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다시 읽는 클래식
SF... F.. C.
arte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SF 페미니즘 클래식 시리즈의 첫선
17세기를 뒤흔든 문제적 지식인, 마거릿 캐번디시.
SF는 『불타는 세계』로부터 시작되었다.
국내 초역.
“『불타는 세계』는 젠더화된 담론의 경계를 넘고 장르의 경계를 허물며 17세기 자연철학에 대한 비판과 사상을 개진한 독특한 저작이다. ” _ 권진아
◎ 도서 소개
국내 초역! SF 문학의 시원을 보여주는『불타는 세계』
시대를 뛰어넘는 마거릿 캐번디시의 독창성을 만나다
오늘을 다시 읽는 클래식 SF... F.. C. 시리즈에서 마거릿 캐번디시의 『불타는 세계』를 국내 초역으로 선보인다. 글 쓰는 여성조차 드물던 17세기, 마거릿 캐번디시는 책을 펴내는 것도, 지적 토론에 참여하는 것도, 명예를 좇는 것도 오로지 ‘남자들의 일’이던 시대에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내고 적극적으로 문학적 명성을 추구한 인물이었다. 캐번디시는 시인이자 철학자였고, 희곡, 에세이, 소설, 자서전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발표했으며 남성의 전유물이라 여겨진 자연철학 분야에서 논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보다 150년도 더 전에 발표된 마거릿 캐번디시의 『불타는 세계』는 과학과 철학으로 다스려지는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를 그린 최초의 SF로 평가받기도 한다.
마거릿 캐번디시는 1623년 에식스의 부유한 왕당파 집안인 루커스 가문에서 8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정식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어릴 때부터 눈에 띄는 모든 책을 읽었고, 고등교육을 받은 형제 존에게서 역사와 철학을 배웠다. 1642년 영국혁명이 발발해 의회파 군이 공격에 나서자 루커스 가문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옥스퍼드로 달아나는 등 위기를 겪는다. 1643년 캐번디시는 앙리에타 마리 왕비의 수행인으로 지원해 합격하고, 이듬해 왕비가 의회파에 쫓겨 파리로 몸을 피할 때 함께 파리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서른 살 연상의 윌리엄 캐번디시 후작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두 사람은 서로를 지적, 인격적으로 존중하면서 평생 함께했다. 캐번디시 후작은 토머스 홉스, 르네 데카르트, 피에르 가상디 등 당대의 유명 지식인들로 이루어진 뉴캐슬 서클의 중심인물이었고, 마거릿 캐번디시도 이 서클을 통해 자연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마거릿 캐번디시는 1653년 『시와 공상』으로 저술 활동을 시작해, 『철학적 공상』 『철학과 물리학의 견해들』 『자연의 모습』 등을 펴내며 정력적으로 책을 출간했다. 1660년 왕정복고로 캐번디시가 런던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유명인사가 돼 있었다. 누구도 초대하지 않은 남자들의 지적 논쟁에 끼어드는 ‘뻔뻔함’에 더해, 거침없는 옷차림과 연극적이고 자기 과시적인 행동으로 사교계에서 캐번디시는 ‘미친 마거릿’으로 통하기도 했다. 이 책을 번역한 권진아는 캐번디시가 1666년에 『불타는 세계』와 함께 묶어서 펴낸 『실험철학에 관한 논평』 서문에서 “과거에는 뮤즈와 과학이 모두 여성으로 그려졌고 더 존경받았지만 지금은 모두 남성으로 바뀌어야 할 상황이 되었다고 개탄”했음을 지적하며 그가 “남성들의 거대한 자부심과 여성에 대한 경시를 비판”했다고 평가한다. 『불타는 세계』를 펴낸 이듬해 캐번디시는 영국의 자연과학 학회인 ‘왕립학회’에 직접 요청해, 1660년 학회 설립 이래 여성 최초로 모임에 참석하고 당대 중요한 실험인 공기펌프를 이용한 공기 무게 측정 실험 등을 참관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불타는 세계』와 『실험철학에 관한 논평』을 재판으로 다시 펴냄으로써 당대의 첨예한 논쟁에 대한 자신의 답변을 확실히 했다. 오늘날에는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철학자, 전복적이고 개성적인 작가, 선구적인 지식인이자 페미니스트로서 캐번디시가 한 지적 기여를 재평가하는 작업이 꾸준하게 진행 중이다.
『불타는 세계』는 로맨스이자 모험 이야기, 자전적인 성격마저 띠는 이야기로, “로맨스에서 여성 인물을 사용하는 관습을 차곡차곡 무너뜨”리는 독특한 소설이다. 납치된 여인은 구출되어 다른 세계의 왕을 만나서 행복하게 결혼을 하지만 그것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 이후 캐번디시는 난무하는 지적 대화와 ‘불타는 세계’라 불리는 유토피아적 세계에 대한 묘사, 황후의 모험담으로 독자를 끌어간다. 작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철학적, 과학적 대화에서 드러나듯 『불타는 세계』는 우주 만물에는 목적과 의식이 있으며 모든 작동하는 부분들은 더 큰 우주라는 기계 안에서 협력하고 있다고 믿었던 캐번디시의 자연철학 사상을 소설에 녹여낸 작품이기도 하다. 『불타는 세계』는 “젠더화된 담론의 경계를 넘고 장르의 경계를 허물며 17세기 자연철학에 대한 자신의 비판과 사상을 개진한 독특한 저작”으로서, 당대 지식의 지형을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작품이다.
