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감사의 말
1장. 이것도 청년, 저것도 청년
1. 5포세대가 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2. ‘세대’, 일상을 지배하다
2장. 세대론 홍수: 신세대부터 N포세대까지
1. ‘신세대’의 탄생
2. 세대 정치의 등장
3. ‘88만원세대’를 의심한다
4. ‘청년세대’, 전쟁터가 되다
5. ‘청년’이라는 이름의 방패막
3장. ‘청년세대’ 담론, 이 불편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1. ‘청년’은 어떻게 생산되는가?
2. ‘20대 투표율’ 신화
3. 학벌주의, 문제는 20대 대학생?
4. ‘청년세대’를 둘러싼 ‘아무 말’ 대잔치
5. ‘삼포세대’ 파헤치기 (1): 누구의 포기이고 누구의 위기인가
6. ‘삼포세대’ 파헤치기 (2): ‘N포세대론’, 어디서 멈췄나
7. ‘청년’을 위한 언론은 없다
4장. ‘청년세대’ 담론 다시 쓰기
1. ‘청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집단
2. 청년은 청년이 잘 안다?: 청년당사자운동의 명암
3. ‘청년’ 명함: 기회인가 위기인가?
4. ‘상상된 공동체’, 청년세대: 배제된 자들의 연대
나가며: ‘탈-청년’을 위하여
미주
참고문헌
팔리는’ 상품, 청년
오늘날 ‘청년’은 삶 곳곳을 지배하는 ‘기호’가 되었다. 각종 대중매체, 정치권, 기업 광고는 물론 비트코인, 남북 관계, 스포츠 스타 관련 이슈들까지, ‘청년’은 어디든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골 소재이자 셀링포인트다. 청년세대를 상징하는 ‘헬조선’ ‘미생’ ‘3포세대’ 따위의 단어들이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리며 주목을 받고, 그것이 곧 영화, 드라마, 웹툰, 음악 등 각종 문화 텍스트와 마케팅의 소재가 된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돌연변이] [국제시장] 등의 영화들은 개봉 당시 큰 화제를 모았는데, 무엇보다도 ‘N포세대’ ‘청년실업’ ‘취업난과 가난으로 위기에 몰린 청년’ 같은 ‘청년 문제’ 프레임이 지배적인 역할을 했다. 그중 [국제시장]은 ‘청년세대와 기성세대의 대립 구도’와 ‘세대 갈등’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지속적으로 회자됐다. 작품의 생산과 소비, 그리고 그 과정 전반을 매개하는 비평에 이르기까지, ‘청년/청춘’ 혹은 ‘세대’에 대한 특수한 이해 방식이 응집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세대와 무관한 각종 사회 이슈 역시 (청년)세대론의 외피를 두르고 등장한다. 지난 2017년 언론과 정부는 비트코인 문제와 관련해, 20~30대 젊은 층이 ‘흙수저’를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혹은 단시간에 돈을 벌기 위해 비트코인에 뛰어든다며 우려를 표한 바 있다.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 대회 4강에 진출한 테니스 선수 정현이 화제가 됐을 때도 어김없이 ‘청년세대’ 프레임이 제출됐다. 다수 매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정현 선수를 ‘청년세대’로 호명한 것이다. 언론들은 그가 “글로벌 수준의 실력과 자신감, 영어, 세련된 매너, 거기에 유머감각까지 갖춘 한국 청년세대의 한 표본”이라며 입을 모았고, “높은 실업률과 기회의 불공정이 이들(청년세대)을 괴롭힐지언정 그 저력과 패기를 꺾지는 못할 것”이라는, ‘비트코인’ 때와는 사뭇 다른 종류의 청년 담론을 내놓았다.
청년세대론은 남북 관계를 분석할 때도 적용된다. 통일 혹은 대북 인식이 세대별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식의 해석이 심심찮게 반복된다.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에 비해 북한, 통일에 대해 더 부정적인 인식을 갖는다는 게 주된 논지다. 이런 주장은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여자 아이스하키팀 남북 단일팀이 추진되는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언론은 청년세대가 기성세대와 ‘공정성’에 대한 다른 감각을 갖고 있어서 남북단일팀에 반대한다며 터무니없는 주장을 펼쳤다. 이쯤 되면 청년세대에게 쏟아지는 일련의 스포트라이트 세례를 강력히 의심해볼 만하다.
