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 소개
정치권의 비주류에서 일약 스타 총리로
국민과 함께 울고 웃던 그 소중한 날들의 기억
이낙연 전 총리가 그의 기록을 깨기 전까지 김황식 전 총리는 민주화 이후 최장수 총리라는 타이틀을 오랫동안 유지했다. 정치권의 중량감 있는 인사들, 이른바 ‘핵인싸’만이 총리직에 오를 수 있었음에도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애초에 임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직책이다 보니 어떤 경우가 경질이고 자진사퇴이며 어떤 경우가 임기를 충분히 채운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많은 총리들은 무언가에 쫓겨 급하게 자신의 커리어를 마감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반면, 대법관과 감사원장이라는 무게감 있는 직책을 지낸 법조인이기는 하지만 김황식 전 총리는 정치권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의 총리 발탁은 당시로서는 파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파격’은 곧 ‘무리수’를 지칭하는 것이기도 했다. 국정 운영에 전혀 경험이 없는 인사를 총리에 임명하는 것에 대해 국민들과 언론은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렇게 시작된 총리직, 결과적으로 김 전 총리의 ‘총리 도전기’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다. 이 책은 김 전 총리가 880일 동안 총리를 지내는 동안의 언론 기사와 본인이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글을 중심으로 본인의 소회를 풀어놓은 것으로, 글을 읽다보면 그가 장수 총리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를 충분히 느끼게 된다. 각박하게 돌아가는 세상과 정치권에서 한 편의 우화를 보듯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어느 날 갑자기 총리가 되다
김황식 감사원장에게 어느 날 임태희 대통령 실장이 방문해 국무총리 직을 맡아달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뜻을 전달하고 저자는 몇 번의 고사 끝에 결국 총리직을 수락하게 된다. 이 배경에는 긴박했던 당시의 정치 상황이 자리 잡고 있다. 2010년 당시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된 김태호 전 경남 도지사가 인사청문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자진 사퇴하자 이명박 정부에서는 김황식 감사원장을 총리로 내정하며 국면을 전환시키고자 한다. 다시 지명한 총리 후보가 인사청문회에서 또다시 탈락하는 사태만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 이명박 정부의 최대 과제였을 터이므로 대법관과 감사원장을 지내며 두 차례의 인사청문회를 이미 통과한 저자만큼 매력적인 카드를 찾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바람대로 인사청문회와 인준 표결은 무난하게 통과했지만 정작 문제는 그 이후였다. 김황식 총리 임명 초기에는 ‘대타 총리’라는 인식이 강했고 대법관과 감사원장을 지냈음에도 정치적으로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 그 지도력에 의심을 품는 사람이 많았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은 채 ‘단타 카드’로 김 전 총리를 내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무도 김 전 총리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곧 바뀌기 시작한다.
“대정부 질문에서 스타가 탄생했다. 김황식 국무총리다.” 닷새간의 대정부 질문이 끝난 5일 한나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대타로 등장해 홈런을 쳤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김태호 전 총리 후보자의 낙마 이후 긴급 수혈됐던 김 총리가 부드러우면서도 핵심을 피하지 않는 카리스마 있는 답변으로 국회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치렀다는 점을 강조한 말이었다. (…) 상당수 의원들은 “인사청문회를 3차례나 거쳐서인지 내공이 다르다” “감사원장까지 지내 국정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다른 거 같다”며“장수 총리가 될 것 같다”고 했다.(p.37, 조선일보 2010. 11. 6일자 재인용)
김 전 총리는 그해 10월 국회에서 열린 대정부 질문에서 소신 있는 발언을 하며 일약 ‘스타 총리’로 부각된 이후 국민과 소통하며 소리 없이 민생을 챙기는 친근한 총리로 자리 잡았다. 그의 퇴임 후 언론에서는 이명박 정부 5년간 가장 잘한 인사로 김황식 국무총리 임명을 꼽기도 했을 정도다.
