앙을 위해 이 문제에의 접근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바울 사상에 나타난 율법과 복음의 관계, 김영일.


바울이 왜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고후 11:24) 맞는 것과 같은 핍박을 당했는지에 대해 대답한다.
그 매를 맞았다는 것은 바울이 유대인들에 의해 유대교 법정에서 고발당하고, 재판을 받고, 유죄 평결을 받아, 그 형벌로서 그 매를 맞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바울이 매를 맞은 이유에 대한 기존의 견해는, 바울이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혹은 유대교에 대해 배교하는 언행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새로운 가설을 제시하며, 그것은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거짓선지자로 고발을 당했으며, 그것이 바로 핍박의 주된 이유라는 것이다.
또한 바울과 거짓사도, 그의 적대자들인 유대주의자들 사이의 논쟁 역시,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거짓선지자 논쟁의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구약성경 곳곳에서 발견되는 거짓선지자들에 관한 본문들을 분석하여,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를 분별하는 기준을 10가지 항목으로 요약한다.
그 열 가지는, 하나님의 파송을 받았는가?, 하나님의 성회에 참석한 신적 현현의 경험이 있는가?, 이적을 행함으로 자신의 예언자적 진정성을 증명하는가?,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갖고 있는가?, 돈에 대한 탐욕과 같은 도덕적인 결함은 없는가?, 예언적 언명이 실제로 이루어졌는가?, 하나님의 영을 갖고 있는가 아니면 악한 영을 갖고 있는가?, 고난을 당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있는가?, 하나님이 위기 가운데서 구원하시나?, 구약성경의 참선지자들처럼 남다른 현실해석을 하고 있는가? 등이다.
거짓先知者 문제가 신약성서 시대의 유대교와 초대교회 안에서 여전히 중요한 주제였으며, 구약성경의 거짓선지자에 관한 율법이 유대교 안에서 실제로 적용되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미슈나, 쿰란문서들, 요세프스의 기록은, 1세기 유대교 안에 다수의 거짓선지자들이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신약성경, 초대교회 문서, 신약성경 위경들, 바빌로니아 탈무드, 필로의 글은 신약성서 시대에도, 구약성경의 전통에서 거짓선지자 문제를 조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했을 때, 그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거짓선지자로 고발하고, 그를 처형하거나 핍박할 수 있는 문화적 상황 속에서, 그가 활동했음을 보여준다.
바울을 선지자의 범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한 이유를, 바울 자신의 자기이해의 관점에서 연구한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적 소명을 이해할 때, 구약성서의 선지자들의 소명의 관점에서, 특히 이사야와 예레미야서의 예언을 통해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이 자신을 “심는 자”(고전 3:6-7)로, “건축자”(고전 3:10)로 보는 것과, 고후 10:3-5에서 자신을 “성벽을 무너뜨리는 자”로 보는 것은, 바울이 렘 1:10에 나타난, 예레미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명을 배경으로, 자신의 사도적 소명을 해석함으로 얻어진 것임을 새로이 밝힌다.
갈 4:19, 고전 3:2, 살전 2:7에서, 자신을 産母와 乳母라고 부르는 것도, 사 66:7-13에 나타나는 “주의 종”에 관한 예언을 그 배경으로 하여, 자신의 소명을 해석한 것임도 새로이 밝힌다.
거짓선지자의 10가지 특성을 바울서신에 적용하여, 바울과 그의 적대자들 사이의 논쟁과 바울의 자기변호를 재구성한다.
교회 밖에서는 그의 유대인 적대자들이, 그리고 교회 안에서는 유대 기독교인 적대자들이 바울을 향해, 그는 거짓선지자라고 혹은 거짓사도라고 공격할 때, 그들은 거짓선지자의 10가지 특징의 관점에서 바울을 공격하며, 바울은 이에 대해 자신이 참선지자임을 변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서, 고린도후서 등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바울과 그의 적대자들 사이의 논쟁들은, 구약성경의 거짓선지자 논쟁의 패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 동안 신약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주제가 되었으며, 해석상에 어려움이 있던 여러 본문들이, 거짓선지자 논쟁과 깊은 관련이 있는 구절임을 새로이 밝혀야 한다. "바울-거짓선지자인가?: 바울에 대한 거짓선지자 고발", 김철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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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소개

