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어느 정신과 의사에 대한 이야기다. 신촌 로터리에서 동교동 사거리로 향하는 언덕배기에 자리한 동교신경정신과의원, 그곳에서 넉넉하게 웃으며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배기영의 삶을 정리한 것이다.
평생 간호사 한 명 딸린 자그마한 의원을 운영했던 의사를 책까지 써가며 기리는 게 의아할지 모르겠지만, ‘의사답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는 이 시대에, 그의 삶이 전해주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배기영은 정신장애인 뿐 아니라, 노숙자, 고문 피해자, 수배 중인 학생 운동가, 사측의 탄압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입은 노동자 등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의 이러한 실천은 사회적 재활을 강조한 정신보건법 제정, 고문 피해자의 첫 국가 상대 손해배상 청구 소송 승리, 직장 내 ‘왕따’로 인한 노동자의 피해 최초 인정, 정신 질환의 산업재해 최초 인정 등 적지 않은 역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 한국 사회에 대한 치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배기영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이와 같은 거창한 성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생 사회적 약자를 위해 살면서 그 흔한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던 ‘겸손함’이 배어있는 그 삶 자체에 있다. 그의 행적들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인간으로서 누구나 살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들이고, 의사로서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마주하게 되는 순간들이었다. 그는 그 상황과 순간들을 외면하지 않았고, 그저 자신에게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노력했으며, 그들을 위해 반 발짝 더 다가갔다.
평범한 일상 속에 닥치는 ‘굳이 내가 해야 하나?’ 싶은 일들 앞에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삶. 즉, 그가 범접할 수 없는 인물이어서 존경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의사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기에 존경스럽다.
세상엔 그런 배경들이 존재한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가 가진 아름다운 제 빛깔을 낼 수 있도록 따듯하면서도 그윽하게 존재하는 배경들. 사람들이 빛나는 별과 아름다운 꽃들만 바라볼 때에도 시기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있어준 배경들. 세상이 조금씩이나마 제 빛을 찾아가는 건 분명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배경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사람, 배기영. 세상의 배경들을 대표해 그에게 이 책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