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1 4月-6月
제1장 아오마메 - 겉모습에 속지 않도록
제2장 덴고 - 조금 특별한 아이디어
제3장 아오마메 - 변경된 몇 가지 사실
제4장 덴고 - 당신이 그걸 원한다면
제5장 아오마메 - 전문적인 기능과 훈련이 필요한 직업
제6장 덴고 - 우리는 꽤 먼 곳까지 가게 될까
제7장 아오마메 - 나비를 깨우지 않도록 아주 조용히
제8장 덴고 - 모르는 곳에 가서 모르는 누군가를 만나다
제9장 아오마메 - 풍경이 변하고 룰이 바뀌었다
제10장 덴고 - 진짜 피가 흐르는 실제 혁명
제11장 아오마메 - 육체야말로 인간의 신전이다
제12장 덴고 - 당신의 왕국이 우리에게 임하옵시며
제13장 아오마메 - 천부적인 피해자
제14장 덴고 - 대부분의 독자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것
제15장 아오마메 - 기구에 닻을 매달듯 단단하게
제16장 덴고 - 마음에 든다니 정말 기뻐
제17장 아오마메 - 우리가 행복하든 불행하든
제18장 덴고 - 더이상 빅 브라더가 나설 자리는 없다
제19장 아오마메 - 비밀을 함께 나누는 여자들
제20장 덴고 - 가엾은 길랴크 인
제21장 아오마메 - 아무리 먼 곳으로 가려고 해도
제22장 덴고 - 시간이 일그러진 모양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
제23장 아오마메 - 이건 뭔가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제24장 덴고 - 여기가 아닌 세계라는 것의 의미는 어디 있을까
지금, 일본은 『상실의 시대』 이후, 또다시 ‘무라카미 현상’으로 온통 떠들썩하다.
해마다 노벨상 후보에 거론되며,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 그가 『해변의 카프카』 이후 7년 만에, 『어둠의 저편』 이후 5년 만에 출간한 신작 장편소설 『1Q84』는 출간되기 전 예약 판매 첫날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으며, 당일인 5월 29일 하루에만 68만 부가 팔려나가는 기염을 토했다. 또한 발매 10일 만에 100만 부가 팔려나갔으며, 발매 두 달이 채 안 된 7월 말까지 모두 223만 부 이상이 팔린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1Q84』를 펴낸 신초샤新潮社는 출간하자마자 책이 매진되어 품절사태가 빚어지자, “이는 이례적인 속도다. 전국적으로 품절상태라 6월 11일 이후에나 책을 시장에 내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신초샤는 초판으로 1권을 20만 부, 2권을 18만 부 인쇄했으나, 아마존 저팬에서 예약판매분이 모조리 팔려버리는 등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에 놀라, 출간하기도 전인 5월 22일에 각각 5만 부를 추가 인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행 후 보름 남짓은 대부분의 서점에서 ‘품절→재입고’ 안내가 번갈아 공지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서점에서 품귀현상을 빚으며 일본 독자들이 줄을 서서 구했던 『1Q84』 1,2권은 출간 3개월 만에 2009년 일본 전체 서적 판매 1위에 올랐고, 현재도 일본 대형서점 기노쿠니야의 문학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12주째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한 소설이 불러온 인기는 관련서적과 음반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일본 소니뮤직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소설 속 주인공인 아오마메가 택시 안에서 듣는 곡인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는 발매 후 9년 동안 2천 장이 팔렸는데, 『1Q84』가 출간된 뒤 일주일 만에 주문이 9천 장까지 쇄도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러시아 작가 체호프의 여행기 『사할린 섬』은 1950년대에 출간된 이후 절판되었다가, 갑자기 주문이 밀려드는 바람에 1950년대에 출간된 판본을 수정하지 않고 바로 중쇄를 찍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최근 일본 서점가에서는 ‘하루키 특집’을 게재한 『군상』과 『문학계』2009년 8월호가 문예지로서는 대단히 이례적으로 전권 매진되었고, ‘『1Q84』 읽기’ 및 하루키와 관련된 내용을 수록한 서적이 5종 이상 출간되었으며, 판매 호조에 힘입어 그 수는 더 늘어날 기세다.
