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천운영의 미친 모험은 '돈키호테'에서 시작되었다!
돈키호테는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돈키호테'에 나오는 400년 전 음식을 찾아서
- 도서 소개
> 음식으로 읽는 '돈키호테'
'돈키호테의 식탁'은 소설가 천운영이 돈키호테와 그가 먹었던 음식을 찾아 나선, 돈키호테의 편력만큼이나 흥미진진하고도 감미로운 모험의 에세이다. 2000년대 초반 한국 문단에 첫 소설집 '바늘'을 내놓은 이래 독자적인 소설 미학을 구축하는 여성 작가로 이름을 새긴 천운영. 이 소설가를 '돈키호테'의 무궁무진한 세계로 처음 이끈 것은,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의 이 대작이 근대소설의 모태이기 때문도 아니고, 2013년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천운영이 스페인에서 머무는 동안 이 책을 누군가 강력하게 권고했기 때문도 아니다. 스페인어에 까막눈이나 다름없던 당시, 혼자 들른 라만차 지역의 한 허름한 식당 메뉴판에 ‘돈키호테 어쩌고’라고 설명이 붙은 음식 때문이었다. ‘요깟 고깃점에 돈키호테를 팔아먹다니. 이게 진짜 '돈키호테'에 나오는 거야?’
이렇게 음식을 매개로 '돈키호테' 탐독의 길로 들어간 천운영은 이 작품 안에서 이국의 음식 세계와 더불어 '돈키호테'의 깊은 곳에 깔린 슬픔과 기쁨의 미로를 제대로 만난다. '돈키호테의 식탁'은, 꿈꾸는 자들을 위한 소설이자 음식 소설이기도 한 돈키호테의 편력기를 여성 이야기꾼으로서 동행한 산문집이다.
좀 미친 짓이었다. 돈키호테와 같았다. 스페인어 전공자도 아니고 요리사도 아닌 내가 돈키호테의 음식을 찾아 나선다는 것. 그건 어떤 외국인이 전주에서 콩나물국밥 한 그릇 먹고서는 그게 '홍길동전'에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전국팔도를 누비며 홍길동의 자취를 쫓아 조선 시대 음식을 찾아다니는 일과 비슷했다. 반벙어리 까막눈 주제에. 무려 400년 전 음식을 먹어 보겠다니. 그런데 그만둘 수가 없었다. '돈키호테'에 빠져들수록, 그 길을 따라다닐수록, 더 깊게 빠져들었다.
_「들어가는 말」 중
이야기꾼 천운영은 '돈키호테'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스페인과 한국을 넘나들며,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쓰던 17세기와 지금 21세기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펼쳐 간다. 때로는 판소리의 소리꾼처럼, 때로는 서커스나 무성영화에 생명을 불어넣는 변사처럼, 때로는 '돈키호테'의 텍스트에 심어진 시대성을 포착하는 해설자의 날카로움으로. 그리고 한국 여성으로서 자신의 몸이 기억하는, 즉 자신의 손과 혀와 가슴이 간직한 우리 음식의 이야기와 포개어 놓는다. 아울러 스페인 음식의 전통 레시피와 역사가 '돈키호테의 식탁'을 더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베이컨 조각을 넣고 만든 계란 요리에 왜 ‘고뇌와 탄식’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부활절이 지난 뒤에 어떤 달달한 과자를 만들어 먹는지, 진짜 만체고 치즈를 어떻게 알아보는지, 딱딱하게 말라비틀어진 빵을 맛있게 먹는 비법은 무엇인지 등이 스페인 서민들의 생생한 삶과 밀착된 이야기로 이 산문집에 소개된다.
'돈키호테의 식탁'은 온갖 경계를 넘나드는 다채롭고도 화려한 이야기를 한 권의 책 안에 총결집시켜 능란하게 엮어 내는 여성 이야기꾼이 전면에 드러난 산문집이다. 저자 자신이 어릴 적부터 한 구체적 경험, 서서히 사라져 가는 대가족 안에서의 음식 문화가 이 이야기꾼을 계속 말하게 하고,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에 등장하는 음식들로써 전하고자 했던 사연을 세심하게 이해하게 한다. 또한 늘 약자 편에 서는 돈키호테의 용기를, 그리고 그를 떠나지 않는 산초의 의리와 현명함을, 400년 전에 이 작품을 쓴 세르반테스의 천재성을 우러르는 목소리에는 관객을 향한 거스를 수 없는 호소력이 담겼다.
