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어조는 사려 깊으면서도 흥미진진하며, 강렬한 반향을 이끌어 낸다.
―《 뉴욕타임스 New York Times 》
바루파키스는 요즘 보기 드문 경제학자다. 알기 쉽게 설명하고, 토론에 기꺼이 참여하며, 폭넓은 시야에서 찾은 그만의 해결책까지 제시해 낸다.
―《 가디언 Guardian 》
야니스 바루파키스는 전 세계, 아니 전 지구에서 최고의 경제학자다. 누구보다 영리하며 누구보다 혁신적이다.
― 스테브 킨 Steve Keen, 경제학자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은 스크루지일까, 파우스트일까?
기업은 신화 속 오이디푸스에게서 무엇을 배웠나?
매트릭스와 프랑켄슈타인에 담긴 자본주의 사회의 미래는?
신자유주의는 우리를 어떻게 빚더미에 앉게 만들었나?
자본주의의 패권으로부터 어떻게 민주주의를 지켜낼까?
《자본론》보다 더 구체적이며,
《자본론》보다 이해하기 쉽고,
《자본론》보다는 100배쯤 더 흥미로운 우리 시대의 《자본론》
은행이 빌려주는 돈은 사람들이 저축한 돈이며, 기업가는 은행에 대출을 받아 사업을 꾸린다. 사업에서 얻은 이윤은 노동자와 관련 사업체에게로 흘러가며, 이 돈은 다시 은행에 모여들어 새로운 대출자에게로 흘러간다. 이런 식으로 경제는 선순환하며 자연스레 발전한다. 그러나 정말일까? 소위 진보라는 사람들은 많은 자금을 보유할 수 있는 자본가와 그에 고용되어 오직 노동만을 바치는 노동자 사이의 문제를 거론하며, 정책을 꾸리는 정치인들은 경제 성장을 이야기하고, 이와 함께 고용의 증진을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든다. 이들 ‘전문가’에게 우리 사회의 문제는 대부분 돈의 문제이며 고용의 문제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경제학자들이 등판하고, 알듯말듯한 경제 이론이 홍수처럼 쏟아진다. 그 틈을 타서 정치가, 운동가, 사회학자들이 질 새라 끼어들어 난상토론을 벌인다. 이들의 토론이 얼마나 그럴듯한지, 우리들 시민들은 이론이 나오기만 하면 우선 반대하고 보거나 아니면 대책 없이 믿어버리기 일쑤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말 그대로 사회를 “둘로 쪼개버린다”.
속이는 자도, 속는 자도 될 필요가 없다.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려면.
그러나 이들의 설명을, 이들의 정책을, 이들이 저마다 내세우는 장밋빛 미래를 우리는 무작정 믿어야만 할까? 이 책, 《작은 자본론》 속에서, 세상에 쏟아진 경제학과 이론의 홍수에 관해 저자가 던지는 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경제학자는 거짓말을 한다. 유능할수록 더더욱 그렇다”고.
이 책, 《작은 자본론》은 우리가 상식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경제학의 이야기들이 이 시대에는 전제에서부터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은행이 빌려주는 돈은 사람들이 저축한 돈이 아니다. 기업가는 대출을 죽는 만큼이나 싫어하며, 사업의 이윤은 결코 선순환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보고 있는 대부분의 경제 정책은 국가의 성장을 견인하기보다는 결코 좋지만은 않은 현 상황을 오히려 악화시킨다. 그것도 분배와 성장 두 측면 모두에서.
중세로 돌아갈 것인가, 현대를 살아갈 것인가?
경제학은 전문가만의 것이 아니며, 경제학자는 고작해야 철학자일 뿐이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경제학자는 기업가의 시녀일 뿐이며, 국가는 그들의 구미에 맞는 정책을 시행할 뿐인 존재다. 불행하게도 인류 역사의 대부분 기간 동안 대부분 그래왔다. 여기에 은행가라는 새로운 인종이 생겨나 이들 사이에서 마치 기생충처럼 이득을 탐한다. 그리고 숱한 경제이론이 이 잉여세력의 사주를 받은 경제학자들의 손에서 태어나 우리들 시민을 한껏 우롱한다. 그것도 그럴듯한 말로.
이들은 경제의 문제는 전문가의 손에 맡기라면서, 만연한 실업을 개개인의 문제로 바꾸고 불황을 부족한 시장화의 탓으로 돌리며 ‘시장’과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민영화와 무한 경쟁, 임금 삭감의 아수라장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 결과 생기는 것은 극도로 불평등해진 경제와 그로 인해 불가피해진 주기적인 경기 침체뿐인데 말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은 이 모든 설명과 정책이 실패할 때쯤에는 비난의 화살을 자기들이 아닌 우리들 국민에게 돌려버린다. 이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해이해진 국민 의식과 사치, 이기적인 노동조합과 최저 임금제 그리고 국가적인 실업 지원과 사회 보장 및 무분별한 복지로 국가가 망해간다고. 이런 말은 권력의 중심이 이동할 수도 있는 선거 때면 유달리 극심해진다.
