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문제아들, 여학생
지금은 ‘학생’이라는 단어가 특별한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가 아니지만, 몇 십 년 전만 해도 학생, 특히 ‘여학생’이라는 단어는 많은 것을 내포했다. 백여 년 전 ‘교육받는 여성’, 즉 ‘여학생’이 탄생한 이래, 여학생은 늘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는 ‘문제아’였다. ‘학생’ 중에서도 ‘여학생’은 근대문화의 향유자, 로맨스의 주인공, 패션 리더 등 많은 대중문화들의 아이콘으로 기능해왔다. 그들은 늘 사회의 문제아들이면서, 사회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존재였다.
저런 하이카라 여학생들을 어떤 남자가 데리고 사누
방학이 되어 고향에 내려간 여학생들은 주변 어른들에게 “저런 하이카라 여성을 어떤 남자가 데리고 사누”라는 흉을 들어야 했다. 1920년대 초 여학생은 전체 여성 인구 860만 가운데 5만이라는 통계도 있다. 약 2%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후 점차적으로 증가하여 1930년대에는 두 배 가량이 증가하였다. 당시 인력거를 끌어 딸을 학교에 보냈다는 류의 미담과 함께, 여자들을 학교에 보내자는 운동이 성행하기도 하였으나, 경제적인 측면이나, 사회적인 인식의 측면에서 여자들의 교육은 점점 어려워졌다. 경성정신여학교는 정신병학교, 동덕여학교는 똥통학교, 배화여학교는 배워학교, 이화여학교는 외화(外華=사치)학교라고 비아냥을 사기도 하는 등, 여성교육에 대한 시선은 나아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