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 고중세
1. ‘전한(서한)’(기원전 206~기원후 8)
고대 중국의 역사를 살피면, 아주 다양한 캐릭터의 인물상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그들의 생애를 통해, 매우 드라마틱한 삶의 행태를 체험케 된다. 굳이 戰場에서, 권력을 목적하며, 목숨을 내놓고 도박을 하지 않아도, 그러한 속내를 나름대로 代理體驗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각종 역사적 사례로써 현재를 살피는 일은, 나름대로 합리적이며 효과적인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고대 역사에서 前漢 시기는,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漢武帝라는 人物像으로서 대표되는 시대이다. 중국 측 역사에 따른다면, 한무제는 衛滿朝鮮을 정벌하고서, 식민지 한4군을 설치한 인물이다.
현대적 관점에 따른다면,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에 대해 배상을 청구하듯이, 한4군 설치로써 수탈당한 것에 대해 배상을 청구해야 한다.
이후 이어지는 역사에서도, 한반도는 중국대륙에 정립된 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착취의 대상으로서 유지되었다. 그러하다면 응당 그에 대해서, 총체적인 배상을 요구해야 한다.
현대인들이 멀지 않은 과거로서 기억하는 丙子胡亂, 壬辰倭亂 등은 말할 나위 없다. 나아가 淸日戰爭, 露日戰爭 등도 그러하다.
그런데 배상의 문제는 차치하고, 한4군이 어느 지역에 위치하였는가에 대한 여부마저도, 여전히 曰可曰否하고 있는 실정이다.
事大主義나 植民主義를 추종하는 자들은, 대체로 한반도 내에 한4군이 배치된 것으로 比定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 韓民族의 전통적 疆域은 대폭 축소되어버린다. 거대한 만주대륙을, 우리 역사에서 스스로 제거해버리는 결과가 된다.
古代史는 그 자료가 不備한 탓에, 어떤 하나의 事實이나 史實에 대하여, 어떠한 이해와 해석을 갖는가가 아주 중요하다. 곧 어떤 史觀에서 접근하는가에 따라, 역사 자체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우리는, 어떤 사관으로써 역사를 살펴야 하는가. 두말 할 나위 없이, 21세기 현재의 대한민국의 國益에 도움이 되는 역사적 관점이 요구된다.
당최 검증될 수 없는 한4군의 위치를, 굳이 한반도 내에 배치하여, 한민족의 역사적 활동 영역을 축소하려는 의도는, 당최 납득키 어렵다.
漢四郡의 위치에 대하여, 과거부터 많은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臨屯郡이나 眞蕃郡의 경우, 설치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철폐되었고, 玄?郡 역시 랴오닝 성 撫順 방면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위치에 대한 논란은, 주로 樂浪郡을 두고 계속되었다.
三國史記를 비롯하여, 고려시대, 이씨조선시대의 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 일대로 比定하였다.
박지원 등의 일부 실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시대 이후, 평양 일대에서 封泥, 漢式 무덤 등, 낙랑 관련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굴됨으로써, 낙랑의 위치는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낙랑토성 일대임이 확증되었다.
2009년에는, 평양에서 출토된 木簡(2005년 출토)을 분석하여, 낙랑군 소속 25개 현의 인구 규모와 정확한 위치 등을, 판독·연구한 결과가 발표되었다.
그러나 신채호 등의 일부 민족사학자 및 재야사학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낙랑이 요동 일대에 존재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리지린을 비롯한 북한 학자들과 대한민국의 윤내현 등의 일부 학자들은, 낙랑을 지금의 요하 서쪽이라고 주장하며, 박영규 등의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낙랑의 위치를 북경 서쪽의 화북 지방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서, 대한민국 사학계는 고고학적인 증거를 무시한 채, 문헌사료의 취합을 통해 나타나는 것으로서, 사실이 아니라고 비판하며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대한민국 사학계가 어떤 대표성을 갖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대한민국 사학계라고 통칭할 만한, 어떤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애석하지만 대한민국 사학계라는 것은, 기껏해야 ‘이마니시 류’와 ‘이병도’의 학맥을 좇아, 밥그릇 싸움하는 집단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런 집단이 현재에 이르러서는, 북한 사학계와 유사한 주장만을 떠들어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런 자들의 反國益的 주장을 어떻게 수용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한4군 위치 비정에 있어, 대한민국의 역사적 국익의 관점에서 주장되는 이론은, 죄다 民族史學이나 在野史學이라고 貶毁해버린다.
그리고서는 자기들이 대한민국 사학계를 대표한다면서, 고작 ‘짱께’나 ‘쪽발이’ 세력에 동조하는 주장을 해대고 있다. ‘짱께’나 ‘쪽발이’들로부터 적잖은 ‘떡고물’이 떨어지고, 제 밥그릇 챙기는 데도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鮮卑族은, 漢族들이 세운 南朝를 정복하고, 북주와 북제로 나뉘어졌다. 그 후 隋나라 楊堅에 의하여, 중국이 통일되었다.
수나라의 양견은, 선비족 우문부가 세운, 北周의 외척으로서 선비족이다. 그 이유는, 북위 때부터 계속, 무천진 출신 선비족 8주국 관롱 집단이, 중국인들을 지배하였기 때문이다.
동일하게 선비족의 다얀씨(大野氏)는, 北周의 귀족이며, 선비족 8주국 관롱 집단 출신, 당 李淵도 선비 출신이다.
이처럼, 중국 역사를 살필 때에는, 동시적으로 북방 유목제국의 역사를 살펴야 한다. 우리 역사를 살필 때에도 매한가지다.
허황된 ‘단일민족’ 이데올로기에 현혹되어, 그저 三國史記, 李朝實錄 따위만을 守舊的으로 살펴서는 안 된다. 삼국사기와 이조실록은, 단일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底本이 되는 텍스트들이다.
따라서 그런 것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위해서는, 응당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傍證史料를 동시적으로 살펴야 함은 明若觀火다.
‘前漢(기원전 206~기원후 8)’은, 고조 劉邦이, 項羽와 대륙 쟁탈 뒤에 세운 왕조로서, 秦에 이어서,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한 왕조이다.
수도는 長安이었는데, 그 위치가, 후에 세워진 후한의 수도 洛陽보다 서에 있어서, 西漢이라고도 불린다.
고조 유방은, 원래 亭長으로, 의병을 일으켜 沛公의 자리에 올라, 楚의 義帝를 섬기다가, 그 세력이 커져, 또 다른 거대 세력인 항우와 경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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