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견디고 인간성을 지키는 일
불평등을 넘어 모두가 안전하고 자유로운 시대를 그리다
◎ 도서 소개
세계적 재난이 드러낸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
우리가 재건할 재난 이후의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2020년과 함께 시작된 코로나19는 순식간에 세계 경제와 사회를 지탱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멈춰 세웠고, 이에 현 체제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뿌리부터 흔들렸다. 이런 혼란 한가운데, 위기를 돌파할 긴급 처방이자 미래를 대비할 정치적 비전으로써 ‘기본소득’이 논의 테이블 위에 본격적으로 올랐다. 정치권뿐만 아니라 시민의 여론도 크게 변했다. 기본소득은 코로나19를 거치는 동안 70퍼센트에 육박하던 기존의 반대여론을 뒤집고 60퍼센트 가까운 찬성이란 여론의 지지를 얻었고, 이에 힘입어 기본소득에 가까운 형태의 ‘긴급재난지원금’이 일시적으로 시행되어 성공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에 기본소득은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저성장과 불평등을 타개할 정치적 가능성을 가진 정책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2022년 차기 대선을 판가름할 가장 뜨거운 정책 공약으로까지 떠올랐다. 과연 기본소득은 지금의 위기를 돌파할 강력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자본주의의 흐름 속에서 발달한 기존 사회정책과 기본소득의 본질적인 차이를 짚어보고, 현재의 논의 속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주요 쟁점들까지 한 권에 담은 책 『기본소득 시대』는 현재 기본소득 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관점으로 담론을 주도하고 있는 다섯 전문가의 시선을 통해 기본소득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또한 그 어느 때보다 힘겨운 팬데믹 시대를 통과하는 우리가 재난 이후의 사회를 이전보다 더욱 자유롭고 공정하고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는 현실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정책적 토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요컨대, 기본소득은 또 하나의 복지정책이 아니라,
코로나19와 기후 위기로 특징되는 오늘의 세계에 대한,
인간성의 한계와 가능성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으로 연결되는 단초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_홍세화(장발장은행장, 소박한자유인 대표)
아르테S는 하나의 주제Subject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Story로 구성된 시리즈입니다.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삶의 다양한 관심사들을 담아내며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갑니다.
“모두에게 실질적인 자유를!”
자본주의적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아이디어
기본소득이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코로나19 사태가 처음이 아니다. 가까운 역사를 짚어보자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전 세계적으로 진보와 보수 등 정치적·경제학적 입장을 불문하고 각자의 관점에서 기본소득을 시대에 맞게 재정의하고 제안했으며, 이후 실제 미국, 캐나다, 핀란드와 같은 국가에서 실험적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기본소득은 좌파 진영의 ‘꿈같은 이야기’ 혹은 ‘존재감 없는 비전’으로만 여겨졌으나, 4차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흐름이 달라졌다. 2016년 3월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인공지능 ‘알파고’와 세계적인 바둑기사 이세돌의 대국에서 이세돌이 패배한 사건은 인공지능에 의해 사회경제체제에서 소외될 인간의 미래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으로 ‘알파고 쇼크’라는 단어로 명명되기도 했다. 그 전후의 한국은 비정규직과 정규직, 세습되는 부와 가난 등 심화되는 불평등의 양극화라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여기에 ‘알파고 쇼크’는 거의 모든 직업이 기계로 치환될 수 있음을 암시하며 가속화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흐름 속에서는 누구도 영원히 안정된 삶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체감했고, 그렇게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은 한국에서도 점차 고조되기 시작했다.
기존의 사회정책이 그 대상을 ‘절박한 가난에 처한 이들’로 국한하고 그들의 ‘근로 의욕’을 줄이지 않는 선에서 선별적이고 제한된 지급을 지향한다면, 기본소득은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현금’을, ‘개인’에게, ‘무조건’ 지급하는 정책이다. 이런 정책적 아이디어를 뒷받침하는 전제는 바로 ‘공유재산’인데, 원래는 ‘신의 것’이었으나 개인이 울타리를 치는 바람에 공동체가 영위하지 못하고 특정 계층이 독식하게 된 ‘토지’는 물론, 인류가 발전시킨 금융, 지식재산, 전파, 데이터까지도 바로 이 공유재산의 시각에서 다시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즉 기본소득은 ‘공유재산’ 개념을 기반으로 ‘노력으로 얻은 개인의 재산’ 이전에 존재하는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공공의 재산’에 주목하게 한다. 그리고 기존 자본주의사회에서 상식처럼 통용되었던 ‘소유’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우리 모두가 안전한 생계를 보장받고, 이제 그 이상의 삶을 함께 상상할 수 있다는 새로운 가치를 그려내고 있다.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기본소득의 방향성
우리가 함께 새롭게 정의하는 ‘공정하고 자유로운 사회’
―기본소득은 같은 현안을 공유하면서도 각자의 관점에 따라 필요성에 대한 판단이 크게 달라지는 정책이다.