다른 무엇도 아닌 ‘세대’
그렇다면 왜 ‘청년’인 걸까?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수많은 ‘청년세대 담론’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기 앞서 한 가지 명확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청년’에 대한 이 어마어마한 관심들이 ‘청년 개인’이 아닌 ‘청년세대’라는 집단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세대’다. ‘세대’는 어떻게 사회 현실을 설명하는 강력한 지식이 되었을까? 또 어떻게 개인을 ‘세대’라는 범주로 집단화할 수 있는 것일까? “세대의 중심성을 주장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문제들을 세대 개념으로 풀어 이야기하는”(로버트 볼) 방식을 흔히 우리는 ‘세대주의’라 부른다. 세대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한국에서 세대주의는 주로 1990년대 이래 대중매체, 기업과 광고기획사, 정치권을 통해 확산되었다고 분석된다.
그렇다고 해도 실제로 사람들이 어떻게 세대 문제가 중요하다는 믿음을 공유하게 되었는지, 즉 왜 ‘세대’라는 범주로 현실을 설명하는 일이 정당하다고 많은 이들이 믿게 되었는지 잘라 말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주의가 퇴조하며 ‘계급’ 대신 ‘세대’나 ‘젠더’가 사회를 설명하는 핵심 범주로 부상했다는 논의도 있지만, 왜 그게 하필이면 ‘세대’였는지를 온전히 해명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세대 담론이 왜 이렇게까지 일상을 지배하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찾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세대론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지배적인 프레임으로 군림하는 지금의 현실을 직시하는 일이다. 어쩌면 그 수많은 세대 명칭과 논의들이 ‘세대’ 범주가 정당하다고 믿는 우리의 무의식을 방증해주는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를 강타한 청년세대론: ‘신세대’ ‘세대 정치’ ‘88만원세대’
사람들이 유독 ‘세대’ 범주에 의존하는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 왜 ‘청년세대’만 언제나 특별히 주목받는 걸까? 또한 그 주목은 왜 대체로 청년들에게 ‘혐의’ 덧씌우기로 귀결될까? 이를테면, 나라를 부정하고 ‘헬조선’을 외친다는 혐의, 윗세대에게 불만이 많다는 혐의, 어려움 없이 자라 인내심이 없다는 혐의들 말이다.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로 요약되는 그 원초적인 세대론은 이제 정치, 경제, 문화, 정책 영역에서 통용되는 ‘어엿한’ 지식으로 구축됐다.
1990년대 초반은 한국 사회의 세대 담론이 중요한 변곡점을 맞이한 시기로, 세대 연구가 활발해지고 ‘세대’라는 용어가 일상화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출현한 ‘신세대론’은 “보통명사로서의 신세대와는 다른” 의미로 “대략 70년대에 출생한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까지의 젊은이를 그들 특유의 특성과 관련지어 지칭하는 고유명사”의 지위를 획득했다. ‘신세대론’의 주창자들은 ‘신세대’가 ‘자유와 풍유로운 삶’ 또는 ‘새로운 저항’을 추구한다고 주장했다. ‘오렌지족’과 ‘낑깡족’이 바로 그 그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주창한 ‘신세대’의 실체는 정작 모호했다. 일부 대학생들은 “신세대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자기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있는지 궁금해”했고, “막상 자신은 신세대의 범주에서 빼주기를” 바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신세대론이 말하는 저항의 근거가 빈약하다거나, 세대 중심적 사고틀이 “계급, 경제, 지역, 환경, 민족 등의 사회적 갈등들”을 주변화하고 은폐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상업주의로 무장한 저널리즘과 광고 회사들이 젊은 층을 소비주의 문화로 끌어들이기 위해 신세대론을 주장하고 있다는 혐의도 제기됐다.
2002년은 젊은 층에게 또 한 번 폭발적인 관심이 쏟아진 해였다. 그 관심은 현실 정치의 맥락에 기초하고 있었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젊은 층의 높은 지지를 받으며 대선 후보가 되었는데, 세대 문제가 현실 정치에서 그토록 큰 이슈가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후 열린우리당이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 역풍을 맞아 과반 의석을 얻는 성과를 거둔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는 아예 ‘인터넷’을 무기 삼은 ‘젊은 세대’의 승리로 해석됐다. 이때부터 ‘20대의 투표가 세상을 바꾼다’는 ‘20대 투표율 신화’가 시작된 것이다.