▣ 목차





제1장. 사도 바울 신학 一般
律法根本主義者, Schindler"s List, 傳道와 福音의 여행자, 列邦,
善한 이미지의 猶太人, 시치프스의 딜레마, 眞善美 志向, 神正論,
奴隷道德, 資本道德, 시뮬라크르, 歷史의 非歷史化, 律法과 福音,
에리히 프롬, 自由로부터의 逃避, logos, 빛, paidagwgov, 異邦人,
異邦人에게 직접 나아감, 回心, Christ code, 世界普遍主義 宗敎,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異邦改宗主義,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Historical Jesus, 거짓先知者, 디아스포라, Acts of the Apostles,
F. W. Nietzsche, Gott ist tot, God"s righteousness, 終末論, 敎會,
예수의 福音書, 聖靈의 使徒行傳, Peristasenkatalog,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바보스러움(το μωρὸν τοΰ θεοΰ), 소설 같은 여행,
팔레스타인, 아브라함의 言約, 예수 그리스도의 종, 福音의 開闢,
종교적 인간의 鬪爭性, 질서를 거부하는 자들, J. Chrysostom,
갈라디아서, the friendship motif, paraenesis, 苦難의 여행자,
以信稱義(Justification by faith), 捐補, 남은 者의 神學, 苦難.

제2장. 사도 바울 신학 總論
로마서, 福音의 權威, H. D. Betz, 기독교인을 逼迫하는 자, 갈비뼈,
고통받는 小數者들, 小數者들의 獨裁, 이스라엘, 다윗의 자손,
cell church, 偶像崇拜, 순한 羊, 착한 羊, 弱者, 强者, 聖戰, 寶血,
使徒 베드로, 自暴自棄의 삶, 聖靈의 役事, 十一條, 兩面性의 使徒,
聖靈에 의한 변화, 至上命令, 救援論, Lüdemann, 불트만, Becker,
고린도전·후서, 권위의 서열, 스스로 구원받은 자들, M. Luther,
無法律 國際政治, 새로운 被造物, 클라우디우스 황제, 善惡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代贖的 죽음, 골고다의 십자가, 요단강,
回心 아닌 召命, 言約的 律法主義, 하나님의 아들, 男性優越主義,
C. K. Barett, 나눔과 섬김, pre-existent status, Käsemann,
Ralph P. Martin, 代贖, Müller, Merklein, Lohfink, 初代敎會,
다마섹 回心 사건, 偏向된 福音主義, 아가페 사랑, 노아의 方舟,
갈라디아서의 激情性, 부활만을 기대하는 자들.

제3장. 사도 바울 신학 各論
거룩한 主님의 十字架軍兵, 政治神學, 카테콘, 아담의 罪, Creed,
韓國敎會의 運命, 默示文學, Spritualization, 異端論駁, T. Laato,
사도 바울의 종말론, 알타이저, 벤야민, 아감벤, synergism, 同行,
메시아의 再臨, Vincent of Lerins, legalist religion, A. Segal,
恩寵, 啓示, 펠라기우스와의 論爭, covenantal nomism, 信仰告白,
버림받은 자들, 熱狂主義, 카르타고 공의회, 中世的 狂氣, Priminius,
오렌지 공의회, 異端의 時代, J. D. G. Dunn, 포스트모던 思惟方式,
the New Perspective on Paul, 猶太敎와 基督敎의 不連續性,
聖靈, 貧困, 飢餓, 不平等, E. P. Sanders, 존 로스, Philip Schaff,
two-covenant theory, 最後審判, 滿洲中國人, 滿洲朝鮮人, 휘말림,
the Shepherd of Hermas, covenant of grace, catechism, 거듭남,
The Apostle"s Creed, descendit ad inferna, 惡靈에 對抗하기,
The New Perspective on Paul, 옛 言約과 새 言約의 不連續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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