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학,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여행자

탁양현 | e퍼플 | 2019년 01월 25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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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제1장. 尹東柱 詩學 一般





尹東柱(1917~1945)는, 朝鮮人으로서 滿洲에서 태어나, 日本人의 땅에서 죽어간 詩人流配者이다.
詩人 尹東柱의 詩學은 周知하는 바와 같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인간존재의 超然한 노래이다.
여기서 ‘하늘’은 어떤 하늘인가?
기독교에서 하늘은 응당 하느님이다. 그 하느님은 太初에 최초로 發話된 말씀이다. 그 말씀으로서 하늘을 우러르는 자가 곧 ‘예수’다.
老子에게 하늘은 天地自然으로서 道다. 그런데 道可道非常道의 道이므로 서술된 언어로써는 묘사될 수 없고, 묘사되어서도 안 되는 하늘이다. 만약 언어로써 표현하게 되면, 그것은 결국 늘 그러한 본래의 道일 수 없는 탓이다. 그래서 道는 詩로서만 노래될 수 있다.
孔子의 말씀은, 學而時習之不亦說乎로써 시작된다. 이는, 배움과 연습으로써 하늘의 말씀을 체득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늘의 말씀(仁)’을 체득한 자가 곧 ‘聖人’이다.
부처는 出生 후, 최초의 發話로써 天上天下唯我獨尊을 말씀했다. 홀로 선 自我가 곧 하늘이라는 의미다. 그렇게 천지자연의 원리로서 道로써 말씀된 하늘인 존재, 그가 바로 詩人이다.
윤동주는 그런 시인이었다.
그런데 그의 삶은 지속된 流浪이었으며, 암울한 流配였다. 朝鮮, 滿洲, 日本, 그 어디에도 그의 故鄕으로서 조국은 不在하다. 그러한 故鄕(祖國)의 不在는, 그의 삶을 流配의 流浪으로써 點綴케 했다.
그래서 윤동주의 삶 자체는 비극이다. 그것은 한 인간존재로서는 不得已한 不條理였다. 조국이 日帝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현실을, 문학적 감성이 多分한 一介 인간존재가 어찌 하겠는가.
결국 윤동주는, 梅泉 黃玹처럼 義憤을 떨치며 자살할 수도 없었고, 勉菴 崔益鉉처럼 의병투쟁을 할 수도 없었고, 安重根처럼 敵의 首魁를 암살하는 테러리스트가 될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詩人으로서, 담담히 자기의 詩를 지어낼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인지 윤동주의 경우처럼, 역사 안의 시인들은 대체로 비극적 존재들이다. 詩라는 것이 喜怒哀樂의 여러 감정을 노래하지만, 아무래도 분노와 슬픔을 위주로 비극적 정서를 담아내야만 하고, 그러한 정서를 담아낼 때,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러 억지스럽게 비극적이고자 한다고 해서 悲劇性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윤동주 이후, 한국전쟁, 민주화투쟁, 노동운동 등의 상황에서 많은 시인들이 등장할 수 있었다. 그 시대적 상황의 비극성이 자연스레 시인의 비극성을 북돋았던 탓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經濟大國이 되고 민주화된 이후에는, 이렇다 할 시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토록 갈구하던 고도의 산업화와 성숙된 자본주의를 실현한 시절이어서, 하물며 著名했던 어느 시인은, 지난날의 性醜聞이 온 세상에 까발려지며 역사에서 삭제되어버리기도 한다.
애당초 인류문명에 있어, 시인은 비극적 존재이고, 시는 비극을 노래하는 것이다. 물론 비극 이외의 어떤 테마라도 詩로써 노래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詩들은 결국엔 시나브로 시들어버린다. 시를 읽으면서 굳이 기쁨, 즐거움, 幸福, 敬歎, 歡喜, 福樂 따위의 분위기를 목적하는 독자가 稀少한 까닭이다.
어느 著名한 喜劇俳優의 넋두리처럼, 인간존재의 삶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들여다 보면 죄다 비극일 따름이다. 그래서 그러한 天地自然의 理致를 體得했던 부처는, 이미 수천 년 전에 인간존재의 삶을 ‘一切皆苦의 派瀾苦海’라고 규정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悲劇的 流浪의 詩人 윤동주의 詩들이,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에게 가장 유력하게 기억되고 愛誦되는 까닭이다. 어쨌거나 시인은, 원하든 원하지 안든, 비극적 존재이고, 고독한 유랑자이기 마련이다. 비극적 상황에 내던져짐으로써 시를 지어낼 수밖에 없고, 그렇게 지어낸 시이므로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음이다.
혹자는 윤동주의 詩學을, 아주 순수한 敍情主義나 宗敎主義에 입각하여 감상하고 해석하기도 한다. 물론 이는,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윤동주의 시학은 애당초 본래적으로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時空間的 상황에 배치되어 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표면적으로 어떠한 描寫를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비극의 토대 위에서 작동할 따름이다. 이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결코 윤동주와 같은 시인이 재현될 수 없음을 傍證하기도 한다.
물론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 유토피아의 실현일 리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국제사회의 형편에 비추어볼 때, 당최 비극적일 수 없는 상황에 있다.
남북한이 분단되었다지만, 남한의 경제수준은 세계적인 경제대국의 수준에 있고, 한국전쟁 이후 어떠한 형태로든 평화적 休戰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시절은 현실세계가 욕망과 충족으로써 작동할 따름이다. 그러니 頹廢的이거나 絶望的일망정 당최 悲劇的일 수 없다.
예컨대,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 시뮬라크르, 히키코모리, 이지메, 판타지, 섹슈얼리티, 하드코어 따위가 그러하다. 그래서 현재의 대한민국은, 悲劇도 喜劇도 아닌 不條理劇과 解體劇이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들이 제아무리 비극성을 담아내려고 해도, 근원적인 恨에 이르지 못하고, 기껏 個人主義的인 鬱憤이나 憂鬱의 차원에 머물고 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윤동주의 시절처럼, 대한민국이 식민지가 된다거나, 전쟁이 勃發해야 한다거나, 경제적으로 沒落하기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그저 당분간은, 윤동주와 같은 詩人을 만날 수 없음을 是認해야만 한다.
필자는 時限附의 삶을 예정받았다. 그런 탓에 尹東柱詩學을 지어내는 時空間이 온통 조급함으로 채워지고 있다. 하지만 당최 서두를 수 없는 노릇이다. 서두른다고 채워질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저 담담히 시간 안에 내버려 둘 따름이다.


