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을 밝히면 나에게 빛이 있다. 이 책은 청암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한 뒤 전국 제방 선원을 두루 다니면서 많은 시간을 참선 수행에 정진하신 벽암 스님 법어집이다. 총 38편의 법어가 4부로 나누어져 수록되어 있다. 공기 맑고 고요한 산중에서 참선만 하다 도심 속 포교원에서 10년 동안 강설해주신 벽암 스님의 법어 중 일부를 간추려 담은 것이다. 바쁜 일상에 쫓기는 현대인들을 위해 쉽게 불교의 교리를 강론하시며 갈 곳 잃은 현대인들에게 하나의 등불을 밝혀주는 책이기도 하다. [ 본문 톺아 보기 ] 전략 인간은 왜 고생을 해야 합니까? 그것은 무명(無明)이기 때문입니다. 무명은 어둠 속을 뜻하기에 우리는 한 치 앞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무명을 밝혀주는 것은 밝음입니다. 이것을 모른다면 우리는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알고 당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바보와 어리석은 것은 천지 차이지만 알고 당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월 초파일에 등불을 밝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명(無明)에서 밝은 빛을 찾아서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기 위한 것이며 그 상징으로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거리에 밝히는 등을 못 걸게 하는 것은 다 알고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하는 행동입니다. 무지로 인하여 자신이 고생하는 것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앎이 있으면 고생을 하지 않습니다. 그 앎을 주는 것은 성직자의 할 일이며 불교의 교리입니다. 불교의 근본은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을 보아야지 성직자가 하는 행위를 보고 흔들리거나 신념이 좌우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일부는 불교의 진리를 망각하고 명예나 권력을 갖고자 하는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에 와서 얻어갈 것만 얻어 가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최후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열반한 후에 너희들은 다른 스승을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러면 어디에 스승을 둘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라고 하셨습니다. 자등명이란 자신의 마음을 스승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그날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부처님 눈으로 보니 제자들의 마음이 이미 다 갖추어져 있기에 다른 사람을 스승으로 삼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신도 여러분들은 부처님 법에 의지하십시오. 무명에서 살고 있다면 밝히면 되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길이 무엇이냐 하면 밝음입니다. 아쉽게도 이 밝음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곧 고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민의 정을 갖고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 집 앞이라고 등을 못 달게 해서 쫓아가서 따질까 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화를 내면 상처를 입겠다는 생각에 그만두었습니다. 인등향촉등광명(引燈香燭得光明)은 등불을 밝히면 나에게 빛이 있다는 뜻입니다. 앞날이 환하다는 것은 보인다는 것입니다. 보인다는 것은 즉 빛이 있다는 것입니다. 빛이 없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항상 다니는 방도 빛이 없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빛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빛은 형상적인 빛이 아닙니다. 심안이 있는 마음에 빛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육안으로 비치는 빛이 아닌 심등(心燈) 즉 마음의 빛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앞날을 훤하게 비춰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등을 밝히고 촛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초는 자기 몸을 태워서 빛을 만듭니다. 여러분들은 초를 보면서 자비 사상을 느껴야 합니다. 언젠가 말했듯이 종교는 중생의 울부짖음을 듣고 커야 진정한 종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남의 스승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기도는 하지 않고 부처님께서 복을 주지 않는다고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진정한 기도는 나와의 약속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무상심심입니다. 내 자체가 부처이므로 가장 가까이 계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데서 찾으려 하지 말고 가까이에서 찾으십시오. 지나간 것을 반성하고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후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을 증명해 주시는 분이 부처님이십니다. 즉 나 자신을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어느 절에 가야 기도가 잘 된다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것은 기도에 대한 어느 정도의 동기는 제공할 수 있겠지만 어리석은 일입니다. 종종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대전의 어느 보살 이야기인데 시어머니 따라 절에 간혹 가거나 남이 가자고 하면 따라다닐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내장산에 놀러 갔다가 법당에 삼 배 하러 들어가서 절을 하려고 부처님을 바라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더라는 것입니다. 한참을 울고 나서 부처가 누군지 왜 울었는지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왠지 몸이 가볍고 환희감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놀러 갔다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경우처럼 동기가 부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부처님이라도 무언가 마음에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어느 절이 영험하고 기도가 잘 되고 하는 생각은 모두가 잘못된 생각입니다. 진짜는 내가 가지고 있는 부처를 보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은 무명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기 위한 상징으로 등과 촛불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의 근본은 무명에서 광명을 찾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불교의 근본을 이해하시면서 마음의 등불을 켜서 무명에서 광명을 찾아보십시오. --------------------------------------본문 159쪽 [등불을 밝히면 나에게 빛이 있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