하루키는 이 독특한 작품을 쓰면서,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구성을 염두에 두었다고 밝혔다. 음악의 구약성서라고도 불리는 이 곡은 12음계 모두를 균등하게 사용한 48곡을 1권과 2권에 절반씩 배치하고 있다. 모두 합쳐 48곡. 이는 1권 24장, 2권 24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과도 완벽히 일치한다. 지극히 정교하고 수학적인 사이클을 통해 아름다움을 창조한 바흐의 음악처럼 소설은 길고 긴 여운을 남긴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늘 그랬듯, 이번 작품에도 음악이 흐른다. 소설의 서두에 등장했으며, 원래 스포츠제전의 팡파르를 염두에 두고 작곡되었다는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는 스포츠클럽 강사인 아오마메의 테마곡이다. 1984년의 동경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마이클 잭슨의 <빌리진>과 아오마메에게 살인을 지시하는 우아한 노부인의 비통함을 상징하는 존 다울런드의 바로크 음악 <라크리메>, 그리고 가짜의 세계를 진짜로 만드는 사랑의 힘을 노래한 <이츠 온리 어 페이퍼 문>과 같은 음악들이 곳곳에 흘러넘친다. 또한 디킨스, 도스토옙스키, 제임스 프레이저, 피츠제럴드, 안톤 체호프의 작품 등, 작가는 다양한 문화적 코드를 통해 소설 여기저기에 섬세한 암시와 장치들을 숨겨두었다. 한 일본 아마존 독자는 “그의 다양한 문화적 코드가 나과 교집합을 이루는 것을 확인하고는 하루키가 나와 동시대에 살고 있음에 감사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1Q84』는 아오마메와 덴고의 아련한 첫사랑의 이야기인 동시에, ‘1Q84’를 헤쳐나가며 겪게 되는 환상소설이기도 하지만, 더불어 어제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을 구석구석 말하고 있는 작가의 진지한 목소리다. 그가 이루어낸 ‘종합소설’의 새로운 경지가 이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예루살렘상 수상 기념 연설문(전문)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소설가로서, 즉 거짓말을 꾸며내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물론 소설가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정치가도 거짓말을 합니다. 자동차 세일즈맨, 푸줏간 주인, 목수처럼 외교관이나 군 간부도 각자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나 소설가의 거짓말은 다른 사람들의 거짓말과는 다릅니다. 그는 거짓을 말한다고 해서 비도덕적이라고 비판받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거짓이 크면 클수록, 거짓말이 능숙하면 할수록, 독자들이나 비평가로부터 큰 찬사를 받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에 대한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거짓말을 잘하는 것, 즉 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면서 소설가는 진실을 들추어내고, 그곳에 새로운 빛을 비출 수 있게 됩니다. 대개의 경우, 진실의 본디 모습을 파악하여 그것을 그 모습 그대로 정확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진실이 숨어 있는 장소로부터 그것을 꾀어내어 이야기가 있는 곳으로 옮긴 다음,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치환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일을 해내려면, 진실이 우리들 사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는 좋은 거짓말을 꾸며 내는 데 필수적인 자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거짓말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가능한 한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날은 일 년에 불과 며칠뿐인데, 오늘이 바로 그날인 것 같습니다.
진실을 말씀드리죠. 일본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제게 예루살렘상 수상식에 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시상식에 참석한다면, 제 책에 대한 불매운동을 하겠다고 경고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가자 지구에서의 격렬한 전투 때문입니다. UN의 보고에 의하면, 봉쇄된 가자 시에서 1,000명 이상이 숨졌는데, 그들 대부분이 비무장 시민들, 즉 어린이와 노인이었다고 합니다.
