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어드는 일자리, 늘지 않는 월급 그리고
완전고용이라는 허상과 최저임금이라는 기만에 대한
가장 도발적이며 가장 현실적인 대답
최저임금 vs. 기본소득?
끝이 나지 않는 논쟁에 던지는 역사학자의 새로운 시각
중요한 것은 일과 소득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과 소득을 분리해야 한다.
최저임금의 문제로 사회가 시끄럽다. 한쪽에서는 최저임금이 생활 수준의 향상을 가져오며, 늘어난 소비가 새로운 성장을 견인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동시에 우리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인간의 기본 권리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다른 한쪽에서는 우리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고용 감소와 비용 증가의 예시를 들어가며 최저임금이 이미 위기에 몰린 기업과 자영업의 몰락을 불러올 것이라고도 이야기한다. 물론 이 와중에 임금이 얼마이든, 정작 그 일자리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는 현실은 모두가 외면해버린다. 그 일자리가 오늘날 모두 기대해 마지않는 4차 산업혁명 때문에 아예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정치인들은 진보든 보수든 하나같이 입을 모아 고용 증대만이 우리의 유일한 살길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일자리는 언제나 충분치 않았고, 그 상황은 지금도 절찬 악화 중이다. 설사 실업률 0%가 달성된다 해도 우리 중 대다수는 여전히 직업이 없는 채로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최저임금을 아무리 올려본들 취업 인구의 과반이 저임금으로 살아야 한다는 현실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렇다. 최저임금을 강력히 지지하는 진보는 말 그대로 가난의 평준화를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에 맞서는 보수는 가난한 사람은 무시한 채 모두가 성공하면 그만이라는 엉터리 같은 노래만 부르고 있다. 이럴 때 최저임금에 관한 논쟁은 선거 때 마이크로 나오는 공약만큼이나 시끄러운 논쟁일 뿐이다. 그래도 그 논쟁에 의미가 없지는 않다. 논쟁을 때려 부수는 과정에서 우리는 뭔가를 얻어낼 수 있으니까.
이 책의 저자이자 시민 대상 대학의 역사학 교수, 경제학 칼럼니스트인 제임스 리빙스턴은 이러한 논쟁보다는 이 논쟁의 전제 자체에 우리가 주목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미리 말해두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기본소득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최저임금이니 기본소득이니 하는 문제가 아니다. 4차 산업혁명을 줄어드는 일자리와 늘어날 수도 있는 부가가치에만 집중하는 것도 그다지 의미 없는 일이다.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은 일과 소득 사이의 관계의 변화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와 함께 저자는 수천 년 전 인류의 시작에서부터 바로 어제의 우리로 이어지는 긴 사색의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일이 성공이 되고 성공이 소득이 되고 소득이 종교가 되어 우리가 지구를 파괴하게 된 애증의 역사의 길, 그리고 지구와 함께 우리 자신까지 파괴해왔던 그 길을 지나 새로운 대안을 넘볼 수도 있는 지금 우리의 자리로 이어지는 흥미로운 사색의 길로 말이다.
우리가 겪는 모든 비극은
진보와 보수가 정치 놀음에 경제를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극의 원인은 그것만이 아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마라. 이 말은 좌파의 격언이자 우파의 잠언으로 아주 폭넓게 사용되어 왔다. 좌파의 입장에서는 노동 없이 자본만으로 군림하는 자본가에 대한 효과적인 공격으로, 우파의 입장에서는 권리를 요구하는 노동자에 대한 경계의 말로 활용되어 왔다. 당연하게도 프로테스탄티즘의 노동 윤리에서 뛰어나왔을 이 말은 독자들도 알 수 있듯 비단 서구권만의 상식은 아니다. 그러나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 말은 오독되고 오용되어왔다. 일한 만큼 무언가를 내세가 아닌 현세에서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자본주의를 견인해왔지만, 동시에 일 자체에 인간을 평가할 수 있는 잣대를 부여해버렸다. 일은 한때 성공을 위한 길이었지만, 어느 순간 우리 자신을 평가하는 가치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거지같고 미래도 없고 해봐야 빈곤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일조차, 하지 않으면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빠져버렸다.
현대 사회에서 소득이 없는 인간은 통계에서 밀려나고, 인간이지만 인간이라는 인식 밖의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이따금 복지의 사각지대나 페미니즘 운동의 일환으로 개중 극히 일부만 이따금씩 뉴스거리로 소개될 뿐이며, 우리는 때로 이에 대해 동정하거나 아니면 혐오한다. 이들은 인간이지만 시장 경제 사회 속에서 통계 밖의 인간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은 소득과 합쳐졌고, 소득은 인간의 가치가 되어버렸으며, 다시 인간의 가치 평가는 종사하는 일의 가치, 그 뒤에는 일의 유무 여부로 평가받게 되어버렸다.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는 인간의 악습은 이런 면에서도 위력을 잃지 않는다.
