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 정치철학
1. 최초의 아나키스트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인간존재의 삶 그 자체는, 지극히 政治的이다. 一言以蔽之하여 ‘인간존재의 삶은 정치’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현실정치는, 어떤 드라마보다도 드라마틱하고, 나아가 어떤 예술작품보다도 예술적이며 재미있다.
그런 ‘정치 드라마’에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삶 자체에 대해 긍정적이지 못한 탓이다. 그리고 정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탓이기도 하다.
물론, 고도의 知的 行爲에 의해 조작되는 정치적 상황을, 서민대중으로서 쉬이 이해되고 분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기득권층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놀아나는 ‘개돼지 群衆’의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는, 죽음의 순간까지 國際政治와 國內政治라는, 현실정치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공부를 결코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東西古今의 역사적 사례를 회고할 때, 아나키즘은 실현불가능한 철학사상이다. 그래서인지 아나키즘이야말로, 현실세계의 인간존재가 꿈꿀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다.
그러한 정치적 상태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권력관계가 구조되고, 그러한 권력관계를 작동시키는 억압적 위력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런데 아나키즘은, 그런 원초적 억압 자체를 부정한다. 때문에 억압적 지배자를 형성하는 所有라는 행위 자체도 부정한다.
그러한 否定이 가능한 것은, 현실세계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所有를 부정하는 無所有的 共有가 실현가능 하겠는가. 지난 역사를 思慮할 때, 애석하게도 그러한 상태는 실현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아나키즘은, 無用하며 不必要한 정치철학에 불과한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예컨대,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的 解體가 전혀 代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음을 是認한다면, 아나키즘 類의 철학사상이 지니는 의미와 가치는 충분히 검증된다.
현실세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아나키즘的 思惟를 하지 못한다면, 결국 아무런 해결책도 제안할 수 없으며, 현실세계는 결코 나아질 수 없을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상황도 별다르지 않다. 右派가 집권하든, 左派가 집권하든, 흔한 기득권 세력의 ‘내로남불’ 식의 致富는 당최 개선되지 않는다.
그렇게, ‘多數의 어리석음’에 대한 ‘小數 기득권층’의 착취는, 저 먼 古代로부터 現代에 이르도록 변화되지 않는다. 그러한 악순환은, 인류의 역사가, 늘 기존의 ‘억압적인 정치적 틀’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탓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開闢과 같은 ‘코페르니쿠스的 轉回’ 요구된다. 그러한 혁명적 변화를 가능케 하는 정치철학적 방법론이, 바로 아나키즘的 사유방식이다.
예컨대, 현대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인 체제적 토대는 모름지기 國家다. 그러한 국가를 보호의 주체로 인식하는가, 억압의 주체로 인식하는가에 따라, 각 인간존재의 이념적 판단은 가름된다.
국가를 보호의 주체로 인식하는 세력은 ‘부르주아’이고, 국가를 억압의 주체로 인식하는 세력은 ‘프롤레타리아’이기 십상이다.
이는, 단지 근대적인 정치철학적 개념으로써 분별되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고대적인 개념으로서, 현실세계의 역사적 작동원리이다. 단지 근대적인 정치철학적 이론과 논리에 의해 새로이 규정되었을 따름이다.
그야말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대립, ‘주인과 노예’의 대립, ‘군주와 백성’의 대립,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대립 등, 그 체제방식은 실로 다양하지만, 그 근본적 작동원리는 彼此一般이다.
그러한 역사 안에서, 인간존재들은 혁명적 변화를 摸索하고 圖謀했다. 하지만 성공한 역사적 사례는 不在하다. 다만, 근현대에 이르러, ‘러시아’와 ‘중국’을 爲始한 ‘共産主義(마르크스주의) 혁명’이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결국 그러한 世界史的 開闢은, 경제적 실패로 인해, 어느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그나마 資本主義體制를 도입하여 改革開放을 진행하는, 중국이 근근이 명맥을 지키고 있으나, 미중 패권전쟁의 상황을 思慮할 때, 그 미래는 불투명하다.
그렇다면 人類史의 근원적인 不條理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왜 이렇게 실패하고 마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존재 本性에 대한 이해가 不在하거나, 外面하는 탓이다.