스페인의 ‘염장 대구’를 이야기하기 위해 먼저 우리 음식 ‘북어무곰’의 추억을 꺼내 드는 천운영의 스토리텔링은 '돈키호테'의 또 다른 결을 드러나게 하고, 이 대작의 정수로 들어가는 새로운 길을 보여 준다. 돈키호테가 결정적으로 지친 순간 염장 청어 대가리를 떠올렸다는 것에서 그녀는 개종한 유대인인 돈키호테의 조상의 신산한 역사를 가슴으로 동감한다. 그리고 이 염장 청어에서 바로 우리의 과메기를 떠올린다. “구룡포 과메기 짝짝 찢어 마늘, 파 넣고 미역에 싸서 초고추장 푹 찍어 한입 먹여 주고” “어여 빨리 회복해서 다시 모험을 떠나라고 하고 싶은” 마음으로 돈키호테와 산초의 여정을 응원한다.
> 나누는 밥상, 진짜 잔치의 힘
천운영과 돈키호테, 그리고 산초와 함께 스페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하몽과 파에야의 주방을 여행하다 보면 여럿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우리의 문화와 닮은 반가운 대목을 마주치게 된다. 노숙하며 밥을 직접 해 먹는 마부들이 ‘움푹한 바위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한 마부가 염장 대구와 마늘 몇 톨 넣고 절구질을 하는 동안 또 다른 마부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노래를 마친 누군가가 돌절구를 이어받아 찧기 시작하고, 또 누군가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윽고 대구 뼈가 씹히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워지면, 누군가 꺼낸 딱딱한 빵 조각을 쪼개서 찍어 먹기 시작하고.’
또 다른 장면에서는 50여 명의 요리사가 동원되어 장작을 산처럼 쌓아 놓고 불을 피워 고기를 굽고, 국을 끓이고, 기름 솥에서 튀겨진 과자는 삽을 이용해 꿀 냄비로 던지면서 성대한 잔치를 준비한다. “오늘은 누구든 배를 곯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는 날, 부자든 가난한 자든 배 터지게 먹는 날.” 진짜 잔치는 그런 것이다. “커다란 솥단지를 문 앞에 꺼내 놓는 것. 연기를 피워 올려 사람들을 모으는 것. 다 함께 만들어 누구라도 와서 나눠 먹는 것. 부자도 가난뱅이도 기독교인도 무슬림도 모두 한 솥의 국물을 나눠 먹는 것.”
다 함께 음식을 차리고 나누어 먹고 삶을 지탱할 힘을 얻는 진짜 잔치가 이 시대에 필요하다는 것을 '돈키호테의 식탁'은 환기시킨다. '돈키호테'와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삶에 대한 진정한 긍정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진정 살아 있다는 것은 무언가에 미쳐 있다는 것. 그러니 제발 다시 미쳐 주기를. 죽어도 죽지 않기를. 모험을 계속해 주기를.”
