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뭐든 할 수 있다.
심지어 엄마를 만들어내는 일까지도.”
한 남자의 넘치는 사랑, 치명적인 사랑의 광기
조르주 심농의 후계자가 있다면 바로 에릭 포토리노다. _리르
『붉은 애무』는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몽드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회장직까지 역임한, 프랑스의 언론인이자 소설가 에릭 포토리노의 대표작이다.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수여하는 프랑수아 모리아크 상과 장클로드 이초 상을 수상한 이 소설은 작가의 또다른 대표작 『코르사코프 증후군』과 『영화의 입맞춤』에서처럼 한부모 슬하에서 자란 개인의 내면과 부재의 드라마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아내가 떠나버리고 홀로 어린 아들을 키우던 한 아버지의 애틋한 부성애와, 어느 날 그 아들을 잃은 깊은 슬픔, 미제 사건으로 남아버린 아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아파트 화재 사건 후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린 모자의 이야기 등을 통해 마음속 깊이 파고드는 감상과 서스펜스를 동시에 더한다.
제목 ‘붉은 애무’는 소설에 등장하는 붉은색 립스틱 이름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작가는 소설 속에 붉은색 색채를 강조한 여러 가지 소재들을 집요하게 배치시키며 흑백의 활자를 읽는 독자들의 머릿속에 새롭고 강렬한 시각적 인상을 남긴다.
파리 중심가 아파트 화재 사건 직후 실종된 세입자 모자
화재 사건에 매달리는 보험업자, 그가 간직한 비극
보험회사의 지점장 펠릭스 마레스코. 이른 아침 그의 사무실에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이렇게 이른 시각에 그의 직통 번호로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발신자 표시 창을 보니 비서 마틸드도 아니었다. 그에게 업무 지시를 받기 위해 쉴새없이 사무실 문을 두드려대는 부하 직원들이 들이닥치기 전 잠시 고요의 순간을 즐기고 싶었기 때문일까, 그는 한참 망설인 끝에야 수화기를 든다. 전화를 건 사람은 그의 회사가 관리하는 건물의 소유주 폴 그룬바흐. 노인은 횡설수설하며 사방에 불, 잔이라는 여자, 촛불, 아이들 등의 단어를 늘어놓는다. 심각한 재난을 마주한 그 장기 가입자는 자신이 친구라고 생각한 누군가에게 일을 부탁하고 싶었을 터였다.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을 친구로 대하는 것, ‘현장’에서 고객을 대하던 시절 펠릭스가 고수해오던 방식이었다. 그는 오랜 고객의 전화에 특별히 화재 현장으로 직접 달려간다.
건물 사층의 창문에서 치솟던 시뻘건 불길이 사그라들고, 그는 그룬바흐와 함께 소방대장을 따라 화재 현장 안으로 들어간다. 펠릭스는 파산의 냄새를 풍기는 삶의 잔해들을 살피며 피해 상황을 조사하다 반쯤 타버린 세입자 모자의 사진을 들여다본다. 고슴도치 문신을 한 여자와 그녀에게 애원하는 듯한 눈길을 보내는 아들의 사진. 세입자인 잔 델벡이라는 여자와 그녀의 일고여덟 살 된 아들 브누아는 아마도 화재 발생 직후 자취를 감추어버린 듯하다. 그들을 찾는 수색 전단이 붙었지만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펠릭스는 이 건물 담당이었던 부하 직원 에릭 샤브르리 대신 사건을 맡아 이례적으로 현장에 수차례 방문하며 이 사건에 매달리기 시작한다.
뺑소니 사고로 어느 날 아들을 잃은,
아빠이자 엄마였던 한 남자
“아빠는 뭐든 할 수 있다. 심지어 엄마를 만들어내는 일까지도.”
극에 달한 감정, 광기에 이른 사랑이 늘 그렇듯, 여러분은 분명 충격으로 다가올 이야기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전 이 소설에서 기존 질서에 대한 위반을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란 무엇이고, 어머니란 무엇인가…… _작가의 말
펠릭스는 몇 달 전 홀로 키우던 어린 아들을 사고로 잃었다. 아들이 사고를 당한 이튿날에도 그는 회사에 나와 회의를 이어가며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직원들의 눈에 그는 위태로워 보였다. 직원들은 그가 최근의 화재 사건에 과도하게 매달리는 이유 역시 이 사건이 그의 죽은 아들 콜랭을 떠오르게 해서라고 생각해 그에게 휴식을 권한다. 직원들의 애처로운 눈길, 죽은 아들을 떠올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펠릭스는 다시 사건을 에릭에게 넘기고 떠밀리듯 휴가를 결정한다. 하지만 집 앞에 놓인 콜랭의 붉은색 유모차를 마주할 때도, 시장 단골 가게에 들를 때도 여전히 아이를 떠올리게 된다.