한편 2007년은 세대 정치의 맥락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형성한 ‘88만원세대론’이 출현한 해였다. 우석훈과 박권일의 책 《88만원세대》에서 시작된 ‘세대 간 경제 불균형’ 논제가 사회 전반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20대가 한 달을 일해도 88만 원밖에 벌지 못한다는 명제’는 사람들에게 커다른 충격을 안겼지만, 사실상과학적 계산에 근거한 것은 아니었다. 즉 과학적 의의보다 정치적 의의가 더 큰 기획이라는 것이 ‘88만원세대론’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였다. 《88만원세대》의 헤드 카피인 “20대여,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라는 주문이야말로 해당 담론의 진짜 목적을 드러낸다는 지적이다.
담론 경쟁의 유력한 카드, ‘청년’
청년세대를 진보 정치의 주체로 소환한 ‘88만원세대론’이 크게 유행하자, ‘청년세대’라는 기호는 전쟁터가 되었다. ‘88만원세대론’에 대체로 동조한 진보 진영에서는 물론 보수 진영에서까지 무수한 청년 담론과 명칭을 쏟아내며 맞대응 전략을 펼쳤다. 진보 진영이 ‘88만원세대’나 ‘N포세대’ 명칭을 통해 20대 청년을 ‘경제적으로 열악하고 불쌍한 세대’로 형상화했다면, 보수 진영은 그 정반대 지점에서 20대와 30대가 ‘대한민국의 가장 위대한 세대’라고 선언했다. 청년세대가 지닌 능력과 잠재력을 강조하는 ‘실크세대’ ‘G세대’ ‘G20세대’ ‘P세대’ 따위의 세대 명칭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이 ‘청년들의 경제적 현실’과 관련해 전혀 다른 진단과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진보 진영은 청년세대가 스스로 청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탈정치적 성향을 극복하고 정치와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반면 보수 진영은 정치와 투표에 나서는 청년들의 실천을 정치권의 선동에 따른 비이성적인 행위로 규정하고, 청년세대는 원래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뚜렷한 정치적 성향을 사실상 갖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어려운 경제 상황을 타개하고 살아남으려면 “창업하고, 해외에 진출하고, 스토리를 만들고, 산업 현장에 뛰어들”라고 역설한다.
이런 구도에 따르면, 양측은 완전히 상반되는 주장을 펼치는 듯하다. 예컨대 청년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다는 ‘3포세대’ 담론과 청년들이 세계를 개척하고 있다는 ‘P세대’나 ‘G세대’ 담론만 보더라도 그렇다. 이 담론들이 정말 같은 청년들을 지시하시는지는 누가 봐도 의심스럽다. 이 이질적인 ‘청년 상’들은 오히려 ‘청년세대’가 특정 사회 이슈에 대한 진영 논리를 정당화하는 전략적 카드로 활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이 ‘청년세대’와 ‘청년 문제’를 진단하는 방식 자체는 다를지 몰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청년층이 겪는 현실을 취사 선택하고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불편한, 너무나 불편한 청년 담론
문제는 ‘청년세대’ 담론 대부분이 실제 청년들의 객관적 현실을 왜곡·과장하고, 정치 이슈나 사회문제의 책임을 청년세대에게 전과한다는 데 있다. 이는 현실의 다양한 청년들을 ‘청년세대’라는 동일성 범주로 집단화하는 메커니즘에 기초한다. 즉 청년 개인들의 복잡다단한 삶의 조건이나 가치 지향을 지운 채 동질적인 ‘청년세대’를 상상할 때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요즘 젊은 것들이 문제’(학벌주의, 비트코인, 저조한 투표율 등등)라거나 ‘요즘 청년들이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하고 있다’(3포세대론)는 논의다. 사실상 청년 당사자들의 견해나 뜻과는 전혀 무관한 진단이며, 이것이 사실인지 입증할 방도도 없다.
이런 집단주의적 상상력은 실제 청년들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한다. 청년 담론이 청년들의 삶을 더 악화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정부나 국가 기관, 정치 진영, 언론 등은 ‘청년 이슈’를 부각하고 ‘청년 문제 해결’을 외치면서도, 정작 그 사안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청년 당사자들의 목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 결과 언제나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진단과 해결책을 ‘청년들을 위한답시고’ 내놓는다. 그중 최악은 언론이 (재)생산하는 온갖 ‘요즘 것들’ 이미지로, 주로 ‘20대 막장남’ ‘20대 막말녀’ ‘독서하지 않는 대학생’ 등이 그 리스트에 오른다. 청년세대는 대개 이런 악의적인 호칭들로 상기된다. 이런 식의 논의는 청년세대를 완전히 동질적인 개인들의 집합으로 환원한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되지만, 더 심각하게는 노동계층 청년이나 여성 청년 등 상대적으로 더 소수자인 청년들의 존재를 은폐한다.