-하략-

저자소개

윤동주를 저항시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단일문화적 주체성의 관점이 개입한 것이다. 이것은 근대문학사의 연속성 확보를 위해서, 윤동주를 민족문학의 대표주자로 끌어들인 결과이다.
하지만 이때는, 윤동주가 滿洲國 출신이라는 사실이 무시된다. 만주는 식민지 조선의 연장선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문학의 연구대상이 유?이민자, 디아스포라, 다문화주의 연구 등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滿洲를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가 생겼다. 윤동주가 만주국 출신이라는 사실이 새삼 부각된 것이다.
윤동주가 시인으로 활동할 무렵, 조선에서는 ‘만주 유토피아니즘’이 확산되어, 많은 지식인, 농민들이 환상을 품고 만주로 이주하던 때였다.
만주는 조선에서 불가능한 꿈이 성취될 수 있는 낙원으로 상상되었다. 이것은 만주국의 건국 이념인 ‘오족협화’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에서 파생한 것이다.
‘고조쿠쿄와(五族協和)’는 만주국의 나라 표어이자, 건국 이념, 정치 슬로건이다. 중화민국 성립 초기의 정치 슬로건이었던 五族共和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오족공화의 五族이 한족, 만주족, 후이족(회족), 몽골족, 티베트족을 가리키는 것과는 달리, 오족협화는 일본민족(야마토민족), 만주족, 조선인(한민족), 한족, 몽골족의 협력을 뜻한다.
만주국의 국기에는, 노란색(만주족) 바탕 왼쪽 상단에 네 가지 색으로써, 빨간색(일본민족), 파란색(한족), 하얀색(몽골족), 검정색(조선인)의 가로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오족협화의 이념을 뜻한다.
만주에서는 조선인이 다른 민족과 평등한 대접을 받고, 고유한 문화를 보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국의 이념을 신뢰하고 이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친일의 논리를 이용하여 저항의 가능성을 찾으려는 사람들, 말하자면 협력을 통한 저항이라는, 이중적 전략을 구사하려는 사람들도 모여들었다.
하지만 윤동주는, 그 무렵 평양 유학의 실패를 통해, 만주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목격하였고, 만주에서도 조선인으로 살기 어려울 뿐 아니라, 內鮮一體가 강화되는 조선에서는, 일본인으로 살기를 강요받게 될 것임을 예감하였다.
어디에서건 조선인이 되기 위해서는, 만주국민이 되거나 일본인이 되어야 하는 모순적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러한 모순적 상황을 자신의 주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인 윤동주는, 단일문화적 주체성에서 찾아볼 수 없는 ‘복수의 주체성’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 유학을 통해서, 다시 ‘공허한 주체성’으로 전환되는데, 이는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주체성 부재의 상태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윤동주가 친일도 저항도 불가능했던 데에는, 이러한 주체성 부재, 혹은 주체를 결정지을 수 없는 복수의 주체성이 그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윤동주와 다문화적 주체성의 문학, 오문석.