수상 통지를 받은 후, 저는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습니다. 이런 시기에 예루살렘에 가서 문학상을 받는 것이 과연 정당한 행위일까, 수상식에 참석함으로써 갈등을 빚고 있는 양 진영 중 어느 한 편만 지지한다는 인상을 주는 게 아닐까, 압도적인 군사력을 행사한 국가의 정책을 인정하는 모양새가 되지 않을까. 저는 물론, 그런 인상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전쟁을 반대하고, 어떤 국가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물론, 저의 책이 불매운동을 당하는 것도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중히 생각한 결과, 결국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판단의 이유 중 하나는, 실로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가지 말라고 충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다른 많은 소설가들과 마찬가지로, 저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정반대로 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면 안 된다” “그런 일은 하지 마라”는 얘기를 들으면, 특히나 그에 대해 “경고”를 받으면, 그곳에 가고 싶어지고, 그 일을 해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소설가로서 저의 기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가들은 특별한 인종입니다. 우리 소설가들은 제 눈으로 본 것과 제 손으로 만져본 것 외에는 쉽게 믿지 않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저는 이곳에 오고야 말았습니다. 멀찍이 떨어져 있기보다는, 이곳에 오는 걸 선택했습니다. 외면하기보다는, 제 눈으로 직접 보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보다, 말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아주 개인적인 메시지를 이야기하는 걸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소설을 쓸 때 언제나 제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것입니다. 종이에 써서 벽에 붙여야겠다고는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제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런 것입니다.
“높고 단단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혀 깨지는 계란이 있다고 한다면, 나는 언제나 계란의 편에 서겠다.”
그렇습니다. 그 벽이 아무리 정당하고, 계란이 정당하지 않다고 해도, 저는 계란의 편에 설 것입니다. 누가 정당하고 정당하지 않은가는 다른 누군가가 대신 결정해줄 것입니다. 아마도 시간과 역사라는 것이. 하지만 만일 어떤 이유에서든, 벽 쪽에 서서 작품을 쓰는 소설가가 있다고 한다면, 그 작품에서 과연 어떤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이 은유가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경우에 대입해보자면, 무척이나 단순하고 명백할 겁니다. 예를 들어 폭탄, 전차, 로켓탄, 백린탄은 높은 벽입니다. 이들에 의해 짓밟히고 불태워지고 총격당하는 비무장 시민들은 계란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여기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주십시오. 우리들은 모두, 많든 적든 간에, 계란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각자, 부숴지기 쉬운 껍질 속에 개성적이고 둘도 없이 소중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높고 견고한 벽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 벽의 이름은 ‘시스템’입니다. ‘시스템’은 때로 우리를 지켜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가 증식하여 우리를 죽이고, 또한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냉혹하고도 효과적으로, 조직적으로 살해하게 만듭니다.
제 부친은 작년에 90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교사였고, 가끔은 승려이기도 했습니다. 교토의 대학원생이었을 때 징병된 그분은 중국의 전장에 보내졌습니다. 전쟁 후에 태어난 저는, 매일 아침 식사 전에 아버지가 길고도 깊은 내용을 담은 불경을 읊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느 날, 저는 아버지에게 왜 그러시는지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분은 적이든 아군이든 구별하지 않고, ‘모든’ 전사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불단 앞에 정좌하고 앉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는 아버지의 주변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저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그 기억들도 모두 가지고 가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주변에 잠재해 있던 죽음은 아직 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아버지에게 얻은 몇 안 되지만 아주 중요한 것 중 하나입니다.
오늘,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입니다. 국적과 인종과 종교를 넘어서서 우리는 하나의 인간이며, 개개의 존재입니다. ‘시스템’이라는 견고한 벽에 직면한 깨지기 쉬운 계란입니다. 아무리 봐도, 우리가 이길 가망은 없습니다. 벽은 높고 견고하며 차갑습니다. 만일 승리의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 자신이나 다른 이들의 독자성과 둘도 없는 소중함을, 더 나아가 서로의 영혼을 만남으로써 얻는 따뜻한 온기를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요.
이 점을 생각해주십시오. 우리들은 모두 실재하는, 살아 있는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스템’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시스템’이 우리를 먹이로 삼는 걸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시스템’이 자가 증식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시스템’이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작가와의 대화
작가생활 30년에 거쳐 발표한 장편 『1Q84』는 현실에서 조금 비껴난 듯한 세계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다. 어떻게 발상이 이루어졌고, 어떤 테마가 녹아 있는가.
조지 오웰의 미래소설 『1984』를 토대로, 가까운 과거를 소설로 쓰고 싶다고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또 한 가지는, 옴 진리교 사건이다. 나는 지하철 사린 가스중독사건의 피해자 60명 이상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언더그라운드』로 정리했고, 뒤이어 옴 진리교 신자 8명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약속된 장소에서』(국내 미출간)를 써냈다. 그후에도 동경지방재판소, 동경고등재판소에 방청하러 다녔다.
