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불행은 떼를 지어 다닌다
‘Are you experienced?’
오르페오
구타
비네토우의 오른발
15달러짜리 사진 찍기
빨간 장미
투바 양탄자 전용 세제
쇼핑 열병
호텔방에 혼자 있는 여자들
일요일 오후
핸드백
비밀
‘Reality’
영원히
마트에서 만난 남자
센토리
영화 〈파니 핑크〉의 감독 도리스 되리 소설집
인간관계에 대한 영리한 고찰.
도리스 되리는 명사수처럼 단어들을 적재적소에 쏘아넣는다. 아마존 독자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는 독일 영화감독이자 작가 도리스 되리의 소설 열여덟 편을 연작 형식으로 묶은 작품으로, 엇나간 사랑과 뒤틀리고 무너진 관계, 일상의 그로테스크함을 간결하고 건조하지만 위트 있게 그리고 있다. 단조로운 일상에 숨겨진 비극성과 광기를 보여주면서도 그 안에서 웃음을 이끌어내는 특유의 글쓰기는 이 책에서도 유효하다. 그와 함께, 잠시 기쁨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실상 문제투성이인 인간관계의 장면장면을 스냅숏처럼 포착해 펼쳐 보인다.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20세기를 통틀어 드물게 여성의 정신적, 육체적 사정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는 작가’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독일과 유럽에서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출간한 작가인 도리스 되리는 영화감독으로 먼저 이름을 알렸고, 현재 포스트 파스빈더 세대를 이끄는 거장으로 입지를 굳혔다. 단편영화와 다큐멘터리영화 시절을 지나 1983년 장편영화 데뷔작 〈마음 한가운데로〉로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뒤 새로운 감각의 코미디를 선보이며 서서히 지지층을 넓혀갔으며, 그 정점이라 할 만한 작품이 1995년 국내에도 소개된 〈파니 핑크〉(원제: Keiner Liebt Mich)다. 운명의 숫자 23을 갖고 있는 남자를 찾아다니는, 엉뚱하지만 사랑스러운 파니 핑크를 주인공으로 돈과 연애, 결혼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코믹하고도 몽환적으로 풀어낸 영화는 번뜩이는 재치와 유머, 감각적인 대사와 영상으로 많은 마니아를 확보했다.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는 ‘영원히Fur immer und ewig’라는 제목으로 영화보다 앞선 1991년 독일에서 출간되었으며, 이 책에 수록된 「오르페오」에서 기본 설정을 빌려 만든 영화가 〈파니 핑크〉다. 영화와 소설의 관계는 비교적 느슨하지만 공통적으로 ‘파니 핑크’라는 특별한 캐릭터가 중심에 있다. 책에서는 마음 편히 사랑하고 사랑받길 원하지만 응답받지 못하는 사랑에 좌절하거나 결혼과 독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파니 핑크는 물론, 파니의 연애 상대들과 어린 시절의 친구, 가족까지 화자로 등장해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진정한 애정을 갈구하지만 기만당하기 일쑤고 무의미하고 공허한 관계 속에 잠식당한 채 우울한 환멸에 빠지고 만다. ‘파니 핑크’를 통해 연결되는 수록작 열여덟 편은 각각 그 자체로 완결된 이야기인 동시에, 모자이크 조각처럼 이어지며 인물간의 관계를 드러내는 한편 더 큰 하나의 이야기로 나아간다.
도대체, 마음 편히 사랑하고 사랑받는 게
그다지도 불가능한 일인 거야?
인간관계에 대한 사려 깊고 독창적인 고찰
첫 단편 「1968년」에서 학창 시절 조숙한 친구 안토니아에게 남몰래 열등감을 느끼며 가슴이 나오게 해달라고,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파니는 드디어 흥미로운 남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파니가 제안하는 낭만적인 사랑에 남자들은 예외 없이 반색하지만 원하는 만큼의 사랑을 되돌려주는 일이 없고, 그녀는 클라우스, 파울과의 연애를 거쳐 크사버의 곁에서도 호텔방에 혼자 있는 여자들을 떠올린다. 소설 속에서 언제나 근사해 보이던 그들과 달리 혼자인 자신은 초라한 것만 같다.