정치경제학자이자 전환사회연구소 공동대표인 홍기빈은 『기본소득 시대』를 통해 기존 자본주의사회에서 대규모로 등장한 비정규직 시대를 넘어, 4차 산업혁명과 함께 더욱 불안정한 일자리로 내몰린 ‘프레카리아트’의 출현을 짚으며 “완전고용의 노동시장과 안정된 자본?노동 관계를 전제로 마련된 사회복지 정책이 사실상 무의미”해졌기에 합당한 사회정책으로 기본소득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경제학자 김공회는 코로나19 사태에서의 긴급재난지원금이 보여준 효용성과 “인구 대다수의 삶의 안정성이 크게 흔들릴 때마다 기본소득 요구가 집중적으로 터져나왔다”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삶의 기반을 잃은 사람들이 사실상 ‘즉각적’인 반응으로 국가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재난 지원 방식의 현금이라는 점과 코로나19가 심화될 때 유엔개발계획(UNDP)이 복지 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저개발국들에게 한국식 긴급재난지원금을 권고한 것과 달리 발달한 복지국가에서는 보편적 현금 지원책을 쓰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더욱 강력하고 효율적인 복지국가의 구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기본소득은 ‘어떻게 시행할 것인가’에 따라서 극명하게 방향성이 달라지는 정책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재난 기본소득’을 최초로 제안한 정책 연구자 윤형중은 『기본소득 시대』에서 한국에서의 기본소득 논의가 주로 찬반 논쟁의 구도로만 진행되었음을 짚으며, “기본소득은 찬반 논쟁으로 충분히 논의되기 어려운 주제”라고 말한다. 기본소득을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지에 따라 사회가 나아갈 방향성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며, 지금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기본소득을 시행할지 말지에 대한 결정보다,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나갈지에 대한 솔직하고 구체적인 대화와 선택이라고 말한다. 이는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다. 미국 정치학자인 안병진은 1960년대 미국 뉴딜 시기에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던 ‘모든 시민의 품위 있는 삶의 권리’를 위한 기본소득 논의부터 2020년 4차 산업혁명 흐름 속에서 ‘양갱 신드롬’을 일으킨 앤드루 양의 기본소득 논의까지 훑으며, 실제 기본소득 논의가 등장한 시대와 아이디어를 제기한 인물의 정치적 소신이나 철학에 따라 사회정치적 방향성이 얼마나 첨예하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그동안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삶과 공동체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게 하는 토대이다.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운영위원인 백희원은 기본소득 정책의 수혜자가 될 평범한 시민의 눈높이에서 기본소득이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준다. 탈가정 청소년들이 참여한 기본소득 실험에서 불안을 딛고 일어나 자립심과 자존감을 회복하는 청소년의 사례와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기본소득 워크숍에서 안정성에 대한 욕망 너머에 있는 관계지향적인 내면을 스스로 발견한 한 시민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주며, 우리 모두의 삶을 변화시킬 단초로서의 기본소득을 하나의 ‘관점’으로 제안한다. 동시에 “여성이 가정에서 돌봄을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이 여전한 사회에서 기본소득은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 의욕을 꺾고 오히려 성별 분업을 강화할 것”이라는 의심을 타당하게 받아들이며, 기본소득이 선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선한 사회인지에 대한 규범적인 토론을 우선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본소득 시대』는 우리 사회가 지금 기본소득 논의에서 비중을 두고 있는 시행 여부의 결정보다 논의 과정에서 발견하게 될 다른 요소들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 기본소득의 가장 주요한 개념인 ‘공유재산’에 대한 사회적 합의뿐만 아니라, 기존 정책들의 효용성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토론을 거치는 동안 우리가 판단하게 될 사회적 현안들 그리고 우리 각자가 영위하고 싶은 삶을 구체적으로 그려보고 사회적 권리를 상상해보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지향하는 사회와 공동체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날의 기본소득 논의를 딛고 기본소득을 넘어선 더욱 값진 사회적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책 속으로
기본소득은 궁핍에 처한 이들을 사회가 돕는다는 도덕 경제(moral economy)의 원리를 배경으로 한 공공 부조(public aid)와 분명히 다르며, 수혜 당사자들이 자신들이 미래에 당하게 될 각종 리스크를 공유하기 위해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마련하는 사회보험(social insurance)과도 분명히 다른 것이다. 이는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 혹은 미래의 불안에 집단적으로 대처하는 것 등의 목적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모든 이들에게 실질적 자유를’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개념의 사회정책 범주이다.
