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잊어버린 것과 잃어버린 것을 찾아내,
반짝이는 일상으로 만드는 마법 같은 책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2012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된 그림책 작가 노인경이 ‘아니요군’을 통해 만난 새로운 세상을 그렸다. 무엇이든지 거꾸로 답하는 아이, 일명 ‘아니요군’은 작가의 아들 ‘아루’이다. 이 책에 0개월부터 36개월까지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아루는 엄마에게, 반항은 인간의 본능임을 알려준 아이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림책 작가가 그린 육아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기존의 육아에세이들이 초보엄마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생명의 신비, 육아의 힘겨움과 당황스러운 일상을 담아왔다면, 이 책은 ‘육아를 통해 만난 새로운 세상’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그 새로운 세상이 사실은 우리가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린 세상이며 잊어버린 마음이라고 말한다.
이 책의 작가 역시 기존에 익숙했던 삶을 버리고 아이엄마의 삶으로 재정립해야 하는 과정이 힘들고 당황스러웠다고 말한다. 그동안 오직 자신과 자신의 작업을 중심으로 하루를 설계해왔는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잠을 보충하고 싶은 엄마 옆에서 아이는 계속해서 쫑알댄다.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낮 시간은 온전히 아이에게 바쳐야 한다. 무슨 말만 하면 ‘그래요’가 아니라, ‘아니요’라고 대답하는 아이와 네모난 방 안에서 온종일 보내야 하는 답답함도 있다.
그런데, 졸음이 쏟아져 눈을 감고 있어도 엄마 인경은 아루의 쫑알거림에 일일이 답하고 싶다. 타인에게 늘 깨어 있고 싶은 마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
아루가 바닥에 물을 쏟아버려도 ‘비우면 다시 채울 수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한다. 주스에 우유를 섞어도 ‘서로 다른 것이 만나면 새로운 게 생기니 좋다’고도 생각한다. 어둠이 지나면 빛이 오고, 빛이 가면 어둠이 오는 것처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인다. 어른이 되어 딱딱한 갑옷을 입고 자신을 지켜왔던 작가 인경은 엄마 인경이 되면서 어린시절의 말랑말랑함, 즉 삶의 유연성을 되찾는다.
(1장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 중 ‘너에게만은 늘 깨어 있어’)
엄마 인경과 아루의 이 짧은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타인에게 한없이 관대한 인간과 만난다. 엄마라서, 엄마니까 보이는 모습이라고 간단히 결론지을 수는 없다. 작가 역시 처음엔 아이가 이끄는 세계가 낯설고 힘겨웠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의 세계에 빠져들수록 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어린시절의 나’와 만날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자신의 일상이 새로이 반짝였다고 말한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주고 ‘삶의 반짝임’까지 선사하는 아이에게 엄마 인경은 당연히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지 않을까. 이토록 큰 것을 선물하는 타인에게 우리는 기꺼이 그를 향해 깨어 있고 싶고, 같이 웃고 싶고, 함께 감동하고 싶다.
● 매일의 그림일기에서 탄생한 위로의 말과 마음들
엄마 인경은 아루가 잠이 드는 밤 시간에 아이와의 하루를 매일 그려왔다. 매끈하게 잘 그린 그림보다 아이와의 일상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는 게 더 중요했던 그림책 작가 노인경은, 이 책에서 처음으로 단순한 펜 선과 색감을 선보인다. 작가 노인경은 20세기 초 유럽 일러스트레이션의 단순한 그림체에서 영감을 받아 머리가 큰 3등신 인물을 탄생시켰다. 원을 등분해 표현한 인물들의 코와 엄마 인경의 헤어스타일, 타원형의 발과 선 하나로 표현된 다리는 초창기 디즈니 스타일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아루’를 처음으로 소개한 그림책 『숨』이 수채화 색감이라면, 이 책은 네덜란드 그림책 <미피>처럼 빈티지한 색감이다.