사건에 대한 분노는 식지 않았지만, 지하철 사린 사건에서 가장 많은 8명을 죽이고 도망쳤다가 잡힌 사형수 하야시 야쓰오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별것 아닌 이유로 옴 진리교에 들어가, 세뇌를 당하고 살인을 저질렀다. 일본의 형량, 유족의 분노와 슬픔을 고려하면 사형이 타당하리라는 생각도 들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이고, 판결을 들었을 때 마음이 무거웠다. 범죄형 인격도 아닌 극히 보통사람인 그가 이런저런 흐름에 뒤엉켜 무거운 죄를 저지르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언제 목숨을 잃을지 알 수 없는 사형수가 된 것이다. 달의 뒷면에 혼자 남겨진 듯한 그런 공포를 마치 내 이야기인 것처럼 상상하면서, 그 상황의 의미를 몇 년이나 계속 생각했다. 그것이 이 이야기의 출발점이 됐다.
완성된 작품을 통해 인간의 고상함과 무서움을 깊이 되새기게 되었다. 선악이란 무엇일까? 사람을 재판한다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 배심원제도가 시작되어 다들 모두가 이에 대해 생각하는 시기인데. (*일본에서는 얼마 전부터 일반인 배심원제가 시행되고 있다.)
옴 진리교 사건은 현대사회에서 ‘윤리’란 어떤 의미인가 하는 크나큰 화두를 우리에게 던져주었다. 옴 진리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두 가지 시점에서 현대의 상황을 재조명하는 일이었다. 이제, 절대적으로 옳은 의견이 무엇이며 행동은 무엇이라고 단면적으로 선언하는 것이 매우 곤란한 시기가 온 것이다.
죄를 지은 인간과 죄를 짓지 않은 인간을 구분하는 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매우 얇다. 가설 안에 현실이 있고, 현실 안에 가설이 있다. 체제 안에 반체제가 있고, 반체제 안에 체제가 있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시스템 전체를 소설로 쓰고 싶었다. 거의 모든 등장인물에 이름을 짓고, 한 사람씩 정성들여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그중에 누가 나 자신이라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인물들이 모두 상처를 안고 있지만 동시에 매력적이다. 달이 두 개 떠 있고, 초현실적인 ‘리틀 피플’이나 ´공기 번데기’가 돌연 나타나도, 영화나 게임의 CG영상에 익숙해진 젊은 세대는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 것 같다.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가 정말로 현실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의 심리에 나타나는 고전적 현상이 아닐까 한다. 9.11테러로 인해 쌍둥이 빌딩이 마치 조작한 영상 같은 모습으로 소멸했다. 그토록 어이없이 무너지는 영상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는 동안, 사소한 어떤 흐름 때문에, 자신이 그 건물이 원래 없는 기묘한 세계에 들어와 있는 거다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조지 부시가 재선에 실패하고, 이라크 전쟁도 일어나지 않은 그런 별도의 세계가 이곳이 아닌 어딘가에서 계속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일본인은 1995년에 연이어 발생한 한신대지진과 옴 진리교 사건으로 인해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라는 현실과의 괴리감을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먼저 경험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상실의 시대』를 제외한 내 소설들이, 소위 말하는 리얼리즘 소설은 아니지만, 새로운 리얼리즘으로서 세상에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든다. 9.11 이후로는 특히나.
그런 동시에 나는 발자크처럼 세속 그 자체를 그린 소설을 좋아해서, 한 시대의 세상 전체가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나름대로의 ´종합소설´을 쓰고 싶었다. 순문학이라는 장르를 넘어, 다양한 접근방식을 취하고, 많은 서랍을 확보하여, 지금 존재하는 시대의 공기 속에서 인간의 생명을 담아 넣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Q84』에는 학생운동에서 파생한 집단이 정치적 그룹과 자급자족적 코뮌으로 분열되고, 후자는 사이비종교 교단으로 변한다. 배경에는 현대사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이 떠오른다.