_홍기빈 pp.22~23
20세기에 들어와 2차 산업혁명을 거치며 산업자본주의의 물질적 생산력이 가히 경악할 만한 지경에 도달하자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야말로 ‘한 줌도 안 되는’ 자본가들과 투자자들이 과연 이 어마어마한 부를 다 만들어낸 것인가? 그 부를 만들어내는 데에 집단적으로 달려들었던 대다수의 근로 민중들은 부를 전혀 향유하지 못하고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빈곤 상태에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_홍기빈 p.33
현재의 기술혁신은 2차 산업혁명 당시 만들어지고 정착한 자본?노동의 관계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새로운 일자리들을 양산하였다. 종신 고용은커녕 하루 단위로 고용계약이 갱신되고, 고용의 주체도 애매하며, 업무의 성격이나 일하는 사람의 지위도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상태인데다 심지어 피고용자로 제대로 파악조차 되지 못하는 이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오늘날의 지배적인 고용 형태로 부상하고 있는 프레카리아트에게는 예전과 같은 완전고용의 노동시장이나 안정된 자본?노동 관계를 전제로 마련된 사회복지 정책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_홍기빈 pp.37~38
코로나19 사태는 기본소득 주장에 절실한 필요성과 현실성을 갖게 했다.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의 창궐은 사회와 경제의 작동을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정도와 방향으로 교란 혹은 중지시켜버렸기에 그에 대한 대책 또한 기존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_홍기빈 p.39
보통의 경제 위기가 규모가 큰 금융기관이나 대기업의 도산에서 시작되는 것과는 달리, 코로나19발(發) 경제 위기는 우리 주변의 골목상권 침체로부터 시작되었다. 동네 카페에서부터 크고 작은 규모의 여행사나 식당 등에서 노동자들이 줄줄이 잘려나갔다. 도·소매업에서 교육 관련 분야에 이르기까지 고객 응대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특히 피해를 많이 봤다.
_김공회 pp.54~55
기본소득론의 주장대로 자본주의 발달 과정에서 삶의 기반이 파괴된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그것이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재구축된 것도 사실이다. 어떻게 되었는가? 자본주의 발전 초기에 기본소득론이 주로 문제 삼은 것은 자본주의 이전의 소농적 기반의 해체였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른 기반이 필요했다. 보편적 임노동 체제가 그것이다.
_김공회 p.73
국가는 ‘자본가들의 공동위원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다수 인민의 이해관계를 구현해야 하는 근대적인 공화국이기도 하다. 이렇게 상충하는 의의를 갖게 된 국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계급)투쟁의 장이며, 복지국가는 그러한 투쟁의 잠정적 결과물이다. 성숙한 자본주의하에서는, 경제와 사회의 안정적 재생산, 특히 임노동 관계의 안정적 재생산을 도모하는 것이 국가의 핵심적 기능이다. 여기엔 임노동 체제에 불완전하게 편입되었거나 편입되지 못한 이들을 적정 수준에서 ‘관리’하는 것도 포함된다.
