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는 것이 한 나라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여기 태극기와 일장기를 나란히 휘날리며 일본을 여행한 사람이 있다. 그것도 북쪽 끝 왓카나이부터 남쪽 끝 가고시마까지 자전거를 타고 3,100km를 달려서. 최근 두 나라 사이의 냉량한 관계나, 과거사를 둘러싸고 혐한과 혐일 감정이 어느 때보다 커져버린 이 시기를 고려하면 터무니없어 보이는 여행이지만 그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멈추어 서는 곳마다 한일 관계의 개선을 바라는 전단지를 나누어주고, 만나는 사람마다 한국과 일본에 대해, 두 나라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여행 내내 찾아간 곳도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때론 아프게, 때론 눈부시게 만나는 역사의 현장들이다. 그 역사의 현장에 서서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는 어떤 길이 있는가?”라고.
북쪽 끝 왓카나이에서 남쪽 끝 가고시마까지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의 길을 잇기 위해 떠나는
3,100km의 자전거 여행
216만3,100명. 2015년 1월~7월 동안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 관광객의 수이다. 일본에서 한국을 찾는 관광객 수도 연간 102만여 명으로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비슷한 기후대, 같은 듯 다른 문화와 크게 낯설지는 않은 음식에 무엇보다도 저렴하고 빠르게 찾아갈 수 있다는 지리적 조건은 두 나라 사이의 여행을 어느 곳보다도 친숙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외적 통계와 달리 두 나라 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어떨까? 한국인에게 일본은 친숙하지만 과거사를 생각하면 속이 부글거리는 애증의 대상이다. 한국 언론에 비치는 혐한 일본인의 모습을 보면 일본인 역시 한국을 그렇게 가깝게 생각한다는 인식을 갖기 어렵다. 때로는 노골적인 혐한 도서가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하고, 대사관과 소녀상을 둘러싼 테러나 시위는 한국에서건 일본에서건 잊지 않고 뉴스에 등장하고 있다. 거기에 최근 양국 정부의 냉랭한 관계는 민간 차원의 활발한 교류마저 위축시키는 악순환을 낳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 책 《라이딩 다이어리 인 재팬》에서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일관계를 적대적 감정을 부추기는 정치인들에게만 맡겨서는 희망이 없다고, 그리고 혐한과 혐일을 부추기는 언론에도 반성할 자세가 있다고, 무엇보다 직접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교류해서 만나는 가운데 그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이를 위해 저자가 택한 것이 역사와 사람을 만나는 3100km의 일본종주. 이른바 피스라이딩이다.
일본을 자전거로 종주하려는 한국인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안내서
책은 말 그대로 일본을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관통한 여행의 기록으로 가득하다. 라이딩 다이어리라는 제목답게 책에는 길 가다 만난 아름다운 풍광, 상쾌하게 달릴 수 있는 멋진 자전거 도로들, 자전거로 일본 종주를 하며 겪을 수 있는 각종 에피소드로 가득하다. 라이딩 서적들이 그렇듯 여행 중 겪을 수 있는 고충들도 충실하게 묘사되어 있고, 자전거로 일본을 여행하려는 여행자를 위한 조언과 팁도 충실하다.
하지만 이 책을 여느 여행서와 차별화시키는 것은 무엇보다 저자가 들른 장소이다. 저자는 일본 종단 코스의 여정을 일본 속에 숨어 있는 한국의 자취, 고대부터 이어진 한일 교류의 흔적과 애증의 근대사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만나는 식으로 잡아넣었다. 일본인이면서도 평생 강제징용을 연구한 초로의 향토사학자를 만나기도 하고, 80년대에 일본으로 시집가 정착한 한국인 며느리들이 사는 도자와 마을에 들르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 끌려온 조선 도공의 후예 심수관과는 한일 양국 관계와 민족주의에 관해 토론하기도 하고, 나오는 길에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다웠던 도고 시게노리(한국 이름은 박무덕이다)의 기념관을 보며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기도 한다. 그리고 최남단 사타 곶에서 만난 이름 없는 일본인과의 대화에서는 울컥 눈물을 내비치고 만다. “이렇게 긴 나라를 대포와 총으로 지키려는 정치인들이 문제다.”라는 말에.
미국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는 것이 한 나라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이라며 그 이유로는 “땀 흘리며 언덕을 오르고 내려야 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수천 킬로미터를 달리며 사람들과 만나고 역사의 현장을 답사한 이 책, 《라이딩 다이어리 인 재팬》은 일본이라는 나라의 모습을 제대로 이해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일 것이다.
▶ 책 속에서
홋카이도 서북쪽 해안도로는 ‘오로론 로드’라고 불리는데, 오토바이 여행자들 사이에서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유명하다. 도로의 이름은 이 지역에서 서식하고 있는 새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고 한다. 오로론은 겉모습이 펭귄과 비슷하게 생긴 새인데 정식 명칭은 ‘우미가라스’다.
- <일본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 오로론 라인> 중에서
승려가 위에 있는 제단을 열었다. 앞에서 묵념을 올리는데 갑자기 눈에 물이 차올랐다. 이역만리 객지에서 생을 마감한 한 많은 삶, 이들의 넋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옆에서 지켜보던 승려가 송구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더 슬퍼졌다.
- <강제징용인의 유골이 쉬고 있는 삿포로 니시혼간지 별원> 중에서
시라토 씨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그는 “젊은 학자들이 이 문제를 연구하려 하다가도 우익들의 e메일 공세 등으로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나 같은 경우 살날도 얼마 안 남았고 컴퓨터도 잘 안 하니까 상관없지만…….”이라며 말을 흐렸다.
- <평생 강제징용을 연구한 향토사학자 히토야스 씨> 중에서
“저는 동일본 대지진 당시 한국의 한 메이저 신문이 ‘일본 침몰’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던 것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본인이 좋은 일도 했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젊은이에게 맞아서 죽은 사람이 있었죠. 그당시 행동을 칭찬한 한국인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요?” 읽고 나니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편지 중에서 지인의 경험을 제외한 나머지 내용들은 혐한 보도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었다.
- <에노모토 씨의 편지, 혐한과 혐일 사이> 중에서
“한국인 여성이 주한 미군과 교제해 아이를 낳았다고 칩시다. 흑인이지만 서울에서 자라 한국말밖에 못합니다. 그럼 그 사람은 미국인입니까? 피부가 검어도, 눈이 파래도 한국 문화를 공유한다면 그는 한국인이고 한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민족을 생각하지 않으면 내셔널리즘을 부추기는 정치가들에게 이용당하게 됩니다. 한국과 일본은 뿌리가 같습니다. 옛날 한반도에서 배를 타고 이민 온 사람이 일본인, 당시 배웅했던 사람이 한국인 아닙니까.”
- <심수관요에서 만난 조선 도공의 후예 심수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