과학과 철학으로 다스려지는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미지의 황후와 현명한 공작 부인이 펼치는 창조적 모험
나는 욕심은 없지만, 야심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그 어떤 여인보다도 크다.
그러니 내 비록 헨리 5세나 찰스 2세는 될 수 없겠지만, 마거릿 1세는 되고자 애쓰겠다.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처럼 세상을 정복할 힘도, 시간도, 기회도 없지만,
한 세상의 지배자로 살지 못하니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 냈다.
- ‘독자에게’, 『불타는 세계』 중
이국땅을 여행하던 한 상인이 짝사랑에 빠져 어느 귀족 여인을 납치한다. 하지만 상인 일행은 바닷길로 이동하던 중 폭풍우를 만나고, 순식간에 북극의 얼음 바다에 이르러 지구의 극지에 맞닿아 있는 다른 세계로 흘러 들어간다. 극심한 추위에 상인과 선원들은 모두 얼어 죽고 귀족 여인만이 살아남는데, 정처 없이 바다를 떠돌던 여인은 곰인간을 만나 그들의 안내로 불타는 세계라 불리는 왕국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여인은 곰인간, 벌레인간, 물고기인간, 새인간, 파리인간, 개미인간, 거위인간, 거미인간, 이인간, 여우인간, 원숭이인간 등 다양한 인간들이 사는 불타는 세계의 황후로 추대된다. 이윽고 황후는 각 인간에게 자기 종의 본성에 가장 잘 맞는 직업을 추구하도록 하고 전쟁, 종교, 성차별이 없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모든 종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 태양이 왜 타오르는지, 바람의 원인은 무엇인지, 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바닷물이 왜 짠지, 생명의 기본 재료는 무엇인지 등 여러 질문으로 그들을 심사하여 연구 성과를 치하하거나 학회를 정리한다. 이렇게 국가를 정비한 황후는 자신이 떠나온 고국의 소식이 궁금해 비물질적 영을 불러 소식을 듣는다. 영과 더불어 초자연적 존재와 현상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영이 존재를 감추자 황후는 자신이 잘못을 한 것이 아닐까 깊은 우울에 빠지는데….
오늘을 다시 읽는 클래식
SF... F.. C.
SF는 페미니즘의 고전이며, 페미니즘은 SF의 현재이다. SF... F.. C.가 다루는 작가들은 시대의 최전선에서 가장 창조적인 방법으로 한계에 맞섰다. 숙고하는 이성과 창조하는 상상으로 도래한 미래와 무지의 위험을 그리는 SF 페미니즘 클래식 시리즈.
SF... F.. C.에서는 19세기 영미 문학의 걸작이자 고딕소설의 정점인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과 여성 유토피아 소설의 시초가 된 샬럿 퍼킨스 길먼 『허랜드』를 비롯해, SF 문학의 시원을 보여 주는 마거릿 캐번디시의 『불타는 세계』가 국내 초역으로 소개된다. 이후 페미니즘 SF의 기념비적 작품인 조애나 러스 『여성 인간(The Female Man)』, 탁월한 언어학자이자 뛰어난 페미니즘 SF 작품들을 남긴 수젯 헤이든 엘긴의 대표작 『모어(Native Tongue)』가 각각 국내 초역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 책 속에서
그들이 여러 가지 렌즈를 사용하여 한 모든 광학적 관찰에 대해 다 이야기하면 지루하고 장황해서 가장 인내심 강한 독자조차 지치게 만들 테니 넘어가도록 하겠다. 다만 놀랍고 주목할 만한 점은 그들이 지닌 경험철학의 굉장한 기술과 성실성, 창의력에도 불구하고, 진공의 모든 차원을 탐지하거나 비물질과 비실재, 혼종, 즉 무엇인가와 무(無) 사이에 존재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렌즈는 절대 고안해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p.39
본래 무(無)인 것이 어떻게 자연에서 실재를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본질적 실체가 없다면 실재가 있을 수 없고 , 실재가 없다면 무(無)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살아가는 것과 다른 개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의 차이는 아주 미세한 것에 불과하고 무의미합니다. 자연에는 혼자서, 혹은 스스로 (그러니까 단독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연의모든 부분은 하나의 개체를 이루는데, 그 부분들 각각은 무한히 나눠지고 뒤섞이고 변할지 몰라도 일반적으로 볼 때 자연이 지속되는 한 부분은 부분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습니다. 아니, 하나의 원자가 죽어 사라지면 무한한 자연조차 이내 멸망할 거라고 단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는 색이 없는 개체는 없고 개체가 없는 색도 없다고 굳게 믿으셔도 됩니다. 색, 형상, 부분, 크기, 개체는 모두 서로 분리되거나 추출되지 않는 하나이니까요. -p.47
