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끼리는 장난으로 슬쩍슬쩍 한 대씩 때려요.”
많은 학교폭력 가해자는 자신의 폭력을 ‘장난’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처벌을 피하고자 하는 변명일 수도 있고, 자신의 폭력이 어떤 심각성을 갖고 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설사 장난이었다 해도, 그렇게 때린 한 대가 습관이 되어, 점점 강도가 높아지고 어느새 상대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해질 정도의 폭력이 된다면, 그것은 결코 변명이 될 수 없다. 장난이란 그 장난을 당하는 상대 역시 장난이라고 느낄 때만을 가리킨다.
가스파르는 별과 바람을 사랑하는 풍부한 감수성을 지닌 중학생이다. 키는 크지만 차분한 가스파르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먼 도시에 전학을 온다. 낯선 학교에서 잘 지내고자 결심하지만, 악동 안토니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변한다. 이웃 주민인 안토니는 동네로 이사 온 가스파르를 눈여겨본 뒤, 개학 첫날부터 사납게 굴기 시작한다. 안토니는 학교가 ‘약육강식’의 세계라며 자신이 가스파르를 괴롭히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우리끼리는 장난으로 슬쩍슬쩍 한 대씩 때려요.”
안토니의 변명은 제법 그럴싸해 보이지만, 가스파르가 그것을 장난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안토니의 행동은 장난이 아니라 폭력이다.
“안토니를 죽여 버리겠어.”
차라리 가해자가 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때때로 어른들은 설사 피해자가 되더라도 반항하라며 쉽게 말하곤 한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징그러워서라도 덜 괴롭힌다고. 하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얼굴만 봐도 쪼그라드는 심장과 손발. 고통 받는 아이들은 그 누구보다 정말 자신의 심장을 수술이라도 해 튼실하게 만들고 싶고, 무력하게 달린 손발을 가위로 자르고 싶은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잘 안 되니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그러나 어른들(선생님을 포함한 조언을 하는 모든 어른들)은 모른다.
소설 속 고통 받는 자, 가스파르는 그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말도 안 되는 용기를 쥐어짜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해서는 안 되는 방법으로 안토니에게 복수를 시도한다. 지긋지긋한 피해자의 신분에서 차라리 비열한 가해자가 되기를 자처한다. 하지만 그게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스파르는 마지막 선택을 한다. 그 결과가 어른들이 생각의 범위를 벗어날 만큼 심각하기에…… 작가는 어쩌면 학교의 폭력과 왕따라는 현실에 국한하지 않고 문제를 좀 더 근원적인 폭력이라는 문제로 대체한 게 아닐까 싶다.
믿고 싶지 않은 잔인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
안토니와 가스파르는 소설 속 인물이 아니다. 우리 현실 속에 살아 움직이는 청소년의 표상이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단어, ‘왕따와 학교 폭력’은 오늘도 살아있는 실체가 되어 등교하는 우리 학생들의 삶의 발목을 잡고 있다. 작가는 가감 없는 표현과 과감한 단어로 현실의 청소년들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안토니의 장난과 폭력, 폭언 그리고 가스파르의 심리 묘사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감정 변화까지 무엇 하나 놓치지 않았다. 가슴 아픈 묘사들에 오히려 이것이 소설이라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을 정도이지만, 실화를 모티브로 한만큼 작가는 현실을 오롯이, 생것 날것으로 담아냈다. 어쩌면 우리는 이 지옥 같은 현실에 눈을 감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와 함께 외치는 이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우리는 진실 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분명히.
▶ 책 속에서
“걔가 또라이라 그래요. 개학 날 코딱지만 한 배낭을 메고 범생이 차림새로 학교에 들어서는데, 어벙하게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딱 봐도 숙맥이더라고요. 새 운동화 하며, 바지에 딱 잡힌 주름이라니요. 누가 봐도 우리 동네 토박이가 아니었죠. 마마보이 같은 냄새가 솔솔 나더라고요. 좀 사는 동네에서 온 게 분명했어요. 이번 여름에 로지에 주택 단지로 이사 온 걸 봤어요. 저도 거기 살고요. 조용히 잘 살죠. 도시 사람들은 여기 안 와요. 우리 동네는 시끄러운 일도 없고 다투지도 않아요. 나쁜 짓은 한 번도 안 일어났다니까요.” _ 16쪽
가스파르의 할아버지는 온화하고 슬기로운 분이었다. 할아버지는 증오와 원한이 가장 위험한 감정이라고 가르쳤고, 가스파르는 그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겼다. 증오와 원한은 영혼을 갉아먹는 기생충과 같아서, 그런 감정을 키우는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 했다. 또 시한폭탄과도 같아서, 상대방이 파괴되리라 믿으며 그 폭탄 위에 스스로 주저앉는다고 했다. 가스파르는 할아버지가 전하신 귀한 교훈을 결코 잊지 않았다. 하지만 슬프고 분한 감정에 휩싸이고 보니, 교훈을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첫 중학교 친구이자 새 이웃인 찰거머리 안토니는 수요일 오후 늦게 친구들을 데리고 떠났다. 이들의 첫 방문은 악몽으로 변했다. 그날을 절대 잊을 수가 없었다. _51쪽
이제 안토니는 가스파르를 때리거나 도가 지나친 장난을 치기보다, 온갖 협박을 하며 괴롭혀 댔다. 가스파르의 엄마는 경찰에 고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감히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낙심한 아들을 생각하고 또 아들을 지켜보며 자신이 겪은 우울증을 떠올리자, 경찰에 고소해서 아픈 상처를 들쑤시고 싶지 않았다. _93쪽
가스파르는 안토니가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끝내기로 작정한 상태였다. 이제 이 칼끝을 비천한 몸뚱이에 깊이 찌르기만 하면 악몽은 순식간에 사라질 터였다. 간단해 보였다. 가스파르는 속으로 수천, 수백 번 되뇌었다. 끝을 내려면 흔들리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칼 손잡이를 잡은 손이 뜨겁게 타오르는 듯했고, 머릿속이 뒤죽박죽 혼란스러웠다. 구토가 치밀었다. 공터로 들어섰을 때부터 꾹 참았던 구토가 목구멍에서 솟구쳤다. _97쪽
그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고통스러운 삶에서. 희망도, 미래도, 의욕도 사라지자 뜻밖에 마음이 평온해졌다. 가스파르는 이 일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문득 깨달았다. 다정한 엄마의 얼굴이 아른거렸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이건 내 인생이야. 엄마의 인생이 아니라고.’ _1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