尹東柱는, 詩人을 ‘슬픈 天命’의 존재로 命名하고 있다. 이러한 명명에 의하면, 詩를 쓴다는 것은 ‘천명’의 課業을 수행하는 일이다.
‘천명의식’을 詩텍스트 창작의 支配的 言述로 보고, 그러한 ‘천명의식’이 言述 主體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있으며, 그 의미작용은 어떤 것인지를 탐색하고자 한다.
윤동주에게 ‘천명’은 절대적 가치체계를 지니고 있는 ‘하늘의 法’이다. 따라서 ‘천명’의 詩텍스트는, 地上의 가치체계를 天上의 가치체계로 전환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때문에, 언술 주체는 늘 地上과 관계되는 自我와 天上과 관계되는 自我 사이에서, 自己 正體性 혼란을 겪는다. 이러한 정체성 혼란이, 그로 하여금 서울을 떠나 敵都인 東京으로 脫走하게 만든다.
역설적으로, 그는 東京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는 천명의 詩텍스트를 산출하게 된다. 윤동주에게 천명의 詩텍스트는 존재 자체다. 요컨대, 그는 詩로써 자기 존재를 완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天命의 詩的 텍스트와 거울화의 意味作用 : 尹東柱論, 정유화.


윤동주 시에 나타나는 ‘부끄러움’과 ‘보편지향성’은, 그가 현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모색했던, 시적 윤리의 구체적 結晶이다. 특히 그의 시에 나타나는 부끄러움은, 기존에 반복적으로 활용되어온 ‘부끄러움?성찰’이라는 평면적인 구조로는 온전히 파악될 수 없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부끄러움은, 피해자가 동시대의 피해자들을 보며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가해자가 느껴야 할 부끄러움을 오히려 피해자가 고백하는 형국이기에, 우리는 관습적으로 이해해온 윤동주 시의 부끄러움을, 또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시에서 부끄러움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시기가, 정확히 전시체제로의 체제 개편이 이루어진 시기(1937년 중일전쟁 이후)와 일치한다는 점은 주목된다.
윤동주 시에 나타나는 부끄러움은, 국가권력에 의해 폭압적으로 파괴되는 생명(삶)의 반응적 감정이었다.
이는, 단순히 스스로의 결점을 마주하는 개인적 성찰의 개념을 넘어, 파괴되는 生 앞에서 피해자가 느끼는 존재론적 감정이다. 그는 이러한 감정인 부끄러움을 통해, 우리의 ‘삶-생명’이 언어적·형식적 제도에 의해 철저하게 분절되고 파괴되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대문자 제도의 질서와 국가적 형식을 무화시키고자 했다. 바로 그 언어적 대응이, 그의 시에 나타나는 보편지향성이다.
윤동주는 끊임없이 생명을 詩化함으로써, 제도나 언어가 분절하고 해체할 수 없는 생명의 의미를 확보하려 했다.
즉, 국가가 언어·합리·측량·기호·법 등의 언어적 제도를 통해 생명을 ‘표준화’ 할 때, 그는 질서와 가치를 무화시키는 생명의 ‘보편화’ 작업으로 체제의 질서에 대응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시에는 감정이라는 비합리적인 영역의 능력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생명을 향한 보편적 사랑이 나타난다.
이러한 맥락에서, 윤동주 시에 나타나는 ‘부끄러움’과 ‘존재적 보편(생명)을 향한 지향성’은, 강력한 국가적 폭력 앞에서 주체가 행할 수 있는 언어적·윤리적 대응이었다. 윤동주 시의 ‘부끄러움’과 ‘보편지향성’ -제도적 형식 앞에서의 시적(詩的) 윤리, 고명재.