-본문 속에서
전체적으로 보면 아주 소박한 식탁. 한 솥 끓인 오야를 묵묵히 먹을 만큼 무난하기도 하지만, 양고기보다 쇠고기를 선호하거나 요리 방법에 변화를 줄 만큼 섬세한 면도 있고, 일요일만큼은 고급 요리에 돈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무모한 면도 있다. 이 소박한 식탁을 위해 재산의 4분의 3을 썼다 하니 엥겔지수가 높아도 꽤 높은 편.(19쪽)
객줏집이라도 만나면 들어가 숙식을 해결하겠지만 대부분 노숙하며 밥을 직접 해 먹어야만 했던 마부들. 그들은 말들에게 물을 먹일 수 있는 호수나 강가에 짐을 풀고, 염장 대구를 강물에 담가 불렸다. 염장 대구 중에서도 값어치가 떨어지는 지느러미나 꼬리 부스러기들을 골랐는데, 값이 저렴하기도 했지만 상대적으로 얇은 부위인지라 단시간에 소금기를 빼고 불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요리는 무엇보다 불이나 냄비가 없어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약간 오목한 바위와 돌멩이만 있으면 준비 끝. 불린 염장 대구를 바위에 올려놓고 찧기 시작한다.(39쪽)
이 목동들, 나름 본식과 후식을 구분할 줄 아는 미식가들임에 틀림없다. 견과류는 치즈와 함께 전식으로 주로 먹지만, 설탕이나 꿀을 입히면 후식으로 손색이 없다. 말하자면 꿀 땅콩. 사람들이 꿀 도토리와 치즈 안주에 술잔을 돌리고 있는 사이, 충분히 배가 부른 돈키호테는 도토리를 한 움큼 쥐고서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그렇게 소환된 황금시대의 추억. 돈키호테의 일장 연설이 또 시작된다.
황금시대란 무엇이냐. 네 것 내 것 구분 없이 모두가 공평하게 살던 시대.(54쪽)
둘시네아. 온 우주의 여왕이었다가 돼지 염장 기술자였다가 마늘 냄새 풍기는 사마귀 여자로 전락할 여자. 그러고 보면 둘시네아는 돈키호테의 여인이 아니었다. 돈키호테와 산초의 합작품. 돈키호테는 둘시네아라는 이름과 천상의 아름다움을 주었고, 산초는 지상의 아름다움과 지옥을 함께 선사했으니. 더없이 아름다우시다, 달콤 쌉쌀한 돼지 염장 기술자 아가씨.(71쪽)
돈키호테는 말한다. 용기란 비겁함과 무모함의 극단적인 악덕 사이에 놓여 있는 미덕이라고. 그 사이 어느 즈음을 선택할 수 없다면 무모함의 경지로 올라가는 편이 비겁함의 나락으로 내려가는 것보다 낫다고. 무모한 사람이 용기의 경지에 이를 수는 있지만, 비겁한 사람은 결코 용기의 경지에 가 닿을 수 없다고.(98~99쪽)
할머니에게서 내가 물려받은 것은 식성이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본인은 내게 물려준 것이 식성이 아니라 소설가의 자질이라고 믿었다. 네가 소설가가 된 건 모두 내 덕분이다. 자화자찬. 할머니의 노 텡고 아부엘라. 딱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추임새도 넣어 가며 노래도 불러 가며 눈물도 흘려 가며 어찌나 생생하게 이야기를 하는지. 했던 얘기라도 몇 번이고 또 새롭게 말할 수 있는 능력. 나는 죽었다 깨도 못 따라가는 자질이다. 그 자질을 반도 못 물려받았지만 그녀를 모델로 소설은 몇 편 썼다. 그녀에게 보여 주지는 못했다. 내 소설 속에 그녀는 ‘마귀 같은 식충이 노인네’였으니까.(110쪽)
산초와 세시알은 고향에서 가져온 와인을 다 비운다. 술 자루를 사이에 놓고 마주 누워, 씹다 만 음식을 입안에 그대로 머금은 채 잠 속으로 빠져들면서, 산초가 읊조린다. 사라고사에 도착할 때까지만, 그때까지만이라도 돈키호테를 모시고 가겠다고.
이것은 어쩐지 다짐인 것도 같고 고백인 것도 같다. 아니다, 이것은 다짐도 고백도 아닌, 어쩌면 사랑, 어쩌면 순정. 산초 몸에 흐르는 피에 와인 감정사만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둘시네아를 향한 돈키호테의 순정한 마음이 산초에게 옮겨 간 것인지도. 돈키호테와 한솥밥을 먹으며 함께 한뎃잠을 자고 함께 고통을 겪는 동안, 산초와 돈키호테가 같은 피를 나눠 갖게 되었는지도.
