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울산에서 정형외과 의사로 일하고 있다. 영성 분야의 책을 워낙 좋아해서 언젠가부터 원서들을 뒤적거리면서 맘에 드는 글이 있으면 우리말로 옮겨서 주변에 전하곤 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신출내기 번역가 직함까지 달게 되었다.
1 우연히 발견된 해석장치
2 언어와 범주 - 해석적 마음의 도구들
3 패턴 인지와 잃어버린 자아
4 우뇌 의식의 토대
5 의미와 이해
6 우뇌 지능 - 직감· 감정· 창조성
7 의식이란 무엇인가?
8 진짜 나를 찾아서
동양철학과 선불교를 위한 뇌과학 교과서
자네, 좌뇌한테 속았네!
인간의 좌뇌와 우뇌는 각각 그 기능이 다르다. 좌뇌는 주로 패턴의 인지, 언어, 분류 및 범주화를 담당한다. 반면에 상황의 큰 그림을 보고 이해하기, 창조성 발현하기, 감정 경험하기, 공간 지각 및 처리 능력은 모두 우뇌에 의지한다. 신체활동에서 좌뇌는 우반신 활동을 통제하고 우뇌는 좌반신 활동을 통제한다. 그런데 1960년대부터 시작해 2020년에 다다른 지금까지 뇌과학과 신경심리학의 연구는 계속해서 좌뇌가 좀 이상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좌뇌가 자꾸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매일 좌뇌한테 속고 있다
이런 연구 중에 가장 주목을 받았던 건 인지신경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Michael S. Gazzaniga) 박사의 간질 환자 실험, 질 볼트 테일러 박사 스스로의 뇌졸중 체험, 뇌과학자 라마찬드란 박사의 환각지 체험 환자 실험 등이다. 이들의 실험에 따르면 좌뇌가 주위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이유와 설명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확인(마이클 가자니가)할 수 있고, 좌뇌의 활동이 정지되고 우뇌만 활성화 되면 충족감과 감사함이 극대화 되고(질 볼트 테일러), 좌뇌가 개연성 없이 너무 나가면 순간 우뇌의 브레이크가 작동한다(라마찬드란)는 것이다. 한마디로 좌뇌는 계속 없는 얘기를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우뇌는 이를 적절히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이클 가자니가 박사의 실험 속으로 들어가보자. 좌우뇌가 갈라진 뇌 환자의 좌뇌에(우측 눈) 닭의 발만 찍은 사진을, 우뇌에(좌측 눈) 눈이 쌓여있는 사진을 각기 독립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어서 다른 몇 장의 그림을 보여주며 최초 보여준 그림과 가장 연관성 있는 것을 고르도록 했다. 뇌의 양쪽 반구는 각자 완벽하게 기능함을 보여주었다. 우뇌는 (왼손을 사용하여) 눈 치우는 삽을, 좌뇌는 (오른손을 사용하여) 닭을 고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 상황이었다.
“왜 왼손으로 눈 치우는 삽을 선택했지요?”라는 질문을 환자에게 던졌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질문을 하면 그건 오직 좌뇌에게만 한 것이다. 말하는 기능은 좌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좌뇌는 이렇게 대답해야만 한다. “모르겠는데요. 우뇌와 연락 끊고 지낸 지 꽤 되었거든요.” 하지만 실제 대답은 달랐다. “닭발은 닭과 연결되고, 그럼 당연히 닭장 청소할 삽이 있어야 하죠.” 환자는 자신의 대답에 절대적인 확신을 보였다.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 언어 담당인 좌뇌는 주어진 주변 정보를 바탕으로 그럴싸하고 말이 되게끔 상황을 재구성하여 설명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비록 정보가 부족해서(우뇌가 본 눈 쌓인 사진을 좌뇌는 모른다) 그 설명이 완전히 틀린 것이라 할지라도.
