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간 현장을 누벼온 전문가
전통적인 북중관계의 허상을 파헤치다!
★북중관계에 대한 새로운 관전법!
★북중관계를 결정짓는 핵심요인은 이데올로기 아닌 전략적 이익!
◎ 도서 소개
북한과 중국은 영원한 혈맹?
북중관계, 그 갈등과 협력의 역사를 해석하는 새로운 관전법!
올해는 북한과 중국이 ‘조?중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한 지 꼭 60주년 되는 해이다. 그동안 북중관계에 대한 연구는 많았지만 대부분 미시적인 분석에 치우쳐 통시적인 맥락을 짚어내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미중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현 상황에서 한반도 안보지도의 미래 향배를 가늠하기 위해서라도 북중관계에 대한 냉철한 직시와 객관적인 접근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따라 북중관계의 전개와 정책 결정 과정을 ‘전략적 선택’의 관점에서 접근한 『갈등과 협력의 동반자: 북한과 중국의 전략적 공생』이 21세기북스에서 출간되었다. 공직 생활 33년간 중국 대륙과 홍콩, 대만의 재외공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며 동북아 안보문제뿐 아니라 특히 북중관계의 상호 불신과 갈등, 협력과 거부, 관여와 이탈이라는 특수한 관계를 가까이에서 통찰할 수 있었던 저자가 만년에 취득한 박사 논문을 기본으로 하여 현장 관찰에서 얻은 경험을 함께 반영한 결과물로 내놓은 책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부터 현재까지 중국과 북한 사이에서 전개되어온 정책 결정과 대응이 국제체제적으로 어떤 배경에서 비롯되고, 양자관계는 상호 어떤 긴장과 갈등 과정을 반복해왔는지를 전략적 선택과 공생관계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통시적인 북중관계의 역사를 담고 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저자가 직접 도식화한 도표만 해도 32개에 이른다. 국문, 영문, 중문, 일문으로 된 논문과 단행본, 언론자료 등 수백 편에 이르는 참고문헌은 이 책에 객관성과 정확성을 더해주고, 동시에 독창성으로 가기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다.
왜 다시 북중관계인가! 북핵 실험과 북미, 북중의 잇따른 정상회담 등 널뛰는 국제정세
북중관계에 대한 연구는 이미 수십 년에 걸쳐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그동안의 연구는 북중관계의 성격을 동맹이나 ‘전통적 우의’라는 틀 속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미시적인 분석에 치우쳐 협력과 갈등이라는 변화무쌍한 북중관계의 객관적 실체와 정치적 상관관계를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1950년 ‘항미원조’ 명분으로 연합전쟁을 치르며 혈맹관계를 맺은 북한과 중국은 지금도, 여전히, 혈맹관계인가. 북한은 2006년 10월 이래 여섯 차례 핵실험을 강행했다. ‘중국의 문 앞에서 사달을 일으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던 중국은 왜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서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혹은 발휘하지 않는가. 2018년부터 2019년까지 싱가포르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전후해 김정은 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은 다섯 차례 몰아치기 정상회담을 가졌다. 2017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의 특사에게 외교적 결례를 범하며 굴욕을 안기는 등 냉랭한 기류가 이어지던 양국이었다. 그렇다면 2018년 이후 북중관계는 정상화된 것인가. ‘전통적 우의관계’로 완전히 복원된 것인가. 양국이 내세우는 ‘전통적 우의관계’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 해답이 모두 이 책에 들어 있다. 어쩌면 독자의 입장에서 가장 궁금할 북핵문제에 대한 중국의 대응을 살짝 엿보자면, 중국은 북한문제와 북핵문제를 분리해 접근하는 투-트랙 전략으로 일관한다. 이는 ‘북한’이라는 전략 자산과 ‘북핵’이라는 전략적 부담 사이의 안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고육책이다. 