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당신을 돋보이게,
상대방과의 대화를 풍성하게,
우리 모두를 애국자가 되게 만드는 책
(2)우리 모두가 잘 아시다시피 율곡 선생은 조선 유학계(儒學系) 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과 쌍벽(雙璧)을 이루는 학자이시고, 우리나라 성리학을 집대성 했다고 할 수 있으며, 리기(理氣)의 일원적 이원론(一元的 二元論)으로 후세에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케도 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천재의 재능을 나타내셨으며, 아홉 번이나 장원을 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명을 가지셨고, 학문을 민생과 직결시켰으며,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 대동법(大同法). 사창(社倉) 등의 실현에 진력하였으며, 실용실사(實用實事)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우선(優先)으로 하고, 실사구시(?事求是), 경세치용(經世治用),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이념으로 하는, 한국의 실학사상(?學思想)에 많은 영향을 주셨습니다.
(3)선생은 역사의식을 창업(創業), 수성(守成). 경장(更張)으로 보고, 그 자신의 시대를 경장의 시대로 보았으며, 구습(舊習)을 혁신하고 시폐(時弊)를 바로잡아 민생을 도탄(塗炭)에서 구제하기 위해 국방력의 강화, 경제부강, 사회정의의 확립, 동서붕당(東西朋黨)의 조정, 안민보국(安民報國)을 위한 대란을 예방하는 정책, 민생의 고통을 덜기위한 폐법(弊法)을 개혁하는 상소나, 사회적으로 억울한 계층을 풀어주는 노예의 속량(贖良)과 서얼(庶孼)등의 통허(通許)나 민풍(民風)을 진작하기 위한 향약(鄕約)과 묵은 폐단을 지양(止揚)하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새로운 경장을 도모하려면 일개인(一個人)이나 기성관료(旣成官僚)서가 아니라 시무(時務)를 밝히 알고 국사를 염려하는 나라의 최고의 지성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지성을 동원하기 위하여 경제사(經濟司)의 설치를 주장하셨습니다.
(4)위민정치(爲民政治)의 정치적 현실에서, 말이 앞서는 정치를 부정하고 믿음과 행동이 앞서는 정치를 시정(施政)의 소중한 방법으로 삼았으며, 군주(君主)는 나라에 의존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존하는 것이므로, 군주는 백성에게 부모노릇 하는 마음으로 사욕(私慾)을 버리고 민력(民力)을 늦추어주고 민산(民産)을 후하게 해주는 것이, 주(主)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선생이 당시 제시하였던 이론과 시책은,
첫째. 인간의 본성은 누구나 동일하므로 누구나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하여 인간의 보 편적 존엄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둘째. 학문은 권위에 얽매이거나 유속(流俗)에 따르지 않고 자주적인 탐구정신으로 제설(諸說) 을 폭넓은 포용과 명철한 판단으로 엄정한 평가로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셋째. 백성의 곤고(困苦)함을 해결하기 위하여 손상익하(損上益下:위를 덜어 아래에 더해 줌)하는 위민사상으로 대중의 경제적 공익성과 사회적 평등을 주장하셨습니다.
넷째. 교육제도의 합리화로 안민(安民) 없이 교민(敎民)은 불가능하다고 보았으며, 인간교육을 중심으로 교육기관을 중앙과 지방에 국가적인 규모로 제도화 하고 조직화해야 하며 사 도(師道)나 교권(敎權)을 높일 수 있는 경제적 조건과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주어야 한다 고 하셨습니다.
다섯째. 인권문제와 관련하여 사회적으로 불평등한 조건에 있거나 불우한 계층의 불행을 해소 하고자 노력하여야 한다. 즉
(1)일족절린지폐(一族切隣之弊) (2)진상번중지폐(進上煩重之弊) (3)공물방납지폐(貢物防 納之弊) (4)역사불균지폐(役事不均之弊) (5)이서주구지폐(吏胥誅求之幣) 의 묵은 폐단을 지양하는 해결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여섯째. 언로개방은 국가의 흥망에 관계되는 중대한 일로서 언론의 개방성과 여론의 존중을 중시하였으며 모든 정책을 주관할 경제사(經濟司) 창설을 제의 하셨습니다.
