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펴내며
다시, 시작 | 변심 | 도시형 한옥 | “눈에 콩깍지가 씌었던 게지” | 중문의 존재 | 세월의 흔적 | 나란히나란히 | 반짝반짝 | 2017년 10월, 9시 44분의 방 | 개인의 삶에도 역사는 흐른다 | 이해한다는 빈말 | 우리의 쓸 것 | 지붕의 입자 | 쌓여 있는 시간이여 안녕, 새로 쌓을 시간이여 안녕 | 분기점 | 깃발 또는 호루라기 | 오래된 것의 의미 | 경계 밖 | 경계 안 | 집의 실상 | 안목은 안목, 현실은 현실 | 나는 이 집의 들보다 | 안식 | 건설 | 직선의 미 | 나무와 나무가 만나 기둥이 됩니다 | 앞으로 100년 | 흙집 | 집으로 가는 길 | 집은 아래에서 위로 짓는다 | 집도 삶도 전진 중 | 지붕의 속사정 | 나무의 할 일 | 손맛 | 사람이 짓는 집 | 손때로 짓는 집 | 기와의 색 | 잊고 있던 그 시절 | 선들의 집합 | 방방 크기의 이면 | 하루에 할 수 있는 만큼만 일하기 | 이것은 직선인가 직선이 아닌가 | 나의 집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 천막이 걷히다 | 나의 집에 당도하다 | 붉은 떡에 마음을 담다 | 나무를 심다 |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 텅 빈 벽 | 한옥의 얼굴, 창호 | 그저 고운 집 |집이 나의 삶 속으로 들어오다 | 한우물을 파겠다는 다짐 | 문자향을 그리다 | 화장실을 위한 심사숙고 | 부엌, 뭔가 좀 다른 느낌 | 다시, 나란히나란히 | 한낮의 나의 집 | 밤이 깊었네 | 첫눈 | 대문을 이루는 것들 | 봄이 오고 있다 | 또다시, 시작
옛것을 보존하고, 공간에 쌓인 시간의 의미를 되살리려 한 개인의 노력,
이 시대 도시형 한옥의 유의미한 사례가 되기를 희망하다
일제강점기 이후 근대를 거치며 우리의 주거 형태는 매우 급격하고 다양하게 변화해왔다. 오늘날 우리에게 유의미한 주거의 역사란 어디까지일까. 근대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도시형 한옥은 대체로 전통 건축이라는 범주 안에 포함되지 못했다. 그러나 도시형 한옥은 궁궐이나 고관대작들이 살던 이른바 전통 건축으로서의 한옥과 아파트나 서양식 단독주택과는 별개로 매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우리 주거 양식의 하나다.
우리나라 공간과 주거 양식에 관한 책을 만들면서 도시형 한옥에 관심을 가진 이 책의 글쓴이는 2017년 6월 우연히 만난, 1936년에 지어진 작고 오래된 도시형 한옥의 수선을 결정하면서 무엇보다 이 집에 쌓인 시간과 애초의 원형을 잘 간직하기를 원했다. 이로써 이 집의 수선의 전제는 원형의 보존과 시간의 존중으로 정해졌다. 집의 골격이라 할 수 있는 기둥과 주추, 들보 등은 그대로 보존되었다. 물론 집으로서의 기능과 안정성을 보완하기 위해 해체와 조합의 과정은 필수였다. 이를 위해 현대적인 기술과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또한 이 집이 처음 지어지던 때로부터 생활의 방식이 달라지고, 앞으로 살아갈 용도가 따로 있기 때문에 공간의 구성 역시 변화를 주었다.
글쓴이는 단지 도시형 한옥의 특성을 재현하는 것에서 나아가 같은 자리에서 약 80여 년의 시간을 지켜온 이 집만의 역사를 가급적 이어나가기를 희망했다.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1930년대 전후로 지어진 도시형 한옥의 보편적인 유전자라 할 수 있는 단차와 다락, 중문과 대청을 계승하여 새로 짓는 집에 현대적으로 구현해냈다. 아울러 처음부터 이 집에 존재하던 지붕의 기와를 다시 살리고, 유리와 구들장, 붉은 벽돌 등을 새로 짓는 집에 적극적으로 다시 활용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요소들의 연속성을 유지하려 했다. 이는 자신이 새로 짓는 이 집이 ‘한옥 수선’을 통해 새롭게 부활하는 대신 지역을 불문하고 어디나 똑같은 모양으로 복제되는 수많은 도시형 한옥 중 한 채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을 현장에서 구현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았다. 동네마다 그 무늬가 달랐던 오래된 기와를 다시 쓰는 것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기와를 쓰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은 생산하지 않는 오래된 유리를 다시 쓰기 위해서 공사하는 내내 유리창을 여기저기 옮겨 다녀야 했다. 방바닥을 달구던 구들장도, 유난히 혜화동 인근에 많이 쓰인 붉은 벽돌도 다 버리고 새것을 쓰자는 무언의 압력을 이겨내고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중문의 공간은 실내 공간으로 편입하여 현대식 공간으로 활용하지 않았고, 대청의 마루는 무리해서 우물마루를 재현했다. 집의 골조는 물론 창호와 도배를 비롯한 대부분의 공정은 한옥 공사를 주로 하는 숙련된 분들의 솜씨로 진행되었고, 대문의 장식 역시 문화재 장인의 솜씨로 마무리했다.
이러한 글쓴이의 노력은 단순히 보기 좋은 집 한 채를 짓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평생 책을 만들어온 그는 이 집을 만남으로써 앞으로도 쭉 책을 만들며 살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삶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어준 이 집이 개인의 삶을 담는 그릇이자 이 시대에 지어진 도시형 한옥의 유의미한 참조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한 희망과 노력의 결과로 1936년부터 같은 자리를 지켜온 작은 한옥 한 채는 새로운 모습으로 그러나 오래된 것들을 기반으로 삼아 오늘도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
이 책은 이 집에서 앞으로 만들어내는 책이 많은 독자들에게 유의미한 참조가 되어줄 것을 기대하듯, 이 집이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한옥을 짓고 살아갈 것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유의미한 사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그 마음이야말로 이 책의 출발점이자 지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