언젠가 산초가 말했듯이 “어디에서 태어났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풀을 뜯어 먹고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니까. 그것이 사람의 성질을 결정하는 것이니까. 아 순정한 산초. 사랑스러운 산초.(118쪽)
그 안에 무엇을 넣든, 대형 파에야 판을 밖에 내놓는다는 것은 잔치의 선포와도 같다. 아버지의 홍어 항아리처럼. 뚜껑이 열리고 홍어 냄새로 잔치가 시작되듯, 사람들은 파에야 연기를 보고 잔치가 시작되었음을 알아차린다.
성탄절 톨레도에서 다리를 쭉 펴고 누워도 될 만큼 커다란 미가스 파에야를 만난 적이 있다. 기름 연기가 솟아오르고 초리소와 돼지고기 냄새가 사방에 퍼지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자루째로 부어지는 빵 조각들, 양파도 한 자루, 초리소도 한 자루, 그걸 뒤섞기 위해 삽이 동원되고,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른 풍경이었다. 이날의 음식은 모두 공짜였다. 부자도 가난뱅이도 여행자도 동네 토박이도, 이편저편 가릴 것도 없이, 모두 함께 지켜보고 모두 함께 기다려서 먹는 솥단지의 음식. 그것이 진짜 축제의 음식.(135쪽)
가지 선생께서는 돈키호테에게 일어난 일을 진실하게 기록하는 한편, 그 일에 대한 자신의 감상도 빈틈에 적어 놓곤 했는데, 때론 한탄과 좌절을 때론 축복과 의욕에 불타는 문구들을 넘나든다. 특히 스물네 군데나 터져 너덜너덜한 돈키호테의 양말을 자세히 묘사할 때는, 양말 묘사만큼이나 그에 대한 감상과 심정 표현도 자세했다. 왜 하필 이토록 훌륭한 사람을 박살 내려고 하느냐! 신발이 더러워지고 형편없는 식사를 하고, 오, 가난이여! 가난이여! 그렇게 감정적인 한탄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자주 돈키호테를 응원하고 축복하고 찬미하는데, 그럴 때마다 “알라는 축복받을지어다!”라는 문구를 세 번 반복해 적어 놓곤 한다.(154쪽)
오 행운아 돈키호테여! 오 유명한 둘시네아여! 오 익살꾼 산초 판사여! 다 함께 저마다 즐거움과 다른 모두의 즐거움을 위해 오래오래 살아가시길! 여기까지는 작가 세르반테스의 문장. 그래서 나도 덩달아 외쳐 본다. 오 세르반테스여! 어쩜 이리 복잡한 서술 구조를 가진 소설을 400년 전에 쓰셨단 말입니까! 오래도록 칭송받으시기를! 오 세르반테스여!(156쪽)
“인생 별거 있소? 살거나 죽거나지. 그러니 있는 그대로, 우리 모두 함께 살아가면서 평화롭게 함께 먹도록 합시다. 하느님이 아침을 여실 때 모두를 위해 여시는 것 아니겠소?”
산초가 그토록 좋아하는 오야 포드리다처럼. 온갖 고기와 채소를 넣고 한데 끓인 바로 그 음식처럼. 모두 다 같이 모여 한 솥 가득 끓인 고깃국을 사이좋게 나눠 먹는 세상. 그렇게 매일 아침을 함께 열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세상이 어디 있겠는가. 산초는 갈수록 옳은 말만 하고, 갈수록 현명해진다.(184쪽)
무엇보다 그 만찬 자리를 빛낸 것은 포도주가 들어 있는 여섯 개의 가죽 부대.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들이붓는다. 안주는 칼끝으로 조금씩 찍어 먹으면서. 술부대 주둥이에 입을 대고 콸콸. 마치 하늘을 조준하는 것처럼 고개를 위로 젖히고 콸콸. 좌우로 머리를 흔들어 그 와인 참 맛있네 외치면서 콸콸. 술 부대에서 배 속으로 옮겨 담을 작정으로 콸콸. 산초도 그들이 하는 것처럼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콸콸. 몸을 좌우로 흔들어 가며 콸콸. 술 부대가 바싹 말라붙을 때까지 콸콸. 얼마나 흥겹고 자유로운 술자리인가. 저렴의 섬인지 빌어먹을 섬인지에서의 굴욕과 악몽은 술과 함께 사라지고.(2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