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동물이든 큰 동물이든 생명의 무게는 모두 같아요.
몇 년 전, 십 대로 보이는 소년이 고양이를 잔인하게 학대하고 살해하는 동영상이 온라인에 올라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극히 일부만이 알려졌을 뿐, 길거리에 버려진 개나 고양이를 학대하는 일은 이 순간에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나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의 안위에는 민감하지만,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의 가치에 대해서는 둔감한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인간의 이익을 위해, 때로는 단지 심심풀이로 다른 생명체에게 잔혹한 행위도 서슴지 않지요. 그런데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해도 괜찮은 생명체라는 것이 있을까요? ‘개’와 ‘이’의 죽음을 같은 것으로 본 이규보는 <슬견설>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무릇 피와 기운이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소, 말, 돼지, 양, 벌레,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결같이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어찌 큰 놈만 죽기를 싫어하고, 작은 놈만 죽기를 좋아하겠습니까?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십시오. 엄지손가락만이 아프고 그 나머지는 아프지 않습니까?’
땅 위에 생명을 가진 것은 똑같이 소중하며, 마땅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생명은 한번 잃어버리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고, 돈이나 다른 노력으로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옛 선조들은 벌레 하나도 함부로 죽이지 않기 위해 성긴 짚신을 신고 다녔다고 합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쉽게 다른 동물의 목숨을 빼앗는 어른들, 자기보다 작고 힘없는 생물들을 괴롭히고, 자랑 삼아 인터넷에 올리는 아이들. 이런 생명 경시 풍조를 방치한다면 나중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아이들이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해진다면 동물 학대는 물론, 타인에 대한 괴롭힘으로도 얼마든지 이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아이가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며, 그와 마찬가지로 타인과 다른 생명을 존중하는 어린이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작은 벌레와 마주친 날, 새로운 세계가 열리다.
어느 날 소년은 뿔쇠똥구리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별 생각 없이 신발로 내리치려던 순간,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이 벌레는 어디로 가려는 걸까?’ 소년이 신발을 내려놓고 바닥에 엎드려 보았습니다. 그러자 소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쇠똥구리가 아닌, 커다란 공룡이었습니다.
만약 벌레를 밟아 죽이려 한다면, 발을 멈추고 잠시만 눈을 맞추어 보세요. 우리가 한 번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던 조그만 생물들의 진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