월가의 고소득자와 마약 조직원이 하는 일은 무엇이 다를까?
일과 소득을 분리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악을 긍정하는 비극을 인정해야 한다
두 번의 경제위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악순환을 벗어나는 방법으로 몇몇 사람들은 기본소득을 주장한다. 해외에서는 저명한 CEO들, 특히 실리콘밸리의 CEO들과 경제학자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주장이며, 몇몇 나라에서는 이미 첫발을 내딛기도 했다. 그리고 미처 깨닫지 못하지만, 우리가 접하는 복지 정책 중에는 이미 기본소득의 개념을 활용한 제도도 적지 않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에서 기본소득이란 말을 꺼내면 진보와 보수, 양쪽의 협공을 받기 일쑤다. 좌파는 노동의 순수성을, 우파는 경제에서 자유를 극한적으로 신봉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마라. 이 말의 강력함은 시대를 초월해 지금도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으니까.
그러면 저자의 주장은 과연 어떤 것일까? 저자는 우선 일과 소득을 분리시켜야 한다고 선언한다. 일을 하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과 무관하게 인간은 모두 생계를 유지할 권리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실직자는 모두 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소득과 무관하게 일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애초에 인간의 품성과 미래,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들은 대체로 돈에만 달려 있지 않았다. 일에 돈이 묶인 순간 한쪽에서는 일자리를 가져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비참한 계층이 생겨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일 같지 않은 일을 하는데도 떼돈을 벌고 있는 부도덕한 계층이 생겨나 버린다.
우리가 쉽게 접하고, 그나마 실현 가능한 고소득자는 두 부류이다. 월가의 금융인이 되거나 아니면 뒷골목의 마약상이 되는 것이다. 근데 월가의 금융인이 하는 일은 범죄자의 돈을 세탁하거나(HSBC은행), 악성 채권을 팔거나(AIG, Bear Stearns, 모건스탠리, 씨티은행), 저소득층을 희생양으로 만들거나(Bank of America), 국회에서 표를 매수하는 일(위의 모두) 등이 고작이다. 덤으로 이들은 그런 짓거리를 하느라 전 세계를 경제 위기라는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적이 있다. 그 대가로 이들이 받은 건 고액의 성과급과 퇴직금이다. 악랄하다는 점과 불법이라는 점에서 이들이 마약 조직원과 다른 점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일의 가치가 개인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열심히 성실히 자신을 업그레이드하고 헌신한다면 성공으로 보답받는다고? 그런 말을 해봐야 바보이거나 구제 불능의 멍청이 소리밖에 듣지 못한다.
한때는 보수의 대안, 지금은 진보의 컬트
기본소득은 인간성을 되찾고, 복지의 비용을 절감하며
겸사겸사 지구도 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저자는 상황이 이러니 저 부도덕한 고소득자들을 처벌하라든가, 재벌을 당장 감옥에 처넣으라는 식의 말은 하지 않는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저들이 성공하고 돈도 벌고 권력도 있는 건 결국 현실이다. 다만 그걸 부도덕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과 소득은 완전히 무관하다고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높은 소득이 개인의 품성을 대변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하며, 일자리가 개개인의 모든 것이라는 망상을 더는 품지 말아야 한다. 소개팅이든 맞선 자리든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뭐죠?"라고 묻는 일이 당연한 상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일과 소득과 개인의 품성을 함께 묶어 생각하는 요즘 세상에서는 말이다.
그래서 주장하는 것이 기본소득이다. 인간은 일을 할 수 있고 해야 하지만 그것이 생계 때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돈 때문에 조각을 하는 조각가를 본 적이 있는가? 인간은 유한한 인생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일을 하고, 때로는 내 친구가 같은 일을 하기 때문에, 아니면 그저 그 일이 좋아서 일을 한다. 그리고 그런 일이 진정으로 인류를 발전시키며, 우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일들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인터넷 환경에서는 소득이 없지만 그저 재미로 유익한 일을 하고 유익한 연구를 하며 유익한 정보를 퍼뜨리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오늘날 인류가 향유하는 많은 것들이 오히려 경제와 무관한 이유로 생겨났다. 경제는 그것에 경쟁을 붙이고 대량으로 확대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경쟁과 대량화는 우리가 안고 있는 위기의 근원이기도 하다. 만약 자유와 시장과 경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대로 생산성을 최대한 극대화하여 '최대한 효율적'으로 상품 생산을 개시한다면 우리 인류는 지구를 말 그대로 태워 없애 버리고 말 것이다. 물론 그 전에 경제 체제 붕괴로 인류의 대부분이 빈곤에 시달리겠지만.