(5)교육은 인격교육(人格敎育)을 전제로 하여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인재, 즉 성인(聖人)을 육성하는데 있으며, 이는 인격적으로 완성된 사람 즉,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지식과 행위가 겸비된, 온전한 사람을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훈도(訓導)를 천(賤)한 직책으로 여겨 빈곤하고 자산이 없는 자에게 기한(飢寒)이나 면하게 하고 훈도된 자도 교생(校生)을 침탈(侵奪)하여 자기를 살찌게 하는 교육의 퇴폐상을 시정하기 위해
(1)학교기구를 전국적으로 재정비하고
(2)교원으로서 적합한 인물을 추천받아 고사(考査) 등의 공식적인 과정을 거쳐 선발하여
(3)자격에 따라 적절한 자리에 배치하고 능력에 따라 승진시키고 벼슬길을 열어주며
(4)급료관계도 중앙과 지방에 따라 적합하게 규정된 액수를 지급하고
(5)학생들을 사족(士族)이나 빈한한 문벌에 관계없이 누구나 향교(鄕校)에 입학하여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여, 불평등한 조건에 있거나 불우한 계층의 불행을 해소코자 노력하셨습니다.
또한 가정은 가족 구성원이 화(和)를 실천해야할 훈련장이어야 함을 강조하시고, 또한 사회, 국가, 국제문제의 변동에 따르는 식견을 계속 찾기 위한 평생교육(平生敎育)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으며, 왕성한 현실참여의 의지를 지닌, 현실개혁 실천정신으로 충만한 성리학자 이셨습니다.
(6)언로를 개방함으로써 민심은 공론(公論)으로 구체화 되어 나타나며, ‘공론’은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다고 동의하는 바를 공론이라 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국시(國是)’는 모든 국민이 상의 하지 않고도 함께 옳다고 하는 것이며, 삼척동자까지 그 옳음을 아는 것이 국시 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공론’은 다수의 의견이라는 수적(數的)인 당위도 배제되어야 하며, 이익(利益)으로 유혹하거나 위엄(威嚴)으로 두렵게 하지 않아, 도(道)로 설명하는 유교적 교의(敎義)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공론 구성을 위한 사림(士林)의 언론은, 공식적인 경로를 통하여 정정당당하게 이루어져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7)행정개혁을 통한 인재의 효율적인 관리방안은, 현대 경영관리에서도 배워야 할 점이 많은 것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탁월(卓越)한 안목(眼目)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8)붕당이 생겨나면서 당쟁이 격화되어 정치적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가 야기되는 상황에서 민주이념(民主理念)의 기본인 인간존중, 자유 , 평등사상을 민본, 위민, 서얼(庶孼)의 허통(許通)을 통하여 실현하고자 하여 근대(近代) 민주주의(民主主義)의 뿌리를 만드셨습니다.
(9)성호(星湖) 이익(李瀷)의 말과 같이 율곡선생은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과 더불어 국초(國初) 이래로 ‘힘쓸 것을 인식’ 하였던 두 인물로 일컬어졌으며, 시대적 과제를 통찰하여 마땅히 행할 바의 방법과 그 원리를 아울러 제시한 인물이었습니다.
(10)16세기는 동양사회는 물론이요 서양에 있어서도 아직 중세기적인 전통과 질서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율곡은 당시에 매우 진보적인 사상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현대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시사를 얻을 수 있는 이론을 구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1)이웃에 사는 진복창(陳復昌)이라는 사람의 인물됨이 장차 이중인격자의 표본이 될 것을 7세 때 지은 진복창전(陳復昌傳)에서 예측한 점, 병조판서 재임 시 도승지(都承旨)로 있던 유성룡에게 삼한(三韓)을 구제할 인물로 내금위(內禁衛)에 있는 이순신을 천거(薦擧)할 것을 주장한 것과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대비해 십만양병(十萬養兵)을 주장한 점은 신도 감탄할 정도의 통찰력(洞察力)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23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으며 명량해전(鳴梁海戰) 이전에 이순신 장군이 조정에 올렸던 장계(狀啓) 내용 중에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즉 ”I still have twelve ships>“의 명언을 남겼으며 영국의 해군제독(海軍提督) 이자 군사학자인 G A 밸러드 의 저서에 ”영국인들은 넬슨의 업적을 다른 인물과 비교하는 것을 꺼리지만, 해전(海戰)에서 패한 적이 없고 적의 흉탄에 맞아 전사한 이순신은 넬슨과 비교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12)운명 하시기 이틀 전까지도 북로(北路) 순무(巡撫)의 명을 받은 서익(徐益)에게 육조방략(六條方略)을 말씀하시던 중 졸도까지 하시면서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목숨을 내놓는 훌륭한 성인(聖人)이셨습니다.
(13)서화(書畵)에도 능한 인물로 사후에는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고 선조(宣祖)의 묘정(廟庭)에 배향(配向)되었으며, 파주(坡州)의 자운서원(紫雲書院), 황주(黃州)의 백녹동서원(白鹿洞書院) 등 전국의 20여 서원에 제향(祭享) 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