_김공회 pp.75
임노동 체제란 그것을 구성하는 두 축인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간 관계의 제도화이기도 해서, 임노동 체제가 성숙했다는 것은 곧 양자 관계의 제도화 수준이 높음을 의미한다. 이런 제도를 갖춘 나라에 코로나19와 같은 위기가 닥친다면 어떨까? 무엇보다 그 충격의 상당 정도는 바로 그 제도에 의해 흡수될 것이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다수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해 그들이 필수적 소비에서 배제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_김공회 p.79
이번 코로나19 위기에 대응해 발달한 복지국가에서 우리와 같은 보편적 현금 지급 정책을 시행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는 것은 거기에선 그런 정책이 불필요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_김공회 p.79
최근 유엔개발계획(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 UNDP)은 복지 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는 저개발국들로 코로나19가 확산되어감에 따라 해당국들에게 한국의 긴급재난지원금과 같은보편적 현금 지급책의 시행을 권고하기도 했다(UNDP,2020). 그렇다면 긴급재난지원금은 본격적인 기본소득 사회로의 이행이 아니라 보다 강력하고 효율적이고 스마트한 복지국가 도입의 필요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_김공회 p.80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람들은 그들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Every nation gets the government it deserves)”는 명언이 있다. 여기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돼 있다고 본다. 하나는 사람들이 자신들 수준에 맞는 집권자들을 직접 선출했다는 의미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공론장에서 논의가 이뤄진 수준만큼 정부의 정책이 실행되고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후자의 측면에 국한하면 저 발언에 대한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 ‘정책 의제는 제대로 된 논의가 축적된 만큼 현실과 정합성을 가지고, 사회 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
_윤형중 pp.87~88
한국에서의 기본소득 논의는 주로 찬반 논쟁의 구도로 진행됐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찬반 논쟁으로 충분히 논의되기 어려운 주제다. 기본소득은 지지자들조차 서로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품고 있는 ‘동상이몽’의 의제이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뿐 아니라 진보주의자도 기본소득을 지지하거나 반대하고, 정부의 역할을 중시하는 이들뿐 아니라 민간의 자율이나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이들도 기본소득을 찬성하거나 비판한다. 기본소득이 이처럼 이념 지형을 교란하는 이유는 여러 가치관을 담을 수 있는 그릇과 같은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_윤형중 p.92
오래된 담론인 기본소득이 최근에 부상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데다 다른 어떤 수단으로도 불평등을 개선시킬 수 없었다는 점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인공지능 등 일자리를 사라지게 할 우려가 있는 기술의 발달이다.
_윤형중 p.107
결국 기본소득이 현실화되려면 오늘의 문제인 불평등을 다루는 데 효과적인 정책인지를 증명해야 한다. 이는 기본소득의 기능적인 특징과도 관련이 깊다. 기능에만 집중해서 본다면 기본소득은 세금과 재정으로 기존의 시장 소득을 조정하는 재분배의 수단일 뿐이다. 특히 기존의 복지 체계와는 다르게 미리 똑같은 금액을 모두에게 지급한 다음 시장소득을 과세해 재원을 확보하기 때문에 사후적 재분배라기보단 사전 분배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사전 분배든 사후 재분배든 기존 시장의 분배를 재조정하는 것이란 점에서는 동일하다.
_윤형중 p.109
많은 경우 정책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고, 기본소득이 만병통치약이 아닌 것처럼 다른 복지 정책도 모든 문제의 해법일 순 없다. 결국 사회와의 정합성이 높은 정책 대안을 만드는 방법은 각 정책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한 뒤에 여러 정책의 장점들을 조합하는 것이다.
_윤형중 p.114
한국 사회는 여러 면에서 복지 수요가 급증하고 있고, 구조적으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으며 사회의 지속 가능성이 훼손되고 있다. 하지만 사회 구조를 바꿀 선제적 대응은 커녕 이미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 대응하는 수준의 정책을 내지도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궁극적으로 세금의 규모를 늘리는 속도가 사회 변화에 비해 지체되고 있다. 이는 정치, 세금, 복지 등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때문이다. 하지만 기존 복지 정책과 비교해 기본소득에 대한 증세 여론은 사뭇 다르다. 기본소득은 증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주고, 기존에도 필요했던 세제 개혁의 동력을 제공하는 장점이 있다.
_윤형중 p.115
기본소득은 지금까지 제시된 대부분의 정책 모델에서 다수를 경제적 순 수혜자로 만든다. 누진적 세제 개혁이든, 정률 목적세 신설이든, 자산에 대한 조세 체계 도입이든 간에 받는 기본소득보다 내야 하는 세금이 더 많은 계층은 소수에 국한된다.