기존의 억압적인 계급체제는, 분명 인간존재의 意識的 理性에 부합되지 못한다. 심각하게 일그러진, 不公正하며 不平等한 체제방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존재의 無意識的 感性에는 참으로 的確하게 符合된다.
이러한 상황이 명료히 인식되지 못하는 탓에, 인류의 혁명적 변화는 늘 실패를 거듭하는 것이다.
아나키즘 역시 그러하다. 이러한 思惟方式은 수천 년 전 老子로부터 제시된 것이다. 하지만 현대적 아나키즘이 제시되도록, 人類史는 별반 나아진 것이 없다.
그것은 인간존재 본성에 대한 오해 탓이다. 인간존재의 본성 영역에 웅크리고 있는 本能的(陰的) 차원을 是認하지 않는다면, 향후에도 별다른 변화적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은, 東西古今이 매한가지다. 굳이 멀리 갈 것도 없이, 21세기 대한민국의 상황을 살핀다면, 누구라도 쉬이 인식할 수 있다.
과연 ‘문재인 정권’이 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겠는가. 집권 이후 지금껏 진행되는 상황을 思慮하면, 당최 鼓舞的일 따름이며, 煽動的일 따름이다.
그저 권력의 유지에나 집착하던, 러시아, 중국, 북한 따위의 前轍을 밟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左派들에게 권력을 빼앗긴 右派들의 집권 당시를 회상컨대, 그야말로 五十步百步였다.
그러니 庶民大衆들은, 21세기에 이르러서도 당최 暗鬱하다. 그러다보니 여전히 ‘개돼지 群衆’의 次元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역사의 근본적인 작동원리에 대한 理解가 不備하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의 경우도 그러하다. 아나키즘이 좌파적 정치철학사상인 탓에, 우파들은 이를 알지 못하거나 외면한다. 그런데 좌파들 역시, 그저 수박 겉핥기식으로나 아는 정도다.
그래서는 좌파든 우파든, 기득권층의 ‘개돼지’ 노릇밖에 하지 못한다. 역사 안에서, 有數의 아나키스트들이 주장했듯이, 인간존재 스스로가, 오롯하게 자유로운 個人으로서 思惟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人類史를 관통하는 억압적 지배구조는 결코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문재인 정권’에서, ‘조국’의 법무부장관 임명을 강행했다. ‘조국’은 다양한 정치경제적 위법행위를 자행한 인물이다.
특히 이슈가 된, ‘조국’의 딸 ‘조민’에 관한 입시부정 사건은, 그 의도가 未畢的 故意일지라도, 그 일련의 작태는 엄중히 처벌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입바른 소리 잘 하던 ‘유시민’, ‘김두관’, ‘정의당’ 등은, 그토록 부르짖던 正義나 良心을 외면한 채, 그저 ‘내로남불’ 식의 제 식구 감싸기를 자행하였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하지 않던가. 그토록 公正과 平等의 民主化를 부르짖던 세력들이, 결국 기득권층이 되고서는, 기존의 保守右派 기득권층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현재로서는, 보수우파가 進步左派를 뒤집어엎어야 할 시점이다. 그야말로 進步右派의 탄생이 절실한 시대이다.
기존의 보수우파나 진보좌파 따위는 이미 不在하다. 그저 권력의 破廉恥한 寄生蟲이 되어버린 ‘문재인 정권 집단’이라는 保守左派만 존재할 따름이다. 그것은 이미 진보좌파가 아니다. 그렇다고 보수우파도 아니다. 아주 기괴한 보수좌파인 것이다.
그러하다면 이제, 새로운 革新을 이끌 進步右派가 탄생하지 못한다면, 향후 대한민국의 미래는 참으로 암울할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이야말로, 진보우파가 탄생할 수 있는 適期라고 할 수 있다.
‘anarchism(anarchisme)’은, 사회를 ‘아나키’의 상태로 만들려는 정치철학적 사상이며, 이러한 사상가는 ‘아나키스트’라고 한다.
‘아나키’의 상태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배자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프루동’은 그의 저서 ‘소유란 무엇인가’에서, 아나키는 ‘主人과 君主의 不在’를 의미한다고 언급했다.
‘Pierre-Joseph Proudhon(1809~1865)’은, 프랑스의 相互主義 철학자이자 언론인이다. ‘프루동’은, 스스로를 ‘anarchiste’라고 칭한, 최초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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