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_ 불완전한 내가 아픈 당신에게
1부 무너지지 말고
애증의 관계
백의의 천사이기 전에, 저희도 사람입니다
척척박사, 원더우먼
Zeroing
민폐덩어리
당신은 괜찮은가요?
기꺼이 상처받을 것
적절한 타이밍
신의 영역
여보, 나 여기 무서워
잠 못 드는 밤
페르소나
마지막 인사
나 좀 죽여줘
건방진 신규 간호사
의사와 간호사 사이
절벽
콩쥐 간호사
할아버지, 왜 이렇게 왔어!
용기
한 번쯤 그만두고 싶을 때
사이렌
2부 무뎌지지도 말고
무뎌진 듯해도 무뎌지지 않는
삶과 죽음의 공존
간호사의 온도
울어줘서 고마워
누군가에게 인생의 전부
당신은 뭐 때문에 살아?
내가 여기에 죽어 있는 거야, 살아 있는 거야?
난 일단 해보고 후회할래
Right Now
익숙함 속의 소중함
매일 뜨는 해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어
소수
간격
가장 많은 시간을 갖기 위해 오늘도 달립니다
암흑
거기 누구 없어요?
인절미 먹고 가
꽃 한 송이
내가 버티는 힘
에필로그_ 미워한다, 사랑한다
중환자실의 ‘민폐덩어리’가 ‘터널의 불빛’이 되기까지
삶과 죽음, 그 경계에서 만난 사람들
“넌 중환자실에서 뭐가 가장 힘들어? 난 한 공간 안에 갇혀 있는 거. 감옥 같아.”
“선생님, 전 사람 죽는 게 가장 힘들어요. 죽는 걸 지켜보는 것도 힘들고, 죽은 사람 정리하는 것도 힘들고. 근무 끝나고 집에 가서 잠이 들면 꿈속에서 그 장면이 반복돼요. 그래서 잠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아요.” (‘애증의 관계’, 20쪽)
의식 없는 환자들이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고, 24시간짜리 투석기가 여기저기서 돌아가는 곳. 기계의 알람음과 경고등이 수시로 울려대는 중환자실에서는 사소한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다. 처음 하는 일이어도 실수 없이 척척 해내야 하고, 걷지 못하고 말도 못 하는 환자들의 요구사항을 눈치껏 빠르게 해결해줘야 한다. 이 책은 바쁘고 예민한 선배들 사이에서, 위태로운 환자들 앞에서 능숙하게 대처할 줄 모르는 스스로를 진로방해만 하는 ‘민폐덩어리’라 생각했던 중환자실 신규 간호사의 기록이다. 여느 신입사원이 그렇듯 실무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로 중환자실에 들어섰지만 눈에 거슬리거나 튀는 행동은 절대 금물이었다. 중환자실이 무서운 건 신규 간호사도 마찬가지였다.
병원은 원래 지병을 가지고 있다가 오는 사람도 있고 갑작스럽게 오게 된 사람들도 있다. 특히 중환자실은 갑작스럽게 오는 경우가 많다. 중환자실에 누워 보호자와도 같이 있지 못하고, 사회와 단절된 채 침대 밑으로는 전혀 내려오지 못하니 참 답답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의 최전방에서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는 느낌일 것이다. 어쩌면 의료진의 역할이란 어두운 터널에서 불빛 하나가 되어주는 것이 아닐까. 어두운 하늘에 달과 별이 빛을 내 어둠을 밝혀주듯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깜깜한 곳에서 손전등을 켜고 같이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암흑’, 235쪽)
책 속에는 저자가 중환자실에서 만난 다양한 환자들이 등장한다. 음독자살을 시도했다가 구조됐으나 정신이 들자마자 “나 좀 죽여줘, 제발 부탁이야”라며 간곡히 부탁하는 환자, 잘 적응한 듯 보였는데 면회시간에 “여보, 나 여기 무서워……”라며 아내를 붙잡는 환자, 개인물품은 소지할 수 없는 중환자실에서 “너네 내 카드로 삼겹살 회식하고 온 거 다 알아!”라고 고함지르는 환자, 이불 안에서 몰래 인절미를 먹다가 입 주위에 가루를 가득 묻혀 들켜버린 환자. 책장을 넘기다보면 차가움과 따뜻함을 넘나드는 중환자실의 온도가 그대로 전해진다. 특히, 의식이 있는지 체크하는 간호사에게 “내가 여기에 죽어 있는 거야, 살아 있는 거야?”라고 묻는 환자는 중환자실이 어떤 곳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태움, 간호사 장기자랑, 의사와의 갈등, 병원의 지나친 서비스업화……
신규 간호사 눈으로 본 간호업계의 민감한 문제들
수술실에서 일하던 후배가 두 달도 못 버티고 나가면서 했던 말이 있다. 수술실은 감염 위험성을 낮추기 위해 수술실의 온도를 낮게 해두는데, 너무 추워서 카디건을 입고 싶어도 경력이 낮으면 입을 수 없다고 했다. 추워서 카디건을 입는 데도 경력이 필요한 것인가? (‘건방진 신규 간호사’, 114쪽)
왜 해외 간호사에 관련된 책만 쏟아질까? 한국에서는 인정받으며 일하지 못하고 궁지로 몰리는 탓에 간호사들이 해외로 가는 건 아닐까? 이렇게 해외로 한명 두명 가다보면 한국의 병원은 누가 지키게 될까? 머지않아 독일 같은 나라처럼 문화나 말이 통하지 않는 간호사들에게 간호받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콩쥐 간호사’, 131쪽)
간호업계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태움 문제부터 신규 간호사들에게 장기자랑을 강요하는 악습, 환자와 보호자를 ‘손님’ 대하듯 서비스 경쟁을 우선시하는 병원 분위기, 의사에게 집중된 권한으로 발생하는 문제 등 꾸준히 논의되는 간호업계의 이슈들이 저자의 시선을 통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환자의 중증도가 높은 중환자실에서는 저마다 신경이 날카롭다보니 그로 인한 태움과 폭언, 민원사건 들이 끊이지 않는다. 또한 병원은 간호사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팀을 이루어 일하는 곳이지만, 대부분의 잔업들이 간호사에게만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두고 저자는 ‘콩쥐 간호사’라 표현한다.