중국에게 있어 북한과 관련한 문제의 본질은 미국의 영향권이 한반도 북부까지 확대되고, 북한이 지정학적으로 중국을 포위하는 전초기지가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 있다. 따라서 중국으로서는 북핵문제에 대해 강경한 반대 입장을 취해 북한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보다는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를 적절히 조절하여 북한 붕괴를 방지하는 것이 국익에 더 부합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북중관계의 전개와 정책 결정 과정을 ‘전략적 선택’의 관점에서 접근함으로써 양자 간 전략이익 공유의 구조를 규명하고, 나아가 북?중 갈등과 협력의 모순적인 상관관계를 ‘이익균형’의 틀 속에서 설명한다. 즉 북?중 양국 관계에는 ‘공생의 공간’과 회귀 구심력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북중관계를 지배하는 내재 규율과 그 본질적 특성
전략이익을 공유하는 공생의 공간 그리고 ‘전략적 공생’
이 책은 북중관계의 성격을 먼저 전체 역사적 맥락에서 찾아보고, 그 속성이 양국의 정책 변화에 반영되는 형태를 전략적 선택의 틀 속에서 재해석함으로써 북한과 중국의 상호관계를 지배하는 내재 규율과 그 본질적인 특성이 무엇인지를 규명한다. 서론에서는 이론적 근거와 개념적 정의, 연구설계의 분석틀을 소개하고, 1부와 2부는 각각 중국과 북한이 역사적 전개 속에서 상대국에 대해 실행에 옮겼던 주요 정책을 중심으로 상호 전략적 선택과 대응의 성격을 주요 시기별로 분류하여 고찰하고 있다. 이 같은 동태적 접근을 통해 북중관계의 특징과 기본 영향요인을 선별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인물, 국가, 국제체제라는 세 가지 분석 수준을 이용하는데, 국제체제 요인은 지정학, 냉전 질서와 세계화, 동북아의 특수한 외교환경 등을 포괄하고, 국내 정치적 요인은 국가이익과 정체성, 국가이념과 대외전략, 외교정책 결정 등의 요소를 포함하며, 정책결정권자 개인적 요인은 최고권력자의 행동을 중심으로 개인적 선호, 인식, 경험, 상대국 지도자와의 친분 등을 주목한다.
3부는 1부와 2부에서 검토한 중국과 북한의 상호 전략적 선택의 행동을 바탕으로 그 선택에 영향을 미친 핵심요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정리하고 있다. 전략적 이익균형의 관점에서 북중관계를 결정하는 핵심요인 간 상관성을 분석하고, 실제 양국 간 상호 정책적 대응과 이익 배분 과정에 나타나는 동태적 함의를 해석하려는 것이다. 이어서 4부에서는 특정 국가 간 관계 설정이 기본적으로 게임의 법칙에 의해 작동된다는 관점에서 ‘전략적 선택’의 구조화 작업을 하고 있다. 그 선택과 대응의 상호 구조에는 전략이익을 공유하는 공생의 공간이 있으며, 공생의 공간을 지배하는 논리가 바로 ‘전략적 공생’이라는 결론을 추출한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대북한 역할은 군사개입, 동맹 파트너, 방관자, 조정자, 균형자, 전략적 후견국 등의 형태로 변화를 겪었고, 북한의 대중국 역할은 동맹, 자주, 이탈, 편승, 거부, 전략적 접근의 형태로 반전을 거듭해왔지만, 결국 양국 간 상호 정책 결정의 바탕에는 각 시대별 국가이익의 총합에 기초한 전략적 선택의 원칙이 일관되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북중관계의 미래 전망은?
저자는 북한과 중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표면적인 현상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 한 두 나라 사이의 ‘밀당’ 역시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종합적으로 볼 때, 그동안 북중관계의 수많은 우여곡절과 불신의 역사를 감안하면, 양국 관계가 장기간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일이다. 북중관계는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 않는 것처럼, 반대로 ‘나쁜 시절’도 오래가지 않는다. 중국과 북한은 전략이익을 공유하는 ‘공생의 공간’에서 선택적 관여와 선택적 편승을 교환하는 전략게임을 반복하며 유연한 ‘공생관계symbiotic relationship’를 지속 유지해 나갈 것이다.”(491쪽)
◎ 책 속으로