이런 방식으로 아이의 작은 움직임, 옹알거림, 숨소리 하나 놓치지 않고 기록해온 작가는 그 그림일기들을 모아놓으니 반짝임의 정체가 드러났다고 한다. 어른이 되어 센 척 하느라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마음, 그래서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말, 우리끼리이면서도 하지 않았던 말들이 있었다고 한다.
아루가 데려간 세계 안에서 엄마 인경은 어른이 된 이후로 하지 않았던 마음을 털어놓는다. ‘너에게만은 늘 깨어 있’고 싶다고 마음을 연다. 학창시절 추억으로 끝나는 게 아닐까 했었는데, ‘나는 너의 영원한 친구’가 되고 싶다는 고백도 다시 해본다. ‘말’로만 끝내는 게 아니라 아이의 쫑알거림에 성실히 답하면서, 무한반복되는 아이의 숨바꼭질에 열심히 응하면서, 훌륭한 친구의 역할을 되찾는다. (1장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
그런 엄마 인경에게 아루 역시 응답한다. 아루는 먼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준다. 어린이집에 간 아루는 새로운 친구가 인사하자 갑자기 졸립다고 한다. 엄마 인경은 아직 말이 서툰 아루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느낀다. 아루는 엄마랑만 놀려고 한다. 그래도 온 신경은 새 친구에게 가 있었는지, 그가 장난감 조립을 어려워하자 도와준다. 엄마는 아루의 메시지를 읽는다. “천천히 친해지고 싶어.”
아루는 엄마가 자신의 메시지를 읽어내자 자신이 발견한 세상의 비밀을 알려주고 싶다. 고양이와 강아지를 무서워하는 엄마에게 고양이와 강아지의 말을 통역해준다. 비밀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엄마가 이들과 친해질 때까지 ‘시간을 많이 줄게’라며 이해하고 기다려주기로 한다.
‘기다려줄게’ ‘시간을 많이 줄게’라는 말은 엄마 인경이 어른의 세계에서 듣지 못했던 말이기에 큰 위로가 된다. (2장 아루가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
이렇게 두 사람은 상대가 아프면 서로에게 약손이 되어주고, 작은 일에도 ‘잘했어’라고 칭찬하는 사이가 된다. (3장 우리니까 할 수 있는 말)
● 아이가 있어도 아이가 없어도, 어른을 위한 그림책
아이는 부모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한다. 아루는 잠이 부족한 엄마를 보며, 엄마가 바닥에 딱 붙었다며 자신도 엄마처럼 벽에 붙여달라고 한다. 엄마가 화를 내면 엄마가 아니라 ‘괴물’이라 이름 붙이고, 기회가 오면 엄마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화를 돌려주기도 한다.(4장 엄마가 나고, 내가 엄마야)
이는 아이와 부모와의 관계에서만 보이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우리 가까이 있는 타인의 모습이 곧 우리의 거울이기도 하다.
이렇듯 이 책에 담긴 모자의 마음과 말은 우리의 삶에 고스란히 적용해볼 수 있다. 단순히 육아 그림책인 것 같지만, 마음을 열고 아이의 세계에 기꺼이 들어간 엄마의 마음, 그런 엄마의 마음에 보답하는 아이의 말과 행동, 그래서 행복해진 공동체에서 들려오는 말과 노래에 우리의 삶을 살며시 놓아보아도 좋다. 이 책은 우리의 일상에 온기를 선사하는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이기도 하다.
엄마는 아이 덕분에 잃어버린 시절을 찾았다고 한다. 아이는 엄마가 먼저 나를 이해해줬으니까 나도 ‘시간을 많이 줄게’라고 말했다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잘했다고 말하는 이 관계는 누가 먼저 좋게 시작했는지 따져볼 필요도 없다. 엄마는 모성애로 가득하니까? 아이는 작고 예쁘니까? 전적으로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작고 여린 생명체가 있고, 그 생명체에게 엄한 잣대와 자신의 이기심을 들이댈 수 없다고 판단한 어른 인간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모든 마음들은 차곡차곡 쌓여 서로를 향한 ‘사랑’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