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하면 사람 안에서
가능하면 사람 틈에서
사람 틈에서 사는 일이 자주 궁금해서, 바람이 멈추지 않아서 이병률 작가는 다시 여행가방을 꾸리고 펜을 꺼내들었다. 작가는 『끌림』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에 이어 세번째 여행산문집 『내 옆에 있는 사람(2015)』을 출간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여행 삼부작의 최종장으로, 지금껏 수많은 독자들의 애정을 받아왔다.
그리고 5년이 지나 개정증보판을 출간한다. 빛나는 이야기들을 새로이 더하며 좋은 곳에 가고 좋은 삶을 사는 일에 집중했다. 풍경을 사진에 담고 이야기를 언어로 기록하는 일은 뼛속 깊이 여행자로 태어난 작가가 지닌 사명이었다. 작가는 이 숙명 같은 일에 두 손을 들고, 오래된 필름들과 새로 찍은 필름들을 그러모아 사진관에 맡겼다. 새로운 별이 탄생하는 일에 눈시울을 붉히고 그 별의 이름을 짓는 일에 벅차오르기도 하며, 온몸이 반응할 만큼 좋은 사람과 그를 만난 사건을 떠올리며 다시금 그곳에 가고 싶어지기도 하는 마음들을 추가적으로 담았다.
표지의 오브제는 ‘연결 고리’이다. 어릴 적 색종이를 잘라 붙이며 동그란 고리를 이어 만들곤 했던 그것을 기억하는가. 이어붙이면 끝없이 엮이는 종이 타래처럼 새로 알게 될, 좋은 사람에게까지 이어지고 싶은 호기심 가득한 마음을 담아보았다. 그렇게 새로워진 모습으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다시 독자들에게 다가간다.
『끌림』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에 주로 전 세계 80여 개국을 종횡무진 다니며 이국적인 풍경을 담아냈다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은 그 국내편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렇게 다닌 곳이 서울 경기 충청 강원 경상 전라 제주, 그야말로 전국 8도를 넘나들고 있으며, 산이고 바다고, 섬이고 육지고 할 것 없다. 금발의 아리따운 연인이 키스하는 장면을 포착한 대신, 허름한 시장통에 삼삼오오 모여 국수를 먹거나 어느 작은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우연하고 아름다운 우리 인연들에 시선을 붙잡힌다. 고개만 돌리면 마주할 수 있는 주변의 풍경들, 그리고 평범하지만 그 안에 뭔가를 가득 담은 사람들의 표정들이 무심한 듯하면서도 다정하게 담겨 있다.
작가에게 ‘사람’은, 여행을 떠나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사랑해서 떠나고, 그리워서 떠난다. 물론 둘 다의 감정으로도 떠난다. 그리고 그 주범은 ‘옆’에 있는 사람이 된다. ‘여행산문집’이라고 하지만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사람과 인연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하다.
이 책은 작가가 보내는 하나의 신호다. 독자들이 책을 펼친 곳에서, 이 신호를 받고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바란다. 이 신호가 대지의 숲처럼, 하늘의 별자리처럼 펼쳐져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그 틈에서 우리는 각자의 여행가방을 다시 꾸릴 것이다.
우리는 여행의 점선들을 모아
하나의 인생을 완성해가는 중이다
사람 사이로 걸어들어가는 일이 여행이라 믿는 사람의 눈앞에는 실제로 많은 것들이 펼쳐진다. 작가는 자신이 마주한 장면의 긴 서사에 집중해본다. 많이 듣고, 끄덕이고, 인사와 안부를 나누다보니 자연히 내면에 쌓이는 것들이 많았겠다. 이 기행들은 굳이 여행이라 명명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삶의 확장이며 연장선이라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시(詩) 캠프를 떠나 계룡산 계곡에 앉아 함께 시를 낭송하던 시간, 제주도의 한 동물원에서 조용히 돌고래와 조우한 일, 어느 한적한 진안 버스터미널에서 마주친 남자와 여자 사이를 짐작하는 일, 오래전 잘 따르던 흑산도 소년을 무려 어른이 되어서 재회한 일, 공항에서 뒤바뀐 다른 사람의 여행가방을 들고 집으로 온 해프닝, 한때 문경 여행길에서 스치듯 인연이었던 어르신의 부고(訃告)를 듣고 그 집에서 머물게 된 하룻밤, 한겨울 태백에서 자동차 바퀴가 눈에 파묻혀 고생할 때 어디선가 나타나 도와주고 떠난 사내, 한글학교에서 만난 베트남 친구와 함께했던 단양으로의 여행 등등…….
이 책에 존재하는 각각의 산문은 아주 평범한 일상 같기도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인연이 만들어내는 굉장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그것은 스스로 칭하기를 ‘예술을 하고’ ‘영감을 부르는’ 사람 그러니까 시인(詩人)이기에 가능한 열린 마음으로부터 기인한다. 아름다운 감각과 세심하게 선택된 시적 언어들로 이루어진 문장들은 묘한 운율감을 만들어내고, 이야기는 절로 뒤가 궁금해진다.
여행에는 정해진 시작도 끝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을 펼치는 곳이 여행의 시작이고 책을 덮는 것이 여행을 마치는 순간일 것이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 여행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고, 그 여정들이 모여 하나의 멋진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