호텔방에서 혼자,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좋은 책을 읽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오후의 클래식을 듣고 딸기 생크림케이크를 한 조각 먹으며 창밖의 눈과 어둠과 추위를 관조하는 삶.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그간 거쳐온 남자들의 사랑이 부족하다고-아니면 거짓이라고-느낄 때면 언제나 가닿고자 꿈꾸던 그곳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자주 그리워하던 섬이 지금은 적막하고 황량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왜 소설에서는 호텔방에 혼자 있는 여자들이 늘 낭만적으로 보이는지, 부러울 만큼 당당하고 고상해 보이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파니 자신이 혼자 있으면 그냥 매력 없고 왠지 존재감도 좀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비눗방울처럼. (「호텔방에 혼자 있는 여자들」)
그 와중에 동생 샤를로테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된 파니는 그런 속물적인 제도는 거부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눈물을 쏟는다. 샤를로테의 삶이 정상적이고 평범한 것이고 자기는 누군가 함께하지 못하도록 저주받았다고 느끼면서. 그리고 동생의 결혼식 당일 엄마에게서 아빠의 비밀에 대해 듣게 된다(「빨간 장미」).
샤를로테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지만 그것이 정말 원하던 삶인지 의문은 가시지 않고 영원한 사랑 따윈 가망 없는 일이라 여긴다(「영원히」). 그리고 엄마로, 아내로 사는 그녀의 삶이 행복한 것 같다고 생각하는 파니에게 한낮의 일탈에 대해 고백한다(「마트에서 만난 남자」).
집으로 어린 애인을 불러들였다가 전혀 예상치 않은 일과 맞닥뜨린 헤르베르트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미친듯이 상황을 수습하려 하고(「투바 양탄자 전용 세제」), 삼십 여년을 함께 산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에바는 공허한 마음을 쇼핑으로 달래려 한다(「쇼핑 열병」). 각자 끔찍하고 지리멸렬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핑크 부부는 두 딸 파니와 샤를로테가 얼마나 불행한지 모른다.
한편 학창 시절 파니의 친구이자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안토니아는 불행한 연애의 돌파구를 찾고자 점술가 오르페오를 찾아간다. 자신은 아르크투루스 행성에서 왔기 때문에 예언을 할 수 있다는 오르페오는 안토니아의 공허한 마음을 꿰뚫어보고, 그녀는 그런 그에게 점점 의지하게 된다(「오르페오」). 영화와는 달리 화자는 파니 핑크가 아니라 안토니아이며, 슬픔에 빠진 젊은 여자가 아파트 위층에 사는 오르페오라는 이름의 흑인 동성애자 점술가를 찾아간다는 설정만 같을 뿐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전개된다. 시간이 흘러 어엿한 커리어우먼으로 파니와 재회한 안토니아는 이제 점술가가 아닌 바흐 꽃 자기치유법에 매달린다(「센토리」).
사랑과 슬픔, 기만과 환멸의 장면들
윤무처럼 펼쳐지는 ‘파니 핑크’들의 이야기
이렇게 윤무처럼 펼쳐지는 이야기 속 파니 핑크, 핑크들은 바람과는 달리 엇나가기만 하는 관계에 상처받는다. 이들의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은 도리스 되리의 솔직하고 꾸밈없는 서술방식 덕분이다. 책장을 넘기며 터져나오던 웃음이 어느 순간 목구멍에 턱 걸리고 마는 것도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캐릭터 덕분이다.