무 컬러가 내 컬러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총리가 두각을 나타내자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언론은 그에게 갖가지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이슬비 총리’와 ‘눈 덮인 휴화산’, ‘중도저파’가 바로 그것이다. 한 기자가 존재감이나 색깔이 없는 총리라는 지적이 있다고 하면서 어떤 총리로 남고 싶은지 묻자 김 전 총리는 이렇게 대답을 한다.
“존재감이나 색깔이 없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존재감이나 색깔이 없는 것이 나의 존재감이자 색깔입니다. 컬러를 찾으려면 정치적인 발언을 하고, 누구와 싸움도 하고, 국민에게 근사한 말을 하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슬비 같은 총리가 되겠습니다. 이슬비는 조용히 내리지만 땅속으로 스며들어 대지를 촉촉이 적시고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마침내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소나기는 시원스럽게 내리지만 때로는 모든 것을 쓸어내 버립니다. 나의 작은 노력들이 모여 국민의 이익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p.84~85)
이 발언이 계기가 되어 ‘이슬비 총리’라는 별명이 붙여졌고 ‘눈 덮인 휴화산’과 ‘내 마음속의 마그마’라는 호칭 역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생겨났다. 또 다른 기자가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같다며 자신을 칭하자 “내가 눈 덮인 산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마그마가 끓고 있는 휴화산과 같습니다. 내 마음속에는 마그마가 끓고 있습니다”라고 대응했고 이 역시 언론에서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 되었다. 또한 언론에서는 김 전 총리를 중도저파라 지칭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광주지방법원장으로 근무할 때인 2004년에 쓴 ‘중도저파’라는 글에서 연유한다.
그런 의미에서 승리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부단히 변화를 모색하되 극단에 치우쳐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성장과 분배가 조화를 이루며, 자본가와 노동자가 함께하며, 기존 가치의 존중과 새로운 가치에의 모색이 자연스레 교차하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입니다. (…) 그래서 저는 모든 면에서 극단을 싫어합니다. 스스로 중도이기를 원합니다. 중도라 하더라도 중도좌파, 중도우파 중 어느 쪽이냐고 동문 한다면 소외계층을 보듬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도저파라고 서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득한 이득에 연연한 우파 특히 극우는 추하고, 현실을 무시하고 꿈만 꾸는 좌파 특히 극좌도 철이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p.87)
언론이 주목한 이들 키워드는 김 전 총리의 업무 스타일과도 일치한다. 좌우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고 공정하게 업무를 처리하며, 보여주기 식 행사를 지양하고 조용히 자신의 할 일을 해나가는 김 전 총리의 스타일에 썩 어울리는 별명인 셈이다.
그가 ‘대타 총리’에서 ‘성공한 총리’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 그 중의 하나로 그에게 사심이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김 전 총리는 감사원장이나 국무총리직을 원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피하려고 노력하였다고 말한다. 총리직을 성실히 수행하고자 했을 뿐 별다른 욕심이나 의도를 갖고 일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총리직 수행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총리 직책을 탐하거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로 활용하지 않으니 자신을 부각시키기 위한 행동을 할 필요가 없었고 본연의 임무에 집중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이 말에는 김 전 총리의 겸손한 태도가 다소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직책을 자기 과시를 위한 수단으로 삼거나 허례허식을 일삼는 경우를 그동안 우리는 숱하게 보아왔다. 그저 평소 본인의 성품이 겉치레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올곧은 때문일 것이다.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사례가 하나 있다. 종합청사에서는 총리가 출퇴근을 할 때면 청사관리소장과 방호대장이 마중과 배웅을 하였는데 김 전 총리는 이런 관행을 없애 들쭉날쭉한 총리의 일정에 맞춰 대기해야 하는 그들의 고단함을 단숨에 해소해 주었다.