오이디푸스에서 파우스트까지,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에서 그리고 매트릭스까지
신화와 문학, 영화와 실 사례를 넘나드는 자유롭고도 흥미로운 경제 이야기
얼핏 들으면 과격한 주장 같지만, 저자의 이론은 지극히 정론적이며, 알기 쉽고 흥미롭다. 저자는 곧 자라서 사회 속으로 들어갈 딸에게 들려주는 형식을 통해 어렵고도 과격할 수 있는 내용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풀어낸다. 때로는 역사의 이야기 속으로, 때로는 〈매트릭스〉와 같은 영화의 예를 들어, 종종 익숙한 소설의 줄거리를 빗대거나 어떨 때는 저자 자신의 경험담까지 섞어 독자들로 하여금 책을 읽는 내내 눈을 떼지 못하도록 만든다. 무슨무슨 이론이니, 무슨무슨 그래프니 하는 복잡한 이론이나 용어도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이야기, 우리 자신의 생각을 일깨워 감탄사를 내뱉게 만드는 재치 있는 이야기와 탁월한 견해가 있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 자신이 이미 경제학의 게임 이론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권위자이며, 한 나라의 재경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고, 유럽과 미국에서는 인기 있는 방송 출연자이자 강연자이며, 유럽에서 자본주의의 민주주의 잠식에 반대하는 단체의 수장이기도 하다.
이 책, 《작은 자본론》은 원래 《자본론》의 순서를 그대로 따랐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자본론》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때론 흥미로운 이야기로, 때론 딸에게 들려주는 아버지의 따듯한 목소리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조목조목 설명해내며, 우리가 보는 현상을 왜곡해 해석하는 경제학자들과 기업인, 국가의 모순을 성직자, 자본가, 국가의 예를 들어 통쾌하게 논파해낸다. 경제학의 입문서로서 혹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모순을 더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교양서로서 이보다 더 좋은 책은 없을 것이다.
■ 책 속에서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불평등의 일면이다. 너도 이런 불평등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있을 테지만 직접 본 적은 없을 것이다. 일생 동안 우울한 다수로 살 운명을 갖고 태어난 아이들이 너희 학교에는 없기 때문이다. 결핍과 심지어는 폭력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아이들이 너희 학교에는 없기 때문이다.
? 9~10쪽, 〈왜 이렇게 불평등한 일이 많을까?〉 중에서
양털이 양파보다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지주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농노 무리를 말도 잘 듣고 수익도 더 많은 양 떼로 바꾸면 훨씬 더 이익이겠어!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채 몇십 년도 안 되어 영국의 모든 지방의 풍경이 바뀌었다. …… 봉건 지주가 영지의 주민을 미련 없이 거리로 내몰고 그 자리를 양 떼로 채운 순간, 대영제국은 시장이 있는 사회에서 시장 사회로 변했다.
? 49쪽, 〈가격 대 가치〉 중에서
너무 성급하게 다음과 같이 답하지는 말자. “은행가는 자기 돈 또는 다른 사람들이 은행에 저금한 돈을 미칼리스 씨에게 빌려줄 거예요.” 이것은 틀린 답이다. 정답은 이렇다. “그 돈은 무(無)에서 나온다.” 은행가는 그저 미칼리스 씨의 은행 계좌에 마이너스 50만 유로라고 표시할 뿐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 미칼리스 씨가 자기 계좌를 확인할 때 현금출납기의 화면에서 반갑게도 ‘잔액 50만 유로’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게 된다는 뜻이다. 미칼리스 씨는 잔액을 확인하자마자 기계 공장의 계좌로 50만 유로를 이체한다. 이렇게 50만 유로라는 금액이 아주 간단하게 무에서 만들어진다.
? 80쪽, 〈신용, 위기, 국가〉 중에서
그 가운데 하나는 힘 있는 개인들은 국가 권력 없이 절대로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시장 경제가 처음 생겨났을 때를 떠올려 보자. 예속 농민이 선조들의 땅에서 쫓겨나면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지주들은 어떻게 예속 농민을 성공적으로 쫓아냈을까? 바로 국가 권력을 투입해서였다. 실제로 국가, 곧 왕실은 군대를 보내 격분한 농민들을 쫓아냄으로써 지주들을 도왔다. 한쪽에서는 소수가 부와 편안함 속에서 살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실의에 빠진 다수가 맨체스터와 수도 런던에서조차 빈민굴에서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는 어떻게 ‘사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경찰과 군대의 위협적인 무기를 통해서였다. 간단히 말해 국가 권력 없이 개인의 이윤과 시장 경제는 전혀 가능하지가 않았다.
? 91쪽, 〈신용, 위기, 국가〉 중에서
마리아는 실업자 몇 명을 고용해야 할까 고용하지 말아야 할까 하는 갈등으로 밤이면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고 잠을 못 이루면서 곰곰이 생각한다. 그러다 뜻밖의 일이 일어난다. 요구했던 임금의 50%를 깎아 주고 일할 용의가 있다고 노동조합 대표들이 발표를 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어떻게 반응할까? 이렇게 소리를 지를지도 모른다. “좋아! 내일 아침 당장 바실리스와 몇 사람을 고용하겠어. 새로운 냉장고를 아주 많이 만들어 내놓겠어.” 아니면 정반대의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임금을 절반만 받고도 일할 용의가 있다니, 사정이 정말로 안 좋은 모양이네. 그렇게 수입이 적어지는데, 내 냉장고를 살 만큼 돈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 148~149쪽,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걸린 두 시장〉 중에서
시장이 실업을 흡수하는 데 실패하자, 이들은 다음과 같이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실업이 발생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경쟁이 부족한 죄 밑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사유화를 통한 시장의 해방이라는 마법적인 필터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해방의 마법이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지 않는다면 (실업이 줄어드는 대신 마지막까지 증가한다면) 이들은 다시 다음과 같은 비법을 결론이라며 내놓는다. 바로 더 많은 사유화와 임금, 수당, 연금 등의 삭감이다. 이러한 주문이 그래도 듣지 않으면 이들은 다음과 같이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에 대한 책임은 삭감과 사유화 정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법의 필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노동조합과 최저 임금제 그리고 국가적인 실업 지원과 사회 보장이라는 또 다른 ‘마법’에 있다고. 아잔데 족의 점쟁이와 똑같다.
? 229~230쪽, 〈후기를 대신하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