특히 파니나 샤를로테 등 여성 캐릭터들이 고민하는 문제, 결혼과 독신 사이에서, 커리어와 아이 사이에서 쉽지 않은 선택을 요구받고 그 삶을 감당해가는 이야기는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근본적으로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 동시에 잘해내야 한다는 데 압도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엄마여야 하지만 성공도 해야 하고 쉰 살이어도 외모는 서른 살처럼 보여야 하죠.” 한 인터뷰에서 도리스 되리는 말했다. 책 속 인물뿐 아니라 현실의 많은 ‘파니’나 ‘샤를로테’에게 지워진 부담의 또다른 설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는 영화 〈파니 핑크〉를 기억하고 대사 하나하나에 가슴을 쳤던 90년대 영화 팬은 물론 지금의 우리에게도 특별한 독서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안토니아는 오르페오의 아파트에서 조각배처럼 살랑살랑 흔들리는 물침대에 누워 있을 때면 자기와 조니가 죽 늘어선 다양한 방을 하나씩 통과하듯 시간과 세상을 유람하는 생기발랄하고 행복한 연인이라고 상상했다. 그게 사실이라고, 자기와 조니 둘 다 아직 젊고 아름답고―가끔은―무척 행복하다고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난 왜 이렇게 불행할까?” 안토니아가 물었다. 「오르페오」 68~69쪽
파울이 집안으로 사라지자 파니는 담벼락 앞에 앉아 노여움에 울부짖었다. 단순하고 마음 편히 사랑받는 게 그토록 불가능한 일일까? 파니는 크고 부드러운 소파 쿠션처럼 마음 편히 사랑받고 싶었다. 「호텔방에 혼자 있는 여자들」 211쪽
정적 속에서는 우리가 오래전부터 알아온 사이인 척할 수 있다. 나는 우리가 결혼한 지 몇 년은 된 부부라고 상상해본다. 만약 그렇다면 꼭 지금처럼 나란히 앉아 서로를 안다고 믿을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냥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제는 안다. 「비밀」 259쪽
기호의 의미를 생각해내기까지는 잠시 시간이 걸렸다. 무한대. 끝없다. 영원하다. P와 M은 영원할 것이다? 젠장, 영원한 사랑이라니, 아예 시멘트에 새겨넣지 그랬어. 샤를로테는 생각했다.
(……) 좋게 시작한 것들이 좋게 끝날 수는 없는 걸까? 사랑하던 사람들이 꼭 원수가 되고, 작고 귀여운 아기들은 혐오스러운 십대가 되고, 예쁘고 매끈한 다리는 정맥류로 보기 싫게 울퉁불퉁해져야 하나? 「영원히」 308~309쪽
파니는 그가 작업실에서 밤을 보내리라는 것, 그래서 자기는 잠들지 못하리라는 것, 그에게 욕을 퍼부으면서도 자기가 뭘 잘못했나 자문하게 되리라는 것을 안다. 파니는 오늘 하루를 꼼꼼히 되짚어보며 자기 잘못을 찾을 것이다. 크사버를 증오하는 마음과 그의 사랑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것이다. 「센토리」 362~363쪽
▶ 언론평
이 책으로 도리스 되리는 남성과 여성 캐릭터 탐구가 건재함을 보여준다. 웃음과 눈물, 재미와 의미를 위한 책._디 벨트
사랑과 슬픔, 기만과 환멸에 관한 이야기들은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그로테스크함을 훌륭히 다루고 있다. 섬세하면서도 솔직하고 끝까지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_베스트팔렌 블라트
건조한 위트, 입체적이고 꾸밈없는 서술방식으로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게 한다. 도리스 되리는 시간의 이빨이 어떻게 우리를 갉아먹는지 보여준다._bucher.de
인간관계의 수많은 어려움과 얼마 안 되는 기쁨에 대한 사려 깊고 독창적이고 분명한 고찰이 동시대 어느 작품보다도 풍부하게 담겨 있다. 작품을 통해 여성들의 정신적, 육체적 사정에 대해 이렇게 많은 것을 알려주는 작가를 찾아내기란 20세기를 통틀어 쉬운 일이 아니다._쥐트도이체 차이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