울보 김 총리
김 전 총리는 그동안 우리가 봐왔던 이른바 고위관료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총리에게 보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장관과 차관, 1급 상당의 실장으로 한정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관행 역시 없애고 사안의 필요성에 따라 누구라도 보고할 수 있게 하였다. 총리를 항상 따라다녀야 하는 경호원을 배려해 등산을 그만둔 사연이나 총리 공관 앞 길거리에서 경비를 서는 경찰관을 위해 투명한 초소를 짓게 한 사례 등도 김 전 총리의 스타일을 짐작하게 한다.
김 전 총리는 울보 총리로도 나름 유명세를 탔는데 그가 울먹이는 모습은 여러 차례 언론을 통해 보도가 되었다. ‘연평도 포격 도발 전사 장병?희생자 1주기 추모식’이 열리던 날 대전 국립현충원에는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펼쳐든 경호팀장에게 우산을 치우라고 말한 김 전 총리는 행사가 끝날 때까지 고스란히 비를 맞았으며 흐느꼈다.
엄숙한 행사의 주재자인 제가 우산을 챙겨 쓴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그대로 비를 맞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유족들의 아픔에 함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어진 전사자 묘역 참배도 비를 맞으며 진행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p.93)
이 외에도 파라과이 한국학교에서 학예회 영상을 보다가 눈물을 흘렸고 서울소년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소년원생들의 합창을 듣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순직한 소방대원의 빈소를 찾아 어린 아들을 위로하다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고 심지어 국회 인사청문회에서조차 파독 광부와 간호사에 대한 질문을 받고나서 “어떻게 그 사람들을 잊을 수 있겠”냐며 울먹였다.
단호할 때는 단호했지만 부드럽고 섬세했던 김황식 전 총리. “불통 이미지를 갖고 있는 MB 정부에 따뜻한 소통 이미지의 김 총리가 있다는 건 다행”이라는 당시 여권 관계자의 말처럼 그가 있었던 것은 우리에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총리라는 직책의 특성상 나라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지는 못하지만 한 사회에 온기를 더해줄 수는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김 전 총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어떤 총리가 좋은 총리일까,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로 갈리겠지만 그저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다.
◎ 책 속으로
당시 정치 상황에서 이른바 대타로 등장했음이 분명했고, 관행대로 으레 일 년 남짓 재직하다 교체되겠거니 생각했고 또 제가 기대했던 자리가 아닌지라 준비도 부족했습니다. 나중에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솔직히 B 학점과 C 학점 사이 정도로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기자에게 그 정도 학점으로는 취직하기 어렵다는 핀잔(?)을 듣기도 하였으나 우리 때는 취직에 지장 없었던 학점이라고 대꾸하며 웃었습니다.(p.14)
임태희 대통령실장은 2010년 9월 저를 찾아와 국무총리직을 맡아달라는 대통령의 뜻을 전했습니다. 저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맡을 수 없다고 사양하였습니다. 하나는, 대법관으로 재직하다 임기(6년)를 못 채우고 감사원장에 임명되었는데 또다시 임기(4년)를 못 채우고 국무총리로 옮겨 간다는 것은 가벼운 처신으로 보여 국민을 불편하게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금 상태에서도 병역 면제 사유인 부동시가 그대로 남아 있어 정당성을 입증할 수 있다 하더라도 대통령과 총리 모두가 병역을 면제받은 것은 국민 정서에 맞지 않으며 새삼스레 대통령에게 누를 끼치는 결과가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p.20)
작은 에피소드 하나입니다. 질의하는 의원들 중에는 예의를 갖추어 총리님?장관님 호칭하며 질의하는 의원이 있는가 하면, 총리?장관이라 호통치듯 호칭하며 질의하는 의원이 있습니다. 저는 전자에 대해서는 ‘의원님께서는’, 후자에 대해서는 ‘의원께서는’이라고 호칭하였습니다. 제 마음속에 정해둔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 의원이 이를 눈치챘는지 “‘님’ 자 붙이세요” 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순간, 웃음이 나왔습니다. ‘내 속마음을 아셨나? 그러면 이 의원께서도 총리님이라고 해야지’라고 생각하며. 이와 관련하여 상호 간에 더는 공방이 없이 그냥 웃고 지나갔습니다.(p.40)