사실 기본소득은 원래 우파의 주장이었다. 지금은 네오콘을 거쳐 미국 극보수의 일원이 되어있는 럼스펠트와 딕 체니가 그 열렬한 신봉자였다. 이들은 과도한 복지의 부담을 줄이고, 쇠락해지는 생산성을 향상하기 위해 기본소득을 시도하려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전쟁으로 밀고 가던 경제가 맞을 수 있는 불가피한 파국을 막아내려 했다. 이제 세월이 흘러 한때의 신봉자들은 열렬한 반대파가 되고, 이들을 공격하던 이들은 조심스런 한 걸음을 내딛는 현실을 맞이했지만 반세기 전 이들이 내다봤던 미래는 정확히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일과 소득과 품성에 관한 헛된 망상과 같은 종교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하는 건 좋지만, 일과는 무관하게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복지의 사각지대를 찾아 세금을 투입하거나, 아주 소수 이를테면 왼손잡이를 위한 가위를 따로 만들기 위한 공장을 세우기 위해 무의미한 투자를 하는 것보다는 훨씬 비용이 적게 들며, 지구 환경에도 더 유용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결론은 이거다. 만약 우리가 지구를 구하고자 원하고, 겸사겸사 우리 자신도 구할 마음도 먹는다면 정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일이 아니라 더 적은 일이다. Fuck Work! 일 따위 엿이나 먹어라!
■ 추천의 말
완전고용은 왜 허구인지, 일자리가 줄어들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기존 관념을 깨부수는 강렬한 주장을 담고 있다.
- 브루스 로빈슨, 컬럼비아 대학
노동의 숭고함이라는 환상 뒤에 숨어 우리를 기만하는 관념적 사고에 날리는 신랄한 일격.
-《디시던트 보이스》
경제학을 연구하는 사람과 독자들에게 통쾌함 그리고 미래에 대한 질문을 던져 주는 책.
-《더 초이스》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삼은 그의 주장은 더할 나위 없이 설득력 있다.
-《퍼블릭 북스》
성경에서부터 다니엘 벨의 이론까지, 우리 앞의 현실만큼이나 과격하게 역사를 넘나든다. 단숨에 읽어버렸지만, 앞으로도 계속 꺼내 읽을 것 같다.
- 코리 로빈, 브루클린 대학, 뉴욕 시립대학교
한편으로는 무례한 책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더없이 친절한 놀라운 책.
- 벤저민 쿤켈, 《낙원 혹은 실패》의 저자
■ 책 속으로
물론 딘 베이커에서부터 그레고리 맨큐까지, 즉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심지어 여러분까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법인세의 인상은 투자 위축과 이에 따른 일자리 창출의 위협을 불러온다고. 또한 증세는 더 낮은 세율을 찾아 기업이 해외로 이전하도록 만든다고도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법인세를 올린다고 해도 이러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 26쪽
대부분의 일자리는 민간 기업의 투자에 의해 창출되지 않으며, 그렇기에 법인세를 줄인다고 해서 고용이 늘지는 않는다. 1920년대 이래 순민간투자가 위축되었지만 경제는 여전히 성장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주주들에게 당신들의 회사가 현재 성업 중이며 번성하고 있다는 것을 납득시키는 수단 이외에 이윤의 중요성이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애플을 포함한 대부분의 기업들의 사례가 보여주고 있듯이, 회사가 재투자를 받거나, 고용과 생산 확대를 위한 자금을 융통받는 데 이윤은 그리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되지 못한다.
- 28쪽
우리 시대의 정치인과 학자와 언론인과 지식인과 달리, 당시 사람들은 자유주의자든 보수주의자든 급진주의자든 간에 이들이 발견한 위협과 약속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다. 이들의 관점에서 “완전고용”은 자명한 목표가 아니라 이미 사라진 지평선이었고, 거의 희망이 없는 꿈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이에 따라서 행동했다.
이들이 언뜻 본 미래가 바로 우리 시대의 현실이다.
- 59쪽
한때 주류이던 이러한 발상이 어떻게 급진 좌파들이나 실리콘밸리의 몽상가들만의 전유물로 바뀌어 버렸을까? 이러한 배제 현상은 보수적 반발이나 레이건 혁명 그리고 그와 관련된 온갖 것들을 다 밝힌다 해도 설명되지 않는다. 소위 미국의 우경화는 크게 과장되어 있다. 1980년 이후 레이건과 공화당이 입법 절차와 사법 판결 혹은 “거대한 저항”이라는 백인우월주의 운동 등으로 승기를 잡아왔지만, 실제로 민권, 투표권, 여성 권리에서부터 동성애자 평등까지 승리한 쪽은 우파가 아니라 좌파였다. 그리고 지금 좌파들은 상위 1퍼센트의 특권과 번영을 정당화시키는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전쟁에 뒤늦게 합류했고, 승리하고 있다.
