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제네바에서 시계 수리공의 아들로 태어난 루소는 재판소 서기 밑에서 견습공으로 일한다. 당시 열네 살이었던 루소는 아버지의 재혼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는데 훗날 《에밀 Emile》이라는 교육론은 이 시기에 겪은 방황의 경험을 토대로 쓰였다.
루소는 음악 악보의 필경사(筆耕士) 일을 하면서부터 파리에 정착하고 디드로, 달랑베르, 콩디악 같은 당대의 계몽주의자들과 교류한다. 1750년 《학문예술론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을 출판하며 사상가로 인정받게 되었고 그 뒤 《인간 불평등 기원론 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negalite parmi les hommes》(1755), 《정치경제 De l’economie politique》(1755), 《언어 기원론 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사후 간행) 등을 쓰면서 디드로나 볼테르 등과 분명한 견해 차이를 보였다.
이후 서간체 연애소설 《신(新)엘로이즈 La nouvelle Heloise》(1761),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논한 《사회계약론》(1762), 소설 형식의 교육론 《에밀》(1762) 등의 대작을 차례로 출판했다. 루소는 파리에서 세탁부 테레즈 르 바쇠르와의 사이에 다섯 아이를 낳아 모두 고아원에 맡겨버렸다. 근대적 교육론인 《에밀》의 저자로서, 이런 모순된 행위를 한 것은 두고두고 루소에게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루소는 신앙 문제로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스위스 여러 주로 쫓겨다녔으며, 영국으로 피신했다 프랑스로 돌아와 1768년 쉰여섯 살 되던 해 테레즈와 결혼했다.
마지막 십 년 동안 그는 《고백록》,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Rousseau juge de Jean-Jacques》,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Les Reveries du promeneur solitaire》 등을 썼으며, 수많은 저작을 통해 스스로의 죄책감과 모순을 서슴없이 드러냈고, 말년에는 드디어 정신적인 평화를 얻었다.
그의 자유민권사상은 프랑스혁명 지도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일관된 주장은 인간의 본성을 자연 상태에서 파악하려는 ‘인간 회복’이었다. 또한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자아의 고백이나 아름다운 자연 묘사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1778년 세상을 떠났으며, 1794년 유해가 팡테옹으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