* 마오쩌둥이 김일성과 직접 대면한 것은 1950년 5월 13일 김일성이 무력 남침계획에 대한 마오쩌둥의 동의를 얻기 위해 중국을 비밀 방문했을 때가 처음이다. 첫 공식회담에서 마오쩌둥이 김일성으로부터 받은 인상은 두 가지 점에서 심기가 불편했다. 첫째는 김일성이 스탈린을 추종하면서 마오쩌둥의 독자적인 권위를 별로 존중하지 않는 언행을 보인 점이다. 김일성은 이미 4월 10일 스탈린과의 모스크바 회담에서 허락을 받은 무력 남침계획을 전달하면서 마오쩌둥에게 동의를 얻고자 했다. 이를 사전에 알지 못하고 있던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전달한 스탈린의 의견을 반신반의했다. 저우언라이 총리 겸 외교부장을 한밤중에 소련 대사관에 직접 보내서 스탈린에게 친전 전문으로 문의 확인한 이후에야 비로소 김일성의 전언을 받아들였다. 마오쩌둥은 자신을 빼고 스탈린과 김일성이 군사행동을 결정한 데 대해 불만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모스크바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김일성이 이에 아랑곳 않고 회담이 끝나자 모든 의제에 관해 완전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소련 대사에게 선언을 하면서 득의양양得意揚揚해하는 태도가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당시 곤혹스런 입장의 마오쩌둥으로서는 김일성에 대한 첫인상이 좋았을 리 없다.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첫 공식회동은 이렇게 마음속에 응어리를 남기고 어색한 분위기에서 끝났다. 마오쩌둥과 불편하게 헤어진 김일성은 귀국 이후 마오쩌둥에게 전쟁 준비나 개전과 관련한 어떠한 정보도 더 이상 알리지 않았다. 소련의 무기 운반도 중국의 ‘창춘長春철도’를 이용하지 않고 해상으로 선박을 이용하여 북한에 들여왔다. 그리고 김일성은 전쟁 발발 후 사흘째 되는 날 비로소 무관 한 명을 보내 전황을 중국 측에 통보하였다. 이에 대해 마오쩌둥은 자신의 통역인 스저師哲에게 “그들은 우리의 이웃인데도 전쟁 발발 문제를 우리와 논의도 없이 겨우 이제야 통보를 해왔다”고 노기를 보였다. 훗날 두 사람의 관계는 물론 북중관계가 내막적으로 원만하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에서부터 이미 잉태되고 있었다. (74~75쪽)
* 2002년 북한의 신의주특구 설치 좌절에 대한 일화는 북중관계의 허虛와 실實, 그리고 양국 간 민감한 이익 충돌과 불신관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주룽지朱鎔基 총리는 2001년 1월 상하이上海를 방문한 김정일로부터 신의주특별행정구 구상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러한 구상이라면 신의주보다 개성이 더 나을 것”이라고 조언을 했다. 인접한 단둥, 다롄과 경쟁관계가 되는 신의주보다는 한국에 가까운 황해도 지역에 개방특구를 설치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판단의 충고였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은 이러한 조언을 듣지 않고 2002년 9월 신의주특별행정구 지정을 발표하고, 네덜란드 국적을 취득한 양빈楊斌 어우야歐亞그룹 총재를 초대 행정장관에 임명했다가 결국 중도 하차함으로써 타격을 받았다. 신의주특구 행정장관에 임명된 양빈은 신의주로 출발 직전인 10월 4일 새벽 중국 공안당국에 연행됐다. 중국 외교부는 4일이 지나서야 기자 브리핑에서 “불법 활동에 관여한 혐의로 양빈을 조사 중”이라고 확인해주면서도 “양빈사건과 신의주특구는 관계가 없다”고 관련성을 부인했다. (123~124쪽)
* 1975년 4월 18일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은 중난하이中南海 관저에서 마오쩌둥과 마주 앉았다. 당시는 미국의 베트남전 철수가 임박한 가운데 캄보디아에서는 전날 크메르루주 반군 지도자 폴 포트가 친미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정권을 수립한 데 이어, 2주 후 베트남전에서는 사이공이 함락되던 시점이었다. 션즈화沈志華 교수에 따르면, 김일성은 마오쩌둥과의 비밀회동에서 “캄보디아와 베트남이 위대한 승리를 얻어 우리는 매우 기쁘다”며 한반도에서도 무력통일을 시도하고 싶다는 뜻을 마오에게 전달하려 했다. 하지만 마오는 (백내장으로) 눈이 좋지 않다며 화제를 돌리고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대화를 끊었다. 이렇게 마오쩌둥은 무력통일의 꿈을 버리지 못한 김일성의 의도를 명확히 파악하고 구체 발언 기회를 차단했으며, 제2차 한국전쟁 발동 의지를 가지고 방중했던 김일성은 마오쩌둥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이러한 마오쩌둥의 냉담한 태도를 보면서 김일성은 제2의 남침을 하더라도 미국과 관계 개선을 시작한 중국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것임을 충분히 직감하고 귀환했을 것이다.