청년세대를 둘러싼 이 모든 서사는 연구 논문, 정책 보고서, 신문 기사, 통계 자료 등의 텍스트를 통해 ‘객관적인 지식’으로 탈바꿈한다. 이 ‘지식’은 청년들의 삶에도 강력하게 개입한다. 스스로 그런 선입견을 의식해 자신의 삶을 조정하려 하는 청년들의 태도가 이를 말해준다. 이릍테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취업 눈높이가 높다’는 선입견을 의식해, 자신의 눈높이를 따져보기도 전에 ‘눈높이’에 맞는 ‘실력’을 갖추기 위해 ‘노오력’하거나, 일자리의 질에 대한 기대를 낯추고 스스로 열악한 노동 조건을 받아들이는 청년들이 적지 않다. 근거 없는 선입견들이 계속해서 ‘지식’으로 축적되면 제도 차원에서도 청년세대 구직자에게 불리한 정책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20대 대학생’을 표적 삼는 학벌주의는 또 어떠한가. 한국 사회에서 학벌주의는 언제나 20대 대학생(특히 상위권 대학 재학생)들의 특권 의식으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학벌주의는 세대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구조적 문제다. 그렇지 않다면 서울캠퍼스와 지방캠퍼스, 주류 학과와 비주류 학과를 서열화하고 차별하는 사회 전체의 풍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시대’ 문제를 ‘세대’ 문제로 퉁치면서 책임 소재를 특정 집단에게 전가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볼 때다. 이때 귀책받는 집단은 공격당했을 때 반론을 펼칠 만한 충분한 담론적 무기를 지니지 못한 약자일 가능성이 높다. 저조한 출산율을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하는 이기적인 여성들’ 탓으로 돌리는 말도 안 되는 논리가 횡행하는 것처럼 말이다.
‘N포세대’론 파헤치기: 도대체 ‘누가’ ‘무엇을’ ‘포기’한다는 말인가
한편 2011년 《경향신문》의 기획시리즈 ‘복지국가를 말한다’에서 처음 등장해 지금껏 효력을 유지하고 있는 ‘3포세대’론의 경우, 뚜렷한 근거 없이 사회문제의 책임을 청년세대에게 돌리는 여타의 조잡한 담론들과 확실히 차별화된다. 청년들의 열악한 경제 현실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88만원세대’론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은 듯하지만, 3포세대론은 결코 ‘짱돌을 들라’고 주문하지 않는다. 그보다 ‘사회적, 경제적 약자’로 전락해 연애, 결혼, 출산 등 삶의 기본적인 권리마저 포기하게 된 청년들을 위해 복지 대책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의도를 명시한다.
3포세대론은 ‘3포’에서 그치지 않고 ‘5포’ ‘N포’로 끊임없이 증식했다. 결국 ‘N포세대’론은 오늘날 청년들이 많은 것을 포기했고, 포기하는 항목이 점점 늘어나 ‘정치적 주체’로 서기에도 힘겨운 상태에 이르렀다는 점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청년당사자들은 정작 ‘N포세대’론에 왠지 모를 불편감을 느낀다. 당사자는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는데(‘포기’와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 것은 엄연히 다르다), 외부에서 자신의 행위를 ‘포기’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N포세대’론은 매우 편파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젠더와 계급의 측면에서 특히 그렇다. 즉 이 담론은 정확히 ‘중산층 남성 청년’을 모델로 설정한다. ‘N포세대’론이 말하는 ‘청년의 위기’란 “현대 사회의 표준화된 남성 생애”를 기준으로 할 때의 ‘위기’다. 취업으로 경제 기반을 마련한 뒤 결혼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생애 말이다. 남성 청년에게 ‘취업-결혼-출산’ 과업 달성이 어려워진 것이 최근의 일이라면, 여성 청년에게는 그런 생애주기 모델이 주어진 적조차 없다는 사실을 ‘N포세대’론은 외면한다.
