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1802년 2월 26일 브장송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바람대로 대학에 진학해 법학을 공부하면서도, 문학에 대한 꿈을 분명하게 갖고 있었다. 불과 14세 때 쓴 일기에 당대의 저명한 작가이자 정치가였던 프랑수아 샤토브리앙을 거론하며 “샤토브리앙처럼 되고 싶다.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도 닮고 싶지 않다”고 했던 것을 보면 문학가에 대한 꿈이 어느 정도였는지 분명히 짐작이 된다.
1822년 발표한 첫 시집 『오드』로 주목을 받고, 1825년에는 작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5년 뒤 발표한 희곡 『크롬웰』과 1829년 발표한 시집 『동방시집』으로 문단의 총아이자 낭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명성이 확고해졌다.
사회적 격변기를 살아 낸 예술가답게 참으로 파란만장한 일들을 겪었다. 1848년의 2월 혁명, 국회의원 당선, 공화제 옹호, 1851년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반대한 죄목으로 국외 추방, 19년간의 망명 생활. 하지만 전 세계를 통틀어서 위고만큼 살아 있는 동안 큰 영예를 누리고 원하는 영향력을 발휘한 작가는 별로 없을 것이다.
위고는 1859년의 사면령에도 불구하고 고국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고 뜨거운 창작열을 불태웠다. 그 기간 위고의 시집 가운데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정관시집』을 비롯해 『레미제라블』 『바다의 노동자』 『웃는 남자』 등의 대표작을 연이어 발표했다.
1870년 루이 나폴레옹의 제2제정이 몰락하자, 그해 9월 5일 밤에 기차를 타고 파리에 도착했다. 위고가 80세 생일을 맞이한 1881년 2월 26일은 임시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군중은 그의 집 앞까지 찾아와 축하해 주었다. 4년 뒤인 1885년 5월 18일 폐렴으로 자리에 누워 22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위고의 마지막 말은 “검은 빛이 보인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