황후는 기술과 창의적 재간으로 불타는 세계를 자신의 종교로 개종시켰을 뿐만 아니라 강요나 유혈 사태 없이도 변함없이 믿음을 유지하게 했다. 황후는 믿음이 사람에게 강요하거나 윽박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부드러운 설득으로 마음에 스며들게 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모든 의무와 일에 있어서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격려했다. 공포는 사람을 복종하게 만들지만 오래가지 않으며, 사랑만큼 의무를 계속하게 만드는 확실한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p.63
하루는 공작 부인의 영혼이 황후와 함께 있는데 매우 슬프고 우울해 보였다. 이에 황후가 몹시 걱정하며 우울한 이유를 물었다. (진정한 친구 사이에는 어떤 비밀도 없어서 그들은 통합된 한 몸의 다른 부위들과 같았기 때문에) 공작 부인은 황후에게 말했다. 사실 제 우울은 극도의 야심 때문입니다. 황후가 그 최고의 야심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공작 부인은 자기 자 신도, 세상의 어떤 생물도 그 야심의 높이와 깊이, 넓이를 알 수 없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제 현재의 바람은 위대한 왕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녀가 말했다. -p.87
공작 부인이 영들에게 말했다. 어느 세상이 가장 정복하기 쉬울지 가르쳐만 주면 폐하께서 방법을 도와주실 테고 저는 운명과 운에 맡겨 보렵니다. 무명으로 나태하게 안전한 삶을 사느니 차라리 고귀한 업적을 성취하기 위해 모험하다 죽고 싶어요. 모험을 하다 죽으면 영광된 명성 속에 살게 되겠지만 안전하게 살면 망각 속에 묻힐 테니까요. -p.89
부인은 고대 철학자에게서는 더 이상 모델을 가져오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현대 철학자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이를 위해 부인은 데카르트의 의견에 따라 세상을 만들려고 애썼지만, 에테르 소구체들을 만들고 강력하고 활기찬 상상력으로 움직임을 부여하자 그것들이 어찌나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회전운동을 하는지 머리가 빙빙 돌아 거의 기절 상태에 이르렀다. 그 소구체들이 끊임없이 비틀거리며 움직이는 바람에 공작 부인의 생각이 술에 취하기라도 한 듯이 휘청거렸던 것이다. -p.93
황후에게는 이제 그 상상의 세계를 해체하거나 자신이 사는 불타는 세계를 조금 바꾸는 게 아니라면 다른 할 일이 없었지만, 불타는 세계가 너무나 질서 정연해서 개선할 점이 없는 관계로 그 일은 거의 할 수가 없었다. 그 세계는 어떤 비밀이나 기만적 정책 없이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또, 그곳에는 어떤 야심이나 파벌, 악의적 비난, 사회 불화, 내부 다툼, 종교 분열, 외세 침략 같은 것도 없었고, 모든 사람이 평화로운 사회, 화목한 평안, 종교적 화합 속에서 살았다. -pp.94-95
어느 날 영들이 황후가 떠나온 세상이 커다란 전쟁에 휘말렸으며 그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황후의 친구들과 친척들이 모두 살고 있는 고국인 왕국과 맞서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소식에 황후는 심히 괴로워했다. 황후의 괴로움이 어찌나 컸던지 황제가 눈물을 보고 황후가 슬퍼하는 것을 눈치채고 그 이유를 묻자, 황후는 자기가 떠나온 고국이 수많은 나라의 침략을 받고 파멸될 지경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영들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이 비보에, 특히 그로 인해 황후가 느끼는 괴로움에 몹시 공감한 황제는 최대한 황후를 달래려 애쓰면서 불타는 세계에서 해 줄 수 있는 모든 원조를 황후에게 해 주겠노라고 말했다. -p.113
이 시적 묘사를 통해 여러분은 내 야심이 황후가 되는 것뿐만 아니라 한 세계 전체의 창조자가 되는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 이 묘사의 첫 번째 부분에서 언급된 내가 만든 세상들, 즉 불타는 세계와 철학적 세계는 모두 물질의 가장 순수한, 다시 말해 합리적 부분들인 내 정신의 일부분으로 고안되고 이루어졌다. 그 창조는 두 이름난 제왕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의 정복보다 더 쉽고 갑자기 이루어졌다. 나는 그 두 사람처럼 엄청난 혼란을 일으키지도, 그렇게 많은 개인을 소멸시키지도, 다시 말해 죽이지도 않았다. 고작 작은 배에 탄 사람 몇 명만 죽였을 뿐이고, 그 사람들은 극심한 추위로, 게다가 정의의 신의 손에 죽었으며, 그건 젊고 아름다운 귀족 여인을 납치한 죄를 단죄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p.139 「독자에게 드리는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