“존재감이나 색깔이 없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존재감이나 색깔이 없는 것이 나의 존재감이자 색깔입니다. 컬러를 찾으려면 정치적인 발언을 하고, 누구와 싸움도 하고, 국민에게 근사한 말을 하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슬비 같은 총리가 되겠습니다. 이슬비는 조용히 내리지만 땅속으로 스며들어 대지를 촉촉이 적시고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마침내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소나기는 시원스럽게 내리지만 때로는 모든 것을 쓸어내 버립니다. 나의 작은 노력들이 모여 국민의 이익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p.84~85)
그런 의미에서 승리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부단히 변화를 모색하되 극단에 치우쳐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성장과 분배가 조화를 이루며, 자본가와 노동자가 함께하며, 기존 가치의 존중과 새로운 가치에의 모색이 자연스레 교차하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입니다. (…) 그래서 저는 모든 면에서 극단을 싫어합니다. 스스로 중도이기를 원합니다. 중도라 하더라도 중도좌파, 중도우파 중 어느 쪽이냐고 동문 한다면 소외계층을 보듬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도저파라고 서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득한 이득에 연연한 우파 특히 극우는 추하고, 현실을 무시하고 꿈만 꾸는 좌파 특히 극좌도 철이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p.87)
엄숙한 행사의 주재자인 제가 우산을 챙겨 쓴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그대로 비를 맞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유족들의 아픔에 함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어진 전사자 묘역 참배도 비를 맞으며 진행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p.93)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자 팬들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공보실에서 팬들과 오프라인에서 만날 것을 건의하여 팬 미팅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내실 있는 대화를 위하여 인원수를 30명 정도로 제한하고 중학교 학생부터 68세의 아동문학가까지 다양한 연령층과 직업군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장소는 광화문 근처 소박한 식당으로 정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질문을 받고 응답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질문은 다양했습니다. 어느 주부는 “많은 이슈와 분쟁 속에서 저 같으면 한 번쯤 욱했을 텐데”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거칠게 반격하고 싶은 때도 있지만 제가 욱하면 국민이 불안해진다고 답변하였습니다. 국회 대정부 질문 과정에서 총리와 의원 간에 볼썽사나운 장면을 국민이 목격하였고 그때 느꼈을 국민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저의 태도와 답변이 정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팬 미팅은 그 후 두 번을 더 하였습니다. 점심을 하고 함께 창덕궁을 산책하는 방식으로 하고 또 1, 2차에 참가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습니다. 1, 2차 미팅 때 틈나면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도 한 번쯤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p.174~175)
총리실이 12월 24일 세종시로 이사하였습니다. 아직도 청사는 물론 아파트나 편의 시설 등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어 황량하고 어수선하였습니다. 총리 공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달 기거할 곳이니 꼭 필요한 가방 두 개 분량의 물품만을 갖고 입주하였습니다. 후임 총리께서 새집으로 쓰시도록 나는 몸만 들어갔다가 나올 터이니 집에 못 하나 박지 말라고 지시하였습니다.(p.403~404)
제가 주재하는 마지막 국무회의의 처리 안건으로 총리 및 장관 등에 대한 훈장 수여 안건이 들어 있었습니다. 일정 기간 이상 공직에 근무하다 퇴직하는 공직자에게 훈?포장을 수여하는 것처럼 총리나 장관에게도 훈장을 수여하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보통 임기 말 국무회의에서 의결하면 다음 정부가 집행하는 것이 통례였고, 예외적으로 다음 정부가 초기에 의결하여 집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관행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에 대한 훈장 수여를 스스로 의결한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안건 처리를 보류하고 다음 정부의 처분에 맡기자고 제안하였습니다. 다른 국무위원들도 제 말에 동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음 정부는 이를 처리하지 않았습니다.(p.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