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고어(古語)로 주권자를 무엇이라 칭하였는지, 혹은 육당(六堂) 최남선의 학설과 같이 ‘얼검’이었는가? 칭제건원(稱帝建元)은 형태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서로 따라다니는 것이며, 정작 사실에 나가보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제호를 칭하고 연호(年號)를 세우지 않는 수도 있다. 연호(年號)를 세우고 제호를 칭하지 않는 수도 있으니 진대(晋代)의 5호16국 중에 이러한 실례를 발견할 것이다.
함흥 황초령비(黄草嶺)와 양주 북한산 가파른 산에 있어 시야가 좋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 위치는 불분명하다. 이원군(利原郡)의 연역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권49), 이성현(利城縣)에 실린 연역조에 옛날에는 ‘시리(時利)’라고 하였다<‘조선 금석고(朝鮮 金石攷) <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 / 카스라기 스에지(葛城末治) 저 참조>
진한(秦漢)에서 제호나 연호가 생겨난 이래 반드시 중원(中原)의 정통천자(正統天子)는 건원칭제(建元稱帝)로 하였다. 위(魏)의 조비(曹丕)와 촉한(蜀漢)의 유비(劉備)와 오(吳)의 손권(孫權)이 거의 동시에 병립하여 건원칭제(建元稱帝)로 하였다. 춘추(春秋) 이전에는 왕호(王號)가 가장 존귀한 것으로 주왕(周王) 이외에 맨 먼저 왕호(王號)를 칭한 이가 형만(荊蠻)의 영토에 일어난 초(楚)이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