우리 시대가 1960년대 후반 이후,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생각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마르크시즘이라는 대항가치가 결국 생명력을 잃은 시점에서 우리 세대는 새로운 무언가를 일으켜야만 했다. 무엇이 마르크시즘을 대체할 좌표로서 유효한가. 이를 모색하는 중에 사이비종교나 뉴에이지적인 무언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리틀 피플’도 그러한 결과물들 중 하나다.
야마나시 숲속에서 후카에리가 본 ´리틀 피플´이란 무엇인가? 독자에게 건넨 최대의 수수께끼인 듯한데.
신화적인 아이콘(상징)으로 옛날부터 존재해왔으나, 언어화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존재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신화라는 건 역사, 또는 사람들의 집단적인 기억에 새겨져 있어서, 어떤 상황에서 갑자기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최근의 인플루엔자처럼 특수한 상황하에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저 우리 자신 안의 있는 무언가인지도 모른다.
이는 원리주의 문제와도 관계가 있다. 세계가 카오스화할 때, 단순한 원리주의는 확실히 힘을 얻는다. 이렇게 복잡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머리로 사물을 생각하는 것은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대개의 사람들은 예전부터 존재해온 언어를 빌려와서는 자신이 그걸 생각했다고 믿게 된다. 그렇게 단순화된 만큼, 원리주의에 엮이기 쉽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과자 같다. 바로 에너지화되지만 몸에 좋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이 시대는 스스로의 힘으로 정신을 고양시키는 일이 어려운 시대다.
시장주의, 세계화와 함께 정보화가 진행됐다.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부여된 정보에 조작될 수밖에 없다는 측면도 있다.
확실히 세계는 1984년과는 전혀 다르다. 그때는 워드프로세서는 있어도 컴퓨터는 없었기에, 모르는 것이 있으면 도서관에 찾아보러 갔었다. 휴대전화도 없어서 공중전화 앞에 줄을 서고, 33회전의 레코드가 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나 블로그로 의견을 밝히고, 익명의 악의가 금세 인터넷상에 모여든다. 지식이나 의견은 간단히 복사되어 여기저기 사용된다. 속도와 알기 쉬워야 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올해 2월, 예루살렘상을 수상했을 때, 인터넷상에서 반발이 일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대개 내가 상을 받을지 거부할지라는 흑백의 이원론일 뿐, 현지에 가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발을 들여놓고 논의한 것은 거의 없었다.
수상 연설 ‘벽과 계란’에서 ‘개인 영혼의 존엄을 드높여, 그곳에 빛을 비추기 위해’ 소설을 쓴다고 발언했다.
작가의 역할이란, 원리주의나 어떤 종류의 신화성에 대항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는 남는다. 좋은 이야기는 적당히 마음의 어느 공간 안에 정착하게 되면 남는다. 예를 들어 ‘벽과 알’처럼 말로 한 이야기는 아무리 감동적이라 해도, 언젠가 소비되어 힘을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글로 남은 이야기는 몽땅 마음에 남는다. 즉효성은 없지만, 시간을 견디고, 시간과 함께 성장할 수도 있다. 인터넷으로 인해 ‘의견’이 넘쳐나는 시대기 때문에 더욱더 ‘이야기’는 더욱 힘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테제나 메시지와 같은 것들이 표현하기 힘든 정신의 영역을 알기 쉽게 언어화해서 마음에 담는 것이라고 한다면, 소설가는 표현하기 힘든 것의 표면을 언어로 확실히 단단하게 잡아서 작품으로 만들고, 온전히 읽는 사람에게 건넨다. 그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책을 읽던 독자가 작품 안에서 소설가가 언어로 감싸고 있는 진실을 발견해준다면, 이처럼 기쁜 일은 없다. 중요한 것은 팔리는 부수가 아니다. 건네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스포츠클럽에 근무하는 독신여성 아오마메와 소설가 지망생인 입시학원 강사 덴고.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가 1.2권 각각 24장씩 교대로 진행된다. 또한, 이야기 전개는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처럼 지극히 독창적이다.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형식에 따라, 장조와 단조, 아오마메와 덴고의 이야기를 교대로 쓰자고 정했다. 그전에 우선 이름이 필요했는데, 언젠가 ‘아오마메라는 이름 괜찮네’라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술집 메뉴에 있었던 ‘푸른콩 두부’(아오마메는 한자로 ?豆로 ‘푸른 콩’이라는 뜻)에서 연상했다. 덴고라는 이름도 동시에 번쩍 떠올라서, ‘아, 이걸로 벌써 소설이 다 됐네’라고 생각했다. 2년간 써내려가면서도 완성에 대한 확신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10살에 만나 뿔뿔이 헤어진 30세의 남녀가 서로를 깊이 바라는 이야기로 만들자, 그런 단순한 이야기를 가능한 길게 복잡하게 써보자. 2006년 가을, 하와이에 머물면서 쓰기 시작했던 그 시점에 머릿속에 있었던 건 그것뿐이었다. 내 경우엔 줄거리를 먼저 생각하면 잘 써지지 않는다.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날 것 같다, 라는 작은 포인트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그다음은 흐름에 맡긴다. 줄거리가 정해진 이야기를 2년이나 쓰고 싶지는 않다.
