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인권을 지켜내기 위한 저항의 역사다
이 책은 30여 년간 활동해온 인권운동가가 한국현대사의 역사적 현장들을 직접 찾아 인권의 시각으로 정리해낸 답사기이다. 제주 4·3, 광주 5·18, 세월호 참사의 절절한 현장부터 서대문형무소, 남산과 남영동 고문실 속 고초의 시간을 지나, 소록도와 마석 모란공원에 남겨진 치열한 삶의 흔적까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대한민국 인권의 실태를 기록했다.
인권의 현장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국가가 개인들에게 저지른 폭력과 범죄의 흔적이다. 가해자가 무소불위의 국가 권력이기에 폭력과 범죄는 대규모였고, 더 집요하고 잔인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들딸, 부모형제의 죽음을 끌어안고 울음을 삼켜야 했던 사람들이 힘겹게 목소리를 내고 몸부림을 쳐왔기 때문에 인권의 현실은 조금씩 개선되어왔다. 이 책에는 그런 과정과 결과를 인권의 렌즈로 보고 담았다.
저자인 인권운동가 박래군은 1988년 광주 학살의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분신하여 세상을 떠난 동생 박래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일을 하다가 인권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한국현대사에서 인권의 문제가 드러나는 순간에는 항상 그가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현장을 지키고 있다. 그러한 활동의 연장으로 이 책의 인세는 인권재단 사람의 기금으로 쓰인다.
인권의 현장들을 직접 둘러보는 장기 프로젝트로 기획된 이 책은 동학혁명 유적지, 남북 분단 현장, 민간인 학살 터, 종교 순교지 등을 둘러보고 2권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오롯이 인권의 시선으로 본 전국 9곳의 역사적 현장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대한민국 인권 실태 기록
이 책은 저자가 인권운동을 하면서 오랫동안 갖고 있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떠난 인권 현장 답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여행 정보가 가득한 다른 일반적인 여행기와는 달리 역사적인 사건이나 현장을 인권의 시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 데 중점을 두고 쓴 기록이다.
그 시작은 학살과 해원의 섬, 제주도다. 세계적으로 냉전 질서가 해체된 지 한참 지난 오늘까지도 걸핏하면 ‘빨갱이’니 ‘좌익’이니 ‘종북’이니 하는 이념의 틀 안에 갇혀 있는 답답한 인권의 현실은 제주 4·3에서 비롯되었고, 대한민국 인권의 역사도 그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제주 4·3 현장을 인권기행의 출발점으로 삼은 이유다.
전후세대의 안보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만든 전쟁기념관에서는 전쟁을 기록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쟁 영웅을 추앙하고 전쟁을 정당화하는 식으로 ‘기념’하는 전시가 인권의 측면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우리는 어떻게 전쟁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지적한다.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인 소록도는 주민들이 거주하는 내부 지역까지 들어가 직접 취재한 생생한 이야기를 담았다. 소록도에서는 한센인에 대한 격리와 감금, 강제노동, 폭력 등 지금도 섬에 남아 있는 흔적을 통해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장애인과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 차별을 발견한다.
광주 5·18 현장은 두 지역으로 나눠서 살펴본다. 먼저 광주천을 기준으로 북쪽 지역인, 전남도청과 금남로가 이어지는 구도심에는 항쟁의 흔적이 좀 더 선명하게 남았다. 이곳에서 국가폭력으로 인해 무고한 시민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했음에도 진실은 아직도 규명되지 않고 있다. 처벌받지 않는 권력에 주목하며 책임자 처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다음으로 찾은 광주천 남쪽 지역에서는 농성광장, 상무대 영창, 들불야학 터, 양동시장, 오월어머니집 등 노동자와 서민 들이 밀집한 지역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5·18항쟁을 기록한 역사에는 여성이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보여줬던 헌신은 항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밑바탕이 되었음에도 소극적으로 다뤄지거나 생략되었다. 이곳에서 그 흔적을 찾아봄으로써 이들이 항쟁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임을 확인한다.
남산 안기부 터와 남영동 대공분실은 독재국가가 고문이라는 공포를 활용해 폭력적으로 권력을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지금도 남아 있는 그 흔적을 찾아 상상만 해도 끔찍한 고문이 우리 일상의 공간과 그리 멀지 않음을, 그래서 다시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인권의 현장 을 보전하고 기억해야 함을 이야기한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는 일제강점기 감옥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집중되어 있는 현재의 전시를 둘러보면서, 이후 독재 정권을 지나기까지도 비참하고 열악했던 수감자의 처우는 생략한 채 일제에 대한 분노만 가득한 전시 방향의 문제점을 짚어본다. 아울러 오늘날까지도 논란으로 남아 있는 사형제도의 문제도 함께 생각해본다.