- 64쪽
내가 아렌트의 말을 정확히 이해한 거라면, 이쯤에서 한번 큰 웃음을 터뜨리고 싶다. 이런 말을 아렌트가 진지하게 얘기했다니!
만약 당신이 공장에서 일을 해봤거나 지상 정비원, 청소부 일 혹은 건설 현장 작업을 한 적이 있다면(나는 이 지긋지긋한 일 세 가지 모두를 했었다), 당신들이 아렌트보다는 훨씬 더 제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들은 머리를 쓰지 않는 일처럼 보이는 단순한 육체노동도 머리를 쓰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니며, 그렇게는 일할 수도 없음을 안다. 자신만의 대사 작용에 포획되어 잔존하는 건 짐승 아니면 사이코패스뿐이다
- 108쪽
이것들은 일에 관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의 주제에 대한 변형이고, 현재까지는 둘 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이것들은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에 대한 치료제라며 더 많은 저축, 더 많은 성장, 더 많은 상품을 요구함으로써 우리를 죽이고 있다. 옛날에는 이 윤리가 평민에게 권력을 부여했고, 농민에게 힘을 주었으며, 노동자에게 선거권을 주었다. 이제 이 윤리는 생산력의 발전을 억제한다. 그것은 우리를 다시 살 필요가 없는 과거로 돌아가도록 얽매어놓는다.
- 120쪽
자본주의를 드러내는 대표적 특징은 노동력에서의 시장 창조였다. 다르게 말하면 노동 계급의 발명이다. 그 이전 어느 계층과도 다른 이 사회 계급은, 공유지에 대한 권리의 부재와 시민으로의 자리 매김 없이 이루어진 발명품이었다. 노예도 농노도 아닌 이들 남성들과 여성들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소유했다. 달리 말해 일을 통해 가치를 생산하는 자신들의 능력을 소유했다. 이 능력이 이들이 팔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실제로 대부분이 그렇게 했다. 이렇게 이들은 세상을 바꾸었다. …… 여기서 핵심어는 공유지다. 공유지에 법적으로 소유권을 부여하고, 개인 재산권(인클로저enclosure)을 주장하고 집행하는 일을 16세기 사람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공유지를 이용하지 않으면 도둑질을 하거나 아니면 우리들 현대인이 아는 의미 그대로 임금노동자 일을 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128쪽
어째서 이럴까? 이른바 “생계유지”가 불가능해진 건 언제부터일까? 모름지기 상품이라면 당연히 수출을 해야만 하고, 제조업 분야는 이미 노동조합으로 시대에 대응해왔다는 말은 하지 마라. 그것은 답이 아니다. 오늘날과 같은 탈공업화 사회에서 거의 대부분의 일자리는 3차 산업 일자리, 즉 서비스직 일자리다. 상품의 생산보다는 배송 혹은 관리에 공헌하는 이 산업은 당시 지식인이 예측했듯 1950년대부터 존속해왔다. 옛날의 일자리가 좋았다 해서 그것을 오늘날 다시 재현하자는 예기는 옛날이 좋았으니 옛날처럼 살자는 말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건 그저 바보짓일 따름이다. …… 당신은 동의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위대한 성공이 노동시장을 완성시킨 결과 노동이 무의미해지고, 쓸모없어졌으며, 주류에서 밀려났다는 사실을.
- 135쪽
생각해보자. 프롤레타리아 무산계급이나 자본가 계급이 없다면 자본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이들은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사회 계급이기 때문에 이들이 구분하지도 못할 만큼 소멸해버린다면 자본주의라는 말도 무의미해진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상태가 바로 이렇다.
- 143쪽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현실을 마주해야 할까? 시간당 15달러 이상의 최저임금을 요구하는 운동의 도덕적, 정치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 자체가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했듯 시간당 15달러에 주당 40시간 노동은 당신을 빈곤선 아래로 처넣어버릴 뿐이다(덤으로 이 때 주당 40시간 노동은 고용주가 손해볼 마음을 먹지 않는 이상 결코 주어질 리 없다는 사실도 여러분은 잘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실상 노예의 윤리에 가까운 당신의 노동 윤리를 새삼 증명하는 일 말고 최저임금을 인상하는 정책에 대해 대체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 1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