오래전 콜랭이 첫 걸음마를 떼던 날, 그의 아내이자 콜랭의 엄마였던 마리는 그에게 콜랭을 남겨두고 떠났다. 새처럼 훌쩍 날아가버렸다. 아빠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울면서 떼를 쓰는 아이의 결연한 목소리는 그를 늘 얼어붙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아이에게 뭐든 해주리라 결심했다. 아이가 엄마의 빈자리에 상심하지 않도록, 그는 뭐든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엄마를 만들어내는 일까지도.” 몇 번의 고비와 아이에게 과도한 사랑을 쏟아서는 안 된다는 질책도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콜랭은 건강하게 잘 커갔다. 그리고 아이가 커갈수록 둘 사이의 비밀도 함께 키우며 펠릭스는 혼자서 아빠와 엄마 두 역할 모두를 눈물겹도록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뺑소니 사고가 있기 몇 주 전, 마리가 갑자기 돌아오기 전까지는.
“난 자넬 전적으로 신뢰하네. 하지만 내 마지막 충고를 명심하게. 우리 업계에서는 조심하는 만큼 수익이 난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게. 풀린 실밥 하나 방치했다가 외투 한 벌이 통째로 눈앞에서 사라져버릴 수 있단 말이네.” (14쪽)
광기와 파국에 이르는 치명적인 사랑
짧은 이야기 속 강렬한 서사
한편, 라르티그라는 형사가 콜랭의 뺑소니 사건을 다시 조사하기 시작한다. 사고는 두 사람을 떠났던 마리가 돌아온 후, 콜랭의 유치원 앞에서 일어났다. 유치원으로 콜랭을 데리러 간 마리가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콜랭의 손을 놓치고, 혼자서 배수로를 따라 폴짝폴짝 뛰어가던 콜랭이 달려오는 차에 치였다. 운전자는 힘껏 가속페달을 밟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콜랭을 친 차를 제대로 본 사람도 없었고, 마리 역시 운전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어 사건은 미제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광기와 파국에 이르는 비극적인 진실이 드러난다. 사라진 잔 델벡과 그녀의 아들은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콜랭을 친 범인은 누구일까? 180여 쪽의 짧은 소설 속에는 자식을 잃은 슬픔,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 한 아버지의 부성애, 실종과 사망 미제 사건의 서스펜스 등의 다채로운 이야기가 촘촘히 직조되어 있다.
짧은 이야기 속 강렬한 서사를 담은 이 소설 속에는 서사만큼 강렬한 색채, 특히 붉은색 이미지들이 자주 등장한다. 펠릭스가 사용하던 붉은색 립스틱 ‘붉은 애무’를 비롯해 잔 델벡의 집에서 솟구치던 시뻘건 화염, 콜랭의 와인색 유모차, 로날드의 붉은색 자동차, 그 밖에 화재 현장의 붉은색 출입 통제 띠, 콜랭을 임신한 후 마리가 쓰던 빨간색 공책, 콜랭의 어린이집 친구 루이즈의 머리에 꽂힌 붉은색 머리핀, 붉은색 해변용 슬리퍼, 빨간색 부표…… 모두 주인공 화자인 펠릭스의 시선에 포착되거나 그의 과거의 기억 속에서 끌어올린 이미지들이다. 화재가 나던 날부터 아들의 죽음을 연상하며 펠릭스의 머릿속에 붉은색 이미지가 집요하게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콜랭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는 것일까? 사고가 나던 날 펠릭스는 무언가를 목격한 걸까?
◆ 언론평
에릭 포토리노는 주인공의 과거를 하나하나 풀어놓으며 가족을 잃은 슬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표면적인 사건을 묘사하는 듯하면서도 어느새 한 남자의 넘치는 사랑, 치명적인 사랑의 광기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_텔레라마
멜로로 시작해 스릴러로 끝나는 소설. 결말은 예측할 수 없고 극단적이며, 작가의 천부적인 재능이 엿보인다. _렉스프레스
간결하고 서늘한 문체. 전혀 밝지 않은 주제이지만 단 한 페이지도 음울하지 않다. _엘르
현대의 가정 안에서 벌어지는 완전범죄를 통해 전복된 오이디푸스적 서사를 보여준다. _르피가로
조르주 심농의 후계자가 한 사람 있다면 바로 에릭 포토리노다. 그는 정확하고 빠르고 간명한 문체로 가차없이 파고들고 자극한다. 정상적인 인간이란 존재하는가? 이 소설이 던지는 수많은 질문 가운데 이 물음은 모든 추측을 뒤엎고, 충격적인 결말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독자를 놀라게 한다. _리르
작가의 말
붉은 애무
옮긴이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