장편소설로서는 처음으로 (전격) 3인칭을 사용했다. 하지만 ‘나’의 시점에 가까워서, 하루키 작품 특유의 친밀함은 유지된다. 등장인물들은 상처받기 쉽고, 아름답다. 30년간 계속 써온 이런 글을 통해 하루키의 소설은 청춘의 문학이라고 재인식하게 되었다.
작가는 보통 나이를 먹으면 동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쓴다. 독자도 작가와 함께 나이를 먹는다. 하지만 나는 현재를 살고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는 젊은 사람들에게 더 흥미가 있다. 지금의 20대와 교류하고 있지도 않고, 휴대전화소설이나 애니메이션은 거의 보지 않는다. 하지만, 생생한 이야기를 쓴다는 건 그런 것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30살 즈음에는 30살의 내 이야기밖에 쓸 수 없었지만, 『해변의 카프카』에서는 15살의 소년을, 『어둠의 저편』에서는 19살의 여자아이를 나 자신인 것처럼 쓸 수 있었다. 이번에는 10살인 아오마메의 기분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고 싶었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는, 여성이 느끼는 방식이나 생각하는 방식을 더욱 파고들어 써보고 싶었다.
오랜 기간 매일 글을 쓰다보면, 작중인물과 함께 살아가는 것처럼 되어서, ‘그렇구나.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몇 번이나 고쳐 써서 모양새를 조정해나간다. 묘사하는 말 하나, 한 행의 문장교체로 인해 인물이 형성되는 경우도 있다.
덴고를 매료하는 두 여자 후카에리와 아오마메는 성적(性的)으로 대담한 일면을 지니고 있다. 어린이 성폭력이나 가정폭력 이야기는 현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나 『1973년의 핀볼』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폭력과 성’은 작품을 쓸 때 중요한 문제가 되어왔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사람의 영혼 깊숙이 들어가는 것으로서, 일종의 ‘중요한 문’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처럼 사람 피부를 벗겨내거나 『해변의 카프카』에서처럼 고양이 목을 치거나 하는 잔혹한 묘사는 이번에는 없지만, 성적인 장면은 꽤 나온다.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야기를 위해서 필요하다.
2권은 ‘9월’로 마무리된다. 속편을 기대하는 목소리도 높은데.
글쎄. 이다음에 어떻게 될지는 천천히 생각해서 나아가고 싶다.
1000페이지나 되는 장편은 강인한 문체가 없이 성립할 수 없다. 당신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문장을 ‘치밀한 가설과 디테일의 주의 깊은 집적’이라 평했는데, 『1Q84』의 문장도 정말로 그렇다.
7년 전 『해변의 카프카』이후, 고전을 새롭게 번역하는 일을 차례차례 해왔다. 챈들러의 『기나긴 안녕』,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그리고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나 『위대한 개츠비』… 다들 너무나 뛰어난 문장이다. 그것을 어떻게 일본어로 옮길 것인가. 번역가로서의 책무를 짊어질 수 있다고 판단하고 달려들어, 어쨌든 뛰어넘었다. 그 대신, 동시대의 미국 소설부터 멀어진 셈이다. 밖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기보다는, 스스로 생각해서 나갈 수밖에 없다, 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상실의 시대』를 통해 리얼리즘 소설에 한번 도전했는데, 그걸로 맘이 편해졌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철저하게 다른 이의 이야기를 문장으로 만들어낸 것도 그렇고, 『시드니』에서 매일매일 올림픽을 보며 30~40장씩 글을 썼던 것도 좋은 수업이 됐다. 쓰고 싶은데 기술적으로 쓸 수 없는 것들은 꽤 적어졌다고 생각한다.