마석 모란공원에서는 저자가 의미를 담아 만들어본 노동의 길, 민주의 길, 인권의 길을 각각 따라가보면서 민주열사묘역에 잠든 이들의 죽음을 돌아본다. 또 저자의 제안을 따라 묘비의 앞면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옆면과 뒷면, 주위를 함께 살펴봄으로써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생을 좀 더 깊이 떠올리며 생생한 한국현대사를 공부해볼 수 있다.
세월호 참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저자가 4·16연대 공동대표로 활동하며 가까이에서 경험한 현장을 바탕으로 꼭 필요한 이야기를 담았다. 목포신항의 세월호 선체, 팽목항과 침몰 현장, 안산과 인천, 그리고 광장까지, 세월호 참사의 현장을 둘러본다. 각각의 장소마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르게 흐르는 시간들이 아직도 가슴 아프게 남았다. 저마자 제자리로 돌아가 일상을 살고 있지만, 6년 동안 광장에서 함께 했던 연대의 기억은 계속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있다.
본문 중에서
북촌마을에서는 ‘아이고 사건’이 있었다.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도 이런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제주 전역에서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학살을 대놓고 얘기하는 건 금기였다. 억울하게 죽고도 말하지 못하게 한 폭력이 엄연하던 시절이었다. 1952년 어느 날 군에 나갔던 청년이 전사해서 돌아오는 일이 있었다. 이 청년을 마을에서 장례를 치르다가 어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아이고, 아이고” 울었단다. 그동안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었던 온갖 설움이 그 청년의 장례에서 터져나왔다. 사람들이 모두 통곡했던 사건이었다. 그 일로 마을 신승빈 이장이며 사람들이 끌려가서 곤혹을 치르고 시말서를 쓰고야 풀려났다. 그런 시절을 살아온 것이었다. ― ‘제주 4·3 현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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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항쟁 이후에 여성들은 부상당한 남성들을 치료했다. 폭도로 몰릴까봐 병원에 가기도 두렵던 시절이었다. 정신이 나간 남편을 보살피느라 정작 자신의 트라우마는 꾹꾹 눌러두어야 했다. 다친 남자들 대신 생계도 책임져야 했고, 부모와 아이들도 부양해야 했다. 이 모든 걸 감당해야 했던 여성들에게 이후 광주는 그리고 세상은 제대로 평가라도 해준 것일까. 당시 여성들의 증언들을 듣다보면, 한국전쟁 때 여성들이 감당해야 했던 것과 같은 엄청난 삶의 무게를 그들은 견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광주 5·18 현장 (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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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고문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정치상황이 바뀌고 독재 권력이 들어서게 되면, 고문이 가장 유용한 반정부 활동가들의 신문 방법으로 채택될지 모른다. 언제나 경계해야 할 일이다. 유대인의 학살이나 한국전쟁 시기의 끔찍한 학살이 다시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고문이 횡행하는 그런 세상으로 후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과거 고문이 자행되었던 역사를 알아야 하고, 그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현장에 가서 듣고 보고 느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고통스럽더라도 그곳을 찾는다. ― ‘남산 안기부 터와 남영동 대공분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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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앞에 선다. 받침대 위에 22미터 높이, 150미터 길이의 거대한 여객선이 놓여 있다. 목포대교 방향이 선미다. 항만 끝에 세워진 배. 정면에 보이는 부분은 시뻘건 녹이 4분의 3 정도를 덮고 있다. 3년 동안 바다 밑에 가라앉아서 뻘에 묻혀 있던 탓이다. 배는 처참하다. 곳곳에 크고 작은 구멍들이 보인다. 인양 작업을 한다고 뚫고, 수색 작업을 한다고 잘라내서다. 선수 쪽으로 깊게 파인 자국은 인양할 때 걸었던 와이어가 선체를 파고든 흔적이다. 일행 중 한 명이 실제로 처음 본 배의 크기에, 참사의 규모에 압도된 눈치다. 수십 층짜리 건물 하나가 바다 아래 가라앉았다 건져져서 이렇게 쓰러져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내 눈에는 고철 덩어리 세월호가 깊은 상처를 입고 누워 있는 고래처럼 보였다.
선수 끝 위에 ‘SEWOL’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세상을 초월한다’는 의미로 배의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 그 앞에 서면 세월世越이 세월歲月 같다. 녹슨 쇳조각들이 후두둑 떨어지기도 하고 바람에 날리기도 한다. 배는 날이 갈수록 더 심하게 낡아가는 듯하다. ― ‘세월호 참사 현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