윤동주의 생애는, 조국에서 쫓겨난 간도 이주민의 후예로 태어나, 조국의 식민지화로 인해, 외부세력으로부터 소외된 경험의 연속으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조국의 중심으로부터, 후에는 외부로부터 소외되는 그 같은 디아스포라의 환경은, 윤동주 생애의 이주경로를 따라, 시의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하게 되고, 시의식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서구적 근대와 일본적 근대가 혼재한 당시 대한민국의 근대화가, 식민지적 근대라는 새로운 형태로 나타났던 것은, 필연적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한 植民地的 近代의 體驗은, 식민주체인 일본에 대립하면서, 한편으로는 닮아가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한국문학에 나타난 근대성의 체험은, 그러한 혼재된 양가성의 표출로, 혹은 한 편에 치우친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양자택일이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 윤동주의 시는 동화를 거부하며 自發的 疏外를 보여주는 주체상을 형상화함으로써, 또 하나의 대립 방식을 구현해내었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자의 디아스포라 정체성이 만들어 낸 비판적 거리두기, 새로운 문화 건설의 의지가 간도, 서울, 일본 속에 단절된 공간을 형성함으로써, 자기소외의 방식을 통해, 국권 상실의 현실, 직면한 근대성에 대한 회의를 표출하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고향, 병원, 일본의 공간과 결부된 고향 찾기, 데카당스, 자발적 소외와 같은 일련의 응전방식을 통해, 윤동주 시의 주체는 식민근대의 소외를 극복하고, 다시금 참된 주체로의 귀환을 경험한다.
이는, 서양의 강제에 의한 동화가 아닌, 저항을 통한 자기 확립으로서의 동양의 근대를 가능하게 하는 應戰의 방식이기도 하다. 윤동주 시의 디아스포라와 공간 : 시의 창작방식을 통해 나타난 저항의지, 임현순.

-하략-

목차소개

▣ 목차







제1장. 윤동주 시학 一般
詩人流配者, 故鄕(祖國)의 不在, 고조쿠쿄와(五族協和),
流民者, 移民者, 디아스포라, 다문화주의, 自發的 疏外,
만주 유토피아니즘, 고조쿠쿄와(五族協和), 헛것(Simulacre),
植民地的 近代의 體驗, 自我分裂, 고향 찾기, 데카당스,
母性固着, 子宮回歸欲望, ‘뿌리 뽑힌(uprooted)’ 디아스포라,
北間島는 高句麗와 渤海의 故土, Homi Bhabha, 雜種化,
거듭 쓴 양피지(palimpsest), 따라하기, 구별짓기, 犧牲羊,
蕩子意識, 共犯意識, 童心意識, 에큐메니컬(敎會一致運動),
地坪融合(a fusion of horizons)의 場, 이육사, 이용악, 정지용.

제2장. 윤동주 시학 總論
별 헤는 밤, 자기화 지향, 十字架, 肝, 自我와 他者, persona,
享有 불가능한 세계, 他者로의 超越, 倫理的 主體의 空虛,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길찾기, 自畵像, 自己否定, 亡國民,
삶과 죽음, 초 한 대, 逆說의 美學, 병원, 위로, 무서운 시간,
또 다른 고향, 流浪에 의한 序詩的 超脫, 懺悔錄, 슬픔의 敍情,
쉽게 씌여진 시, 삶의 原形性 회복, 憂鬱한 現實主義者, 부끄럼,
鬱憤과 憤怒, 苦惱와 探索, 治癒와 召命, 끝나지 않을 현실,
憂鬱의 깊이, 存在證明으로서 憂鬱, 어둠 자체를 드러내는 憂鬱.

제3장. 尹東柱 詩學 各論
詩人이라는 슬픈 天命, 孟子, 仁義禮智, 四端之心, 惻隱之心,
羞惡之心, 辭讓之心, 是非之心, 中庸의 節制美, 時中, 하늘,
스스로/저절로 그러하는 변화, 윤리를 목적하지 않는 詩,
빛과 어둠, 천상과 지상, 궁극적 진리와 내적 갈등, 無爲自然,
이미지와 음악을 통한 暗示, 반성적 자기 의식, 童詩的 아이되기,
逍遙遊로서 流浪, 노닒으로서 流配, 道德的 텅 빔, anima, animus,
無意識의 意識化, 원죄의식, 율법의식, 속죄양의식, 個性化,
죽음의식(종말론), 부활의식, 自己同一性 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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