_윤형중 p.117
문제가 있는 제도를 없애는 방법은 그냥 “나쁘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제도가 폐지되어 발생하는 유익한 변화를 사람들이 체감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기본소득은 역진적 세제의 폐지를 유도하고, 결과적으로 증세를 촉진하는 유용한 수단이다.
_윤형중 p.120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의 대유행은 역설적으로 한국 사회에 누적되었던 문제들에 대응하는 정책들이 빠르게 제시되고, 활발히 논의되는 ‘정책의 창’을 열어젖혔다. 그 정책의 창에서 기본소득, 전 국민 고용보험, 안심소득 등 한 번도 공론장의 주역이 되어본 적이 없었던 전향적인 정책들이 주요 의제로 등장했다. 이 세 의제는 구체적 정책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방향과 목표만 먼저 제시됐다는 공통점도 있다.
_윤형중 pp.124~125
진보주의가 절정에 달한 뉴딜 시기에는 ‘모든 시민의 품위 있는 삶의 권리’를 헌법의 2차 권리장전으로 구현할 가치 어젠다로 검토되었다. 심지어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공화당 대통령은 1968년 대선에서 승리한 후 기본소득을 집권 후 가장 중요한 어젠다로 상정했다.
_안병진 pp.135~136
성공 직전까지 간 기본소득 아이디어는 도대체 왜 좌초되었는가? 그후 기본소득이 수십 년간 주류 정치의 테이블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럼 최근에 이 기본소득이 다시 주류 어젠다의 일부로 파고들어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아직 리버럴의 주류 세력들은 기본소득 아이디어에 대해 유보적인가? 과연 이 아이디어는 리버럴 주류들의 회의감을 뚫고 미래에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이 오늘날 한국의 부상하는 기본소득 논쟁에 던지는 함의는 무엇인가?
_안병진 p.136
1944년 1월 11일,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는 기념비적인 연설을 남겼다. 이 연설에서 그는 단지 일자리의 권리만이 아니라 오락의 여유 시간을 포함한 삶의 질을 위한 충분한 임금, 품위 있는 주거와 건강권, 교육권 등 폭넓은 시민권을 제시하였다. 이는 표현의 자유와 같은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헌법적 필수불가결한 권리로 담은 1차 권리장전에 이어 삶의 품위와 인간의 자유를 도모한 ‘2차 권리장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캐스 선스타인(Cass Sunstein) 교수는 미국인 다수가 망각한 이 연설의 의미를 되살릴 것을 주장한다. 대공황과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인간의 취약함과 존엄함에 대한 각성, 그리고 자유세계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필요성에서 뉴딜 초기의 진보적 아이디어가 진화한 것으로 선스타인 교수는 분석하고 있다.
_안병진 pp.139~140
뉴딜은 근대 진보주의 질서를 구축한 위대한 성취이지만 그 과정에서 국가는 인간의 존엄이란 측면에서 한계를 노정했다. 68혁명은 이러한 근대의 비인격적 지배에 대한 탈근대적 혁명으로, 개인의 존엄과 권리, 연대성을 꿈꾸었다. 이 혁명의 영향과 대다수 도시에서 발생하는 처절한 민생 시위 등으로 당시 초당적으로 제도권 정치권 담론에 큰 영향력을 가진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등 5인의 경제학자들이 1,200명의 동료들과 함께 기본소득에 대한 공개서한을 발표하여 담론의 장을 뒤흔들었다. 이들은 서한에서 “국가가 책임을 완수하려면 공식적으로 인정된 빈곤선 이상의 소득을 국민 누구나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_안병진 p.142
뉴딜 2차 권리장전에는 일자리 보장 등 경제적 권리를 포함해 자유로운 삶 전반에 대한 기회의 제공 등의 가치가 함께 녹아 있다. 진보의 주류는 고용 보장에 더 초점을 둔다. 즉 뉴딜 노선 중에서 일자리 보장과 국가의 경제적 책임, 그리고 품위 있는 임금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미래혁신에 대한 낙관주의 에토스가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비주류는 소득 보장에 더 초점을 둔다. 즉 소득 보장을 통해 일자리 선택을 포함한 더 자유로운 삶과 기회의 보장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최종 책임자인 국가는 자유의 잠재력 확장의 촉진자 역할을 수행할 것을 강조한다. 이들은 국가에 의한 고용 보장이 좋은 의도와 달리 질 낮은 일자리로 사실상 귀결됨을 우려한다.
