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무심코 창을 내다보다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사월 첫날에 눈이라니,
다시 보니 흰 꽃잎이었다.
창 아래 벚꽃이 피어 있었던 걸 잊고 있었다.
그 나무도 처음 아파트에 입주할 때는
작고 가느다란 묘목이었을 것이다.
이십 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는 사이
볼품 있는 나무가 되었다.
가지를 활짝 편 모양새가
제 영역을 지키는 원주민처럼 당당하다.
나무가 해를 향해 넓게 가지를 뻗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몸짓이다.
사람이고 나무고
스스로 영역을 넓히며
제 자리를 굳건히 지켜야 살아남을 수 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을 맞고 서 있는 나무가 내 소설 속의 여자들 같다.
내 소설 속의 여자들은
이제 막 옮겨 심은 나무처럼
끊임없이 흔들리고 갈등한다.
그녀들이 불행한 것은
딛고 선 땅이 척박한 탓이었다고 변명해주고 싶다.
그녀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땅 냄새를 맡고
거친 바람을 이기고
땅 속 깊숙이 뿌리를 내릴 시간이.
그러고도 살아지지 않으면 좀 더 기다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당신의 아이들도
엄마가 봐주지 않는 순간을 그렇게 기다렸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뿌리가 뽑힐 듯 모질게 불던 바람을 견디면서도
그녀들은 쓰러지지 않는다.
그녀들을 지키는 것은 ‘엄마’라는 이름이다.
엄마여서 못 간 여자들의 얘기를 해보았다.
여자로 제법 많은 시간을 살았는데
아직도 나를 모르겠다.
내가 누구인지.
여자였나 하면 엄마였고
엄마였나, 하고 돌아보면
다만 인간이고 싶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여자들의 얘기를 쓰고 있으려니
내가 인간으로 살려고 몸부림치던 순간에
나를 지켜보던 가족들이
조금은 외로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수시로 후들거렸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