흔히 동질적인 집단으로 간주되는 청년세대는 사실상 계급, 젠더, 학력 등에 따라 철저히 경계지워져 있다. 같은 학력이라도 남성이 여성보다 좋은 일자리를 얻고, 남성이 여성보다 임금을 많이 받는다. 이 정도는 시작에 불과하다. 성별, 계급, 장애 여부, 출신 지역 등에 따라 아예 취업 선호도가 결정되니 말이다. 여성 청년들은 처음부터 ‘여성이 취업하기 수월한 직종’을 공략하는 등 남성 청년들과는 전혀 다른 취업 전략을 세우는 경우가 많다.
달리 말해 ‘N포세대’론에서 포기된 것, 즉 회복해야 한다고 상정되는 것들은 지극히 남성적이고, 중산층적이며 보수적인 사회 규범이다. 따라서 ‘N포세대’론이 강조하는 ‘포기’는 도리어 청년들에게 특정한 행동 양식이나 생애주기적 의무들을 부과하고 그것들을 본질화하는 시도일 수 있다. 그런 규범을 거부하는 모든 움직임은 한낱 일탈적인 행위로 치부될 뿐이다. ‘N포세대’론이 멈춘 지점은 바로 여기다.
‘탈청년’ 문화정치: 세대 수행성을 말하다
그렇다면 대안적인 청년세대 담론은 어떻게 가능한가? 세대주의적이거나 연령주의적인 ‘청년’ 관념에 기대지 않지만 그렇다고 ‘청년’에 관해 말하는 모든 실천들을 부정하지는 않는 ‘탈-청년’ 전략을 그려볼 수 있을까? ‘청년’을 연령 집단으로 환원하는 청년 담론은 비판돼야 마땅하지만, 청년 당사자들이 이끄는 청년운동의 고유한 힘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
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새로운 청년 담론을 모색할 때, 크게 두 가지를 시도해볼 수 있다. 연령주의를 벗어나는 방식 혹은 연령을 본질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청년세대’ 개념을 다시 쓰는 작업, 그리고 운동의 차원에서 ‘청년세대’라는 기호를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첫 번째 작업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수행성 논의를 참고해 세대 개념을 수행적인 위치로 확장함으로써 가능하다. 버틀러는 젠더가 생물학적 성별에 의해 본질주의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들의 축적을 통해 “시간을 두고 서서히 구성되는 정체성”임을 지적한 바 있다. 젠더가 어떤 본질도 갖지 않듯, 세대 역시 “하나의 귀속 작업”일 뿐이며, 청년/청춘은 “단어에 불과”하다. 우리로 하여금 특정한 세대 정체성을 수행하도록 만드는 것은 말하자면 출생 시점이나 연령 등의 시간 질서를 통해 확립되는 세대 범주다.
따라서 세대를 수행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려면 세대를 구성하는 시간성을 전혀 다르게 맥락화해야 한다. 대부분의 세대론이 전제하는 인과의 순서 혹은 그것과 연동된 다양한 제도들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재학, 병역 등 연령 기준과 연관된 법과 제도는 물론이고, 1년 단위로 편성된 달력과 연령 체계, 늙음-젊음과 관련된 사회적 관념 등이 모두 시간성의 사회적 구조를 이룬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청년(성)’이라는 세대 규범은 상호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여러 실천들이 경합하는 장소로 이해돼야 한다. ‘청년’이라는 생아주기상의 과업에 적극적인 태도는 물론 그런 규범에 저항하는 태도 모두가 하나의 ‘청년성’인 것이다. 다른 한편 ‘청년 문제’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청년당사자운동이 ‘청년 문제/이슈’를 넘어 사회 전반의 불평등과 차별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
사실 주거, 노동, 빈곤 등의 사회문제를 별도의 ‘청년 문제/이슈’로 인식하는 접근법 자체가 매우 최근에 생겨난 지식이다. 실제 청년들의 관심사는 ‘청년 이슈’에 국한되지 않다. 청년들은 성평등, 장애인권, 주거, 부채, 환경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개선과 변혁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세대 내의 이질성과 격차, 불평등을 의식하며 ‘보편’에서 벗어난 개인들을 포괄하려는 실천이다. 세대 내 동질성을 전제해온 기존의 ‘청년’ 담론이 크게 실패한 부분이다. 만약 우리가 ‘청년’이나 ‘청년세대’라는 기표를 활용할 수 있다면, ‘청년’에 대한 본질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한에서만 그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