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건이 숨 가쁘게 이어진 1945년의 6개월
1945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35년간 계속된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시기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좀 더 시야를 넓혀 생각해보면 어떨까? 1945년은 나치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기다. 그해 4월 서방연합국의 한 축을 맡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뇌출혈로 숨진다. 공교롭게도 같은 달 말에는 무솔리니나 히틀러 같은 독재자들이 처형당하거나 자살했다. 5월에 독일과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연합국의 시선은 마지막 남은 추축국인 일본을 향한다. 7월에 핵실험에 성공한 미국은 일본에 최후통첩을 하지만, 아무 응답이 없자 두 차례에 걸쳐 핵공격을 감행했다. 『1945』의 저자 마이클 돕스는 이처럼 20세기 역사의 분수령이 된 극적 사건들이 숨 가쁘게 이어진 1945년 2월에서 8월까지 6개월을 포착했다. 그래서 냉전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흥미롭게 설명한다.
3거두, 크림반도의 휴양지에서 세기의 담판을 벌이다
“스탈린? 난 그 탐욕스러운 영감을 다룰 수 있지.” _루스벨트
현대사의 주요 길목마다 정상회담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 『1945』는 3대 전승국의 지도자인 이른바 ‘3거두’가 직접 만나 세기의 담판을 벌인 얄타회담(2월 4~11일)과 포츠담회담(7월 16일~8월 2일)의 막전막후를 생생하게 되살린 책이다. 4선 대통령이 되었지만 소아마비로 휠체어에 의존해야 했던 루스벨트. 나치독일을 상대로 5년 반의 전쟁 끝에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힘의 중심이 미국과 소련에 넘어간 사실을 인식한 처칠. 두 사람은 700여 명에 달하는 매머드급 사절단을 데리고 얄타에서 스탈린을 만났다. 회담의 쟁점은 유럽 국경 문제, 전후 배상,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었다. 백전노장인 이 두 사람에게도 ‘토론의 달인’ 스탈린은 만만찮은 상대였다. 소련은 전쟁 중 가장 피를 많이 흘린 나라였고, 이 때문에 가장 큰 카드를 쥔 것도 스탈린이었다. 이 책의 제1부는 160쪽에 걸쳐 얄타회담 참석 인물들의 면면과 각 인물이 상대를 바라보는 관점, 회담 장소와 회담 뒤 각국의 여론 등을 자세히 들려준다.
루스벨트의 죽음과 풋내기 트루먼의 등장
“정말 존재감 없는 부통령이었다. 루스벨트를 나보다 덜 만났고, 미국의 대외관계에 대해 아는 것이 나보다 없었다.“ _찰스 볼렌
얄타회담 두 달 뒤인 4월 12일 신세계질서라는 거대한 판돈을 걸고 진행된 국제적 게임에서 선수가 교체된다. 루스벨트가 휴가 중 사망했기 때문이다. 전임자의 갑작스런 서거로 대통령직을 넘겨받은 해리 트루먼은 외교 문제에 문외한이었다. 루스벨트는 부통령인 트루먼에게 스탈린이나 처칠 같은 거물을 상대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트루먼은 부통령 재임 중 대통령을 만난 것은 두 차례뿐이었다. 이 때문에 얄타회담이나 폴란드 문제, 원자폭탄 개발 등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통령직에 오른 트루먼의 눈앞에서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격변했다. 유럽은 폐허가 되었고, 독일은 참패 직전이었으며, 일본은 본토 결전을 준비했고, 소련은 새로운 초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핵을 둘러싼 포커 게임
“미국은 이제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를 가졌고, 이걸 절대로 바보같이 다뤄서는 안 됩니다.” _헨리 스팀슨 전쟁부 장관
트루먼은 취임한 지 몇 주만에 일련의 기념비적인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것은 새로운 무기에 대한 결정이었다. 정부 내에는 원자폭탄을 제대로만 활용한다면 외교적으로 중요한 카드가 되리라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식 침공으로 일본 본토를 공격하면 미군 수십만 명이 죽을 수 있었다. 미군의 희생을 최소화한다는 전제하에서 트루먼의 선택지는 매우 단순했다. 결국 6월 1일에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독일이 항복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포츠담회담, 냉전의 시작을 알리다
“기쁜 소식이군요. 일본을 상대로 잘 사용하기를 바랍니다.” _스탈린
트루먼 대통령은 취임 97일만에 전 세계가 주목하는 국제무대에 나서야 했다. 베를린에서 남서쪽으로 25킬로미터 떨어진 소도시 포츠담에서 또 다른 3거두 회담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 ‘6개월’ 중 대부분의 기간이 그렇듯 포츠담회담이 열린 17일간에도 자고 일어나면 대형 사건이 터졌다. 역사상 최초의 핵실험이 성공하고, 영국 총선 결과 처칠이 사임했으며,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이 이루어졌다. 가장 큰 사건은 회담 첫날인 7월 16일에 핵실험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틀 뒤에 나온 평가보고서에서 따르면 핵실험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는 대성공이었다. 그렇게 취임 100일만에 가공할 만한 무기를 손에 넣은 트루먼은 엄청난 책임감을 느낀 동시에 회담장에서 스탈린에게 단호하게 맞섰다.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을 담은 ‘포츠담선언문’을 작성할 때에도 스탈린의 협조를 구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미국의 배신에 이를 갈았다. 그는 얄타에서 루스벨트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대일전에 참전할 작정이었다. 그 대가로 일본 본토를 공동으로 점령하는 것까지 기대했다. 하지만 갑자기 모든 것이 바뀌었다. 회담이 끝날 무렵 다음 회담을 워싱턴에서 하고 싶다는 트루먼의 말에 대한 무신론자인 스탈린의 대답은 이랬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그렇게 하지요.”
그 뒤로 두 사람은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조지 오웰이 말한 “평화 아닌 평화”, 냉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