비주얼한 매체가 대세가 된 현재, 언어의 힘으로 새로운 표현을 개척하는 것은, 예전에 비해 더욱 어렵지 않은가?
한 편 한 편의 작품마다 나 나름대로 새로운 언어 시스템을 개발해왔다. 이번에 삼인칭으로 쓴 것도, 이 긴 소설에서 새로운 표현방식을 시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세계가 넓어졌다고 느껴졌다. 기뻤다.
언어라는 건, 누가 읽어도 논리적으로 소통 가능한 ‘객관적 언어’와, 언어로는 설명하기 힘든 ‘사적 언어’에 의해 성립된다고 비트겐슈타인은 정의했다. 사적 언어의 영역에 양 발을 두고, 그곳에서 메시지를 끄집어내, 이야기로 만들어가는 게 소설가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사적 언어를 객관적 언어와 잘 교류시키면, 소설 언어가 더욱 힘을 가지게 되고, 이야기는 입체적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프로야구의 교류전처럼. (웃음)
독자 입장에서도 언어능력을 함양하기 어려운 시대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프로그래머가 살게 된 부자유한 닫힌 세계가 현재 사회를 예측했다고 생각한다.
컴퓨터의 발전은 새로운 계급사회를 만들어내고 있다. 편리하지만, 그 배후에는 프로그래밍하는 다수의 지적 노동자를 필요로 한다. 그런 전문화가 이루어지면서 건전한 창조성이 우리에 갇히게 되어, 세계가 오웰이 그린 『1984』처럼 되어갈 우려가 있다.
인터넷이 발전하고, 공용어로서 영어 없이는 살아나갈 수 없게 됐지만, 한편으로 다양한 나라가 문화적인 특이성을 내보일 수 있는 시스템도 필요할 것이다. 어떤 시대라도, 전체의 5%에는 중심이 되는 지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에, 아무리 복사라든가 따다붙이기가 횡행해도, 예술적인 관심이나 오리지널한 스타일이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다.
(2009년 6월18-20일, 요미우리신문)
이 책에 쏟아진 찬사
* 지금까지의 일본문학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미 코너를 돌아버려 후속 주자들이 보이지 않게 되어버린 느낌이다.
압도적인, 월등한 스케일의 작품.
_가토 노리히로(문학평론가)
* 존재의 내부에 깃든 공백을 메우는 사랑!
일단 책을 손에 잡으면 읽기를 멈출 수가 없다.
‘하루키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매력적인 비유들이 넘쳐난다.
_오노 마사쓰구(소설가), 요미우리 신문
* 작가의 모든 것을 불어넣은 듯한 작품이다.
이제, 도스토옙스키가『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출간한 나이를 훌쩍 넘은 하루키는, 하나의 작품이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가 되는 소설을 추구하고 있다._
누마노 미쓰요시(도쿄대대학원 교수), 마이니치 신문
* 간절히 바라는 것, 그것이 ‘리얼’을 만들고, 인생을 만든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소설.
_가와이 쇼이치로(도쿄대대학원 교수, 산케이 뉴스)
* 혹시 3권으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독자들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결말을 이어 쓸 수 있는 작품!
계속 다시 씌어진다는 건, 바로 걸작이라는 것이 『1Q84』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_아사히 신문
* 현실의 이면으로 끌어들이는 마술!
서스펜스의 매력을 마음껏 활용하는 능력을, 무라카미 하루키는 또한번 보여주고 있다.
_주니치 신문
* 이 작품은 학생운동 이야기면서, 부자를 비롯한 가족의 이야기면서, 기묘한 SF적인 이야기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나 필사적으로 그리워하는 아오마메와 덴고의 ‘사랑’이야기다.
_홋카이도 신문
* 진정한 사랑을 갈구하는 두 남녀가 서로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복합적이고 초현실적인 작품. 살인과 역사, 종교와 폭력, 그리고 가족과 사랑의 이야기.
_가디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