또 다른 초기 연구를 살펴보자. 인지 및 사고 능력에 아무 문제가 없는 정상인들에게 거기서 거기인 물건들 몇 개를 제시한 후 어느 게 마음에 드는지 골라보라고 했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우측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즉, 엇비슷한 물건들을 늘어놓고 골라보라 하면 오른편에 있는 물건을 집는다는 말이다. 이 실험에서도 경향은 분명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이걸 고른 이유가 뭡니까?”라고 물었을 때, ‘오른쪽에 있는 게 왠지 모르게 좋아요.’라고 대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서도 좌뇌가, 비록 지어냈지만 그럴싸한 이론을 들고 나와서 얘기하는 것이다. “색깔이 예쁘잖아요.”라든가 “질감이 마음에 들었어요.”라는 식으로. 게다가 그들에게 사실을 대면토록 하면 더 재밌는 반응이 나왔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우측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고, 그게 물건을 고른 이유라고 알려주면,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이를 부정하고 믿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는 실험을 진행한 사람들이 정신병자가 아니냐고 항의까지 했다. 본인의 선택이 내부의 자아가 정말로 선호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어떤 임의적인 기준 때문이라는 개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진실을 대면함은 마치 중독 같은 에고를 뚫고 들어가는 일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거슬리고 불편한 경험이다.
있지도 않은 ‘에고’혹은 ‘자아’를 만들어내는 건 좌뇌
저자는 이런 좌뇌의 거짓말들이 만들어낸 거짓말 중에 가장 큰 것은 ‘에고’ 혹은 ‘나’라는 것을 창조해낸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개인적 자아란 실재하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소설의 등장인물에 더 가깝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당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당신 자신은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책 속에서 좌뇌가 어떻게 언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상징을 실제 자체로 착각하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뇌과학자 그리고 신경심리학자들은 ‘자아’를 계속해서 찾아다닌다. 뇌과학은 이제 너무나 눈부시게 발달해 언어 인식 중추가 어디인지 안면 인식 중추가 어디인지,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중추가 어디인지 모두 알고 있다. ‘뇌지도’를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디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어디인지 추정만 하고 있다. 저자의 질문은 이렇다. ‘그렇다면 거기에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책에서 저자는 자아는 머릿속 어딘가에 위치하는 물질적인 실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면, 생각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자아가 있어 그것이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생각의 흐름 자체가 자아라는 현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란 명사이기보다 동사에 가깝다.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이 없다면, 실은 자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뇌 우위 혹은 좌우뇌의 균형 발전은 ‘고통’을 감소시킨다
반면 우뇌의 기능은 흥미롭다. 우뇌는 의미 찾기, 상황의 큰 그림을 보고 이해하기, 창조성을 발현하기 등의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언어화 하고 범주화 하는 좌뇌의 정보처리와는 달리 우뇌는 모든 것을 동시적으로 정보처리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심리학에서는 동시적인 정보처리 방식을 ‘무의식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우뇌는 무의식적인 것으로 박제되고, 좌뇌가 실재의 “주인”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뇌과학자 라마찬드란(V. S. Ramachandran)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우뇌가 마치 무게추 또는 제어장치 같은 역할을 한다고 밝혔다. 좌뇌가 쉼 없이 이야기 하는 도중, 내용이 너무 이상하게 흐르는 것이 감지되면 우뇌가 갑자기 훅 하고 “개입”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 크리스 나이바우어는 다시 한 번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이미 2500년도 더 전에 동양철학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길을 꾸준히 걸어왔던 선불교가 백미였다. ‘자아’가 허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아가 허상임을 깨달으면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고? 어떻게 그런 관계가 성립하는 걸까? 그건 이렇다. 좌뇌가 생성하는 모든 부정확한 판단과 설명들, 거기다가 그것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이 “나”라고 하는, 모두가 당연시하는 전제. 이것이 인간으로서 겪는 내적인 고통의 가장 두드러진 원인이다. 그 모든 것이 좌뇌의 거짓말이었음을 알고 실체를 깨닫는 것이 고통에서 한발 물러서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저자는 우뇌 우위 혹은 좌뇌의 지배 구조를 걷어내고 좌우뇌의 균형적인 발전을 추구해야 함을 이야기한다. 물론 너무 심각한 노력을 하지는 않아도 된다. 수행자가 될 게 아니라면. 저자의 주장처럼 ‘딱 재미있을 만큼만 심각함을 유지’해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