하루가 끝나면 잘못한 일을 확실히 반성하고 자책한 다음, 두려움을 제로잉한다. 제로베이스로 만드는 것이다. 불필요한 감정들을 0으로 만들기 위해서. 행여 혼이 날까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무서워하거나, 해야 할 일을 못 하는 것을 두려워하기로 했다.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기로 했다. (‘Zeroing’, 42쪽)
좀처럼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임상 앞에서 그만두거나 그냥 견디거나, 두 가지 길만이 있는 듯 보이는 현실은 절망스럽다. 하나둘 떠나는 동기와 선배들을 지켜보면서 계속 병원에 남아 간호사로 일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라윤 간호사는 자기만의 답을 조금씩 찾아가며 성장하는 중이다. 첫째로, 부당함을 직면하고 목소리를 낼 것. 건방지다는 말을 들을 지라도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작지만 필요한 목소리를 내보는 것이다. 둘째로, 하루하루의 제로잉(zeroing). 그날 있었던 일들을 찬찬히 되돌아본 후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다시 0에서부터 담담하게 시작한다. 살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무뎌져야 했기 때문이다.
죽음의 최전방에서 시작한 사회생활
생업을 대하는 90년대생 ‘간호초년생’의 속마음
“아니, 왜 석션을 제대로 못해?”
“선생님, 석션하는 게 무서워요. 갑자기 심장이 멈춰버릴까봐……”
“이 정도 가지고 무서워하면 중환자실에서 일 어떻게 할래?” (‘애증의 관계’, 14쪽)
2018년 12월 기준 간호사 평균 연령은 28.7세, 전체 활동 간호사의 76.4%는 20대, 평균 재직기간은 6.2년이다. 입사 시기는 빠르지만 근속 연수는 매우 낮은 편이다. 경력자가 버티지 못하고 나간 자리를 신규 간호사로만 채우는 분위기도 존재한다. 누구나 경력이 쌓이기 전에 신규 시절을 거친다. 경험을 쌓고 요령을 터득해나가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는 건 당연하지만, 유독 간호사에게는 그 시기가 혹독하다. 작은 실수 하나로도 환자 상태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압박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탓이다. 저자는 한국 간호사 평균 나이에 이 책을 썼다. 지금도 많은 간호사들이 혹독한 신규 시절을 견디지 못해 업계를 떠나고 있고, 그 역시 한 해에만 스무 명이 넘는 간호사들의 떠나는 뒷모습을 봐야 했다.
‘사회생활 5년 차’. 경력이 아주 많다곤 할 수 없지만 일을 막 시작한 단계도 아니다. 이제 손으로는 제법 능숙하게 루틴 일을 다루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이직을 하느냐, 이민을 가느냐, 업계를 떠나느냐 깊이 고민하게 되는 시기다. 그는 지난 신규 시절을 돌아보며 간호사라는 직업을 미워하기만 했다면 이렇게 기록을 남기지 못했을 거라고 고백한다. 하루하루 다양한 사연이 있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상황을 겪는 만큼 자신의 새로운 면을 계속 발견하게 되는 소득이 있다고 말한다. 이 일이 도저히 감당하기 벅차다고 느껴지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마음으로, 하지만 다른 것에 휩쓸리듯 떠나지는 않겠다는 나름의 다짐으로 마음의 중심을 잡는다. 내일도 반복될 ‘애증’의 출근길 앞에서 스스로에게, 또 저마다의 길을 치열하게 걷고 있을 이들에게 몸으로 터득한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다.
누군가의 슬픔과 죽음 앞에 부디 무뎌지지 않기를, 그럼에도 무너지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