_안병진 p.157
코로나19와 같은 재난은 극히 일부 부자들을 제외한 많은 이들이 사실상 얼마나 불안전하고 취약한 조건하에서 살아가는지를 절실히 깨닫게 했다. 그리고 자유란 그저 추상적인 정치 권리(political right)가 아니라 여행, 이동, 식료품, 보건 의료, 교육 등에 걸쳐 우리 일상 근저에 있는 필수불가결한 문제임을 체감하게 했다. 이는 마치 루스벨트 시대에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의 취약성을 더 절실히 자각해 보다 포괄적 자유와 권리에 대한 담론으로 정치적 논의가 발전한 것과도 흡사하다.
_안병진 p.162
미국의 잊힌 뉴딜 2차 권리장전과 닉슨의 실패, 그리고 오늘날 앤드루 양의 논쟁은 우리에게 결론을 내리게 하기보다는 답하기 어려운 더 많은 질문을 발생시킨다. 결국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열려 있는 자세의 실천적 행동과 정치 리더십, 그리고 계급투쟁의 역관계(力關係)에 따른 산물이다. 뉴딜 2차 권리장전에 담긴 자유로운 삶과 인간 존엄의 가치, 그리고 이를 위한 소득과 고용 보장의 아이디어는 오직 우리가 어느 수준에서 행동하는가에 따라 딱 그만큼 현실화될 것이다.
_안병진 pp.167~168
“모든 사회구성원 개개인에게 조건 없이 생계에 충분한 금액을 현금으로 지속적으로 보장한다.” 이 한 줄로 요약될 수 있듯 기본소득이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이 단순한 아이디어가 복잡한 틀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 삶의 모양을 맞춰 넣으라고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기본소득은 어떤 모양의 삶에든 기회와 시간, 안정감을 제공하면서 자율적으로 삶을 구상해낼 가상의 시공간을 만들어주었다.
_백희원 p.187
무조건적이고 충분하며 보편적인 기본소득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버티거나, 행동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예컨대 실업자에게는 일을 구하기 위한 학습의 기회가 될 수 있고, 반대로 노동자에게는 일을 쉬기 위한 기회가 될 수 있다. 가족 내 생계부양자에게 종속되어 있는 주부, 어린이, 노인 들에게도 직접 지급함으로써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리를 보장한다.
_백희원 pp.188~189
여성이 가정에서 돌봄을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이 여전한 사회에서 기본소득은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 의욕을 꺾고 오히려 성별 분업을 강화할 것이기에 반대한다는 주장도 있다. 타당한 의심이다.
즉, 기본소득은 차별을 해결할 수 없다. 다만 차별 없이 보장됨으로써 상대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구성원들에게 차별에 저항할 힘을 제공할 뿐이다. 기본소득이 차별과 배제의 기제를 내재한 남성 생계부양자 중심의 정상성(가부장제)을 강화할지 다양한 삶의 양식으로의 해방을 촉진할지는, 기본소득보다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다양한 삶의 형태를 용인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_백희원 pp.190~191
기본소득이 자원을 모두에게 고르게 흘려보내는 분배 정책이라면, 차별을 금지하고 필수적인 공공성을 강화하는 것은 기본소득이 선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하기 위한 경로를 설계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 선한 사회인지에 대한 규범적인 토론을 우선해야 한다.
_백희원 p.192
모두에게 보장되면서 지속적으로 예측 가능하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고용계약의 이해관계 바깥에 있는 시민의 사회적 자리를 만들어준다. 우리 모두에게 노동 이전의 삶, 소비 바깥의 삶의 시간을 보장한다. 이처럼 모두를 위한 기본소득은 각자에게 다른 방식으로 좋다. 물론 가능성의 언어가 갖는 정치적 힘은 약하다. 일시적 긴급재난지원금은 사용해봤지만 온전한 기본소득을 통해 자리, 시간, 권리가 주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예측 불허의 시대, 기본소득이라는 의제를 통한 동료 시민들 간의 약한 연결고리로 구축된 사회안전망이야말로, 그 어떤 명확한 솔루션보다 강력하고 회복력 있는 시스템일 것이리라고 확신한다.
_백희원 pp.198~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