마오쩌둥이 김일성의 제2차 한국전쟁 의도를 외면했던 이유는 1972년 닉슨 대통령의 방중 이후 미국과의 관계 개선 분위기에 장애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중소 대립으로 안보위협에 직면한 중국은 미국과의 제휴로 위기를 돌파해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중국과 북한 사이에는 공동의 이익이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인도차이나 공산화 도미노에 편승하여 제2의 한국전쟁을 시도할 목적으로 방중했던 김일성은 마오쩌둥의 반대에 부딪혀 남침 구상이 좌절됐다. 이 회담을 계기로 김일성은 중국에 의존하지 않고 은밀히 핵개발을 진척시키는 등 독자 노선을 걸었다. (210~211쪽)
* 김정일은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에 대한 반감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 덩샤오핑을 수정주의자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1983년 6월 후계자 신분으로 비밀 방중을 마치고 귀국한 김정일은 즉시 노동당 중앙위 제6기 7차회의를 소집하여 귀국보고를 하면서 “중국 공산당은 이제 사회주의가 완전히 없어졌다. 수정주의만 남아 있을 뿐이다. 중국의 4개 현대화 노선도 ‘자본주의로의 길’이며, 수정주의 노선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이 소식은 중국에도 전해졌고, 이에 대한 덩샤오핑의 노기는 대단했다. 덩샤오핑의 입장에서는 아직 후계자에 불과한 풋내기 김정일이 사회주의 혁명의 대선배인 중국 지도자를 ‘수정주의자’로 꾸짖는 무도함을 용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애정 깊은 북한의 앞날이 걱정스러웠다. 이에 덩샤오핑은 그해 여름 ‘베이다이허北戴河 휴가’로 위장한 채 다롄의 방추이다오棒槌島 별장에 가서 김일성과 극비 수뇌회담을 가졌다. 김정일의 행동에 대한 덩샤오핑의 엄중한 지적을 받은 김일성은 귀국 후 잘 타일러 사죄 방중을 시키겠다는 약속과 함께 덩의 양해를 구했다.
사죄를 위한 중국 재방문을 완강하게 거부하던 김정일은 마지못해 그해 9월 중국을 재차 방문했다. 자리 권유를 마다하고 시종 선 채로 덩샤오핑의 이야기를 경청한 김정일은 선전深?경제특구 현장을 학습한 이후에야 귀국했고, 중국 측은 김정일 후계에 대한 승인의 뜻을 평양에 통보했다. (244쪽)
* 제3차 핵실험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북한과의 갈등을 해소하려 노력했지만, 김정은이 2013년 말 장성택을 포함한 친중 경협파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면서 그러한 노력은 완전 물거품이 되었다. 특히 장성택 처형의 근거 중에 하나였던 “나선특구를 외국에 팔아먹은” 혐의는 바로 나선지대에 투자한 중국을 지칭하는 것이란 점에서 북중 경협사업에 찬물을 끼얹었다. 2014년 7월 3일 시진핑 국가주석은 중국 최고지도자로서는 이례적으로 북한보다 한국을 먼저 방문하여 ‘한중 공동성명’에서 ‘북핵 불용’ 기조를 재확인했다. 이는 중국의 대한반도 외교사에 기록될 만한 상징적인 ‘사변’으로서 시진핑의 북한에 대한 불편한 심기의 표출이라는 맥락으로 받아들여진다.
북한은 시진핑의 방한과 북중관계의 악화에 대해 불신과 반감을 드러냈다. 2014년 7월 북한 국방위원회 정책국 대변인 담화는 “일부 줏대 없는 나라들이 미국을 맹종해 구린내 나는 꽁무니를 따르면서 저저마다 가련한 처지에 이른 박근혜를 껴안아보려고 부질없이 왼심(조바심)을 쓰고 있다”고 비꼬았다.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에 동조하면서 한국과는 정상외교를 행하고 있는 중국을 겨냥한 비난이다. (263~264쪽)
* 그런데 중국에게 있어 북핵문제는 ‘양날의 검’이다. 북한이 핵을 개발해 미국과 한국을 상대로 세력 균형을 잡아주는 것은 중국에게 유리한 측면도 있다. 강하게 막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핵 때문에 북한이 미국에게 가까워지고 북중 간에 마찰이 일어난다면 북한은 거꾸로 중국을 위협할 수도 있다. 중국이 북한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이유이다. 북한이 친미국가가 되는 것은 중국에게는 가장 부담스러운 시나리오다. 시진핑이 2018년 3월 말 트럼프와 김정은의 북미 정상회담에 앞서 서둘러 김정은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여 극진하게 환대하고, 40일 만에 또다시 다롄에서 회동을 가진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북한은 자신의 체제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핵을 개발하는 것도 미국의 관심을 끌기 위한 목적이고, 궁극적으로 핵으로 안전보장을 구매하려는 대상국도 미국이다. 역설적이게도 북한은 친미를 위해 반미를 해왔다. 미국이 ‘전략적 인내’를 한다면서 들은 척을 안 하니까 ‘벼랑 끝’까지 모험을 고집한 것이다. (463~4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