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일드의 옥중기(De Profundis)(1905) : 출옥을 수개월 앞둔 1897년 초 오스카 와일드는 편지를 통해서나마 보시(Bosie)에 대한 비난을 꺼리지 않았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며 수감을 통해 자신이 영적으로 발전하였고 예술가로써 거듭나고 있다는 자기애적인 면모를 드러냈습니다. 특히 ‘자신의 연인’ 보시(Bosie)에 대한 칭호가 Dear Bosie에서 Your Affectionate Friend로 변화하였다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교도관 넬슨(Nelson)은 한 장 이상의 분량이거나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는 편지는 발송하지 않았으며, 오스카 와일드는 1897년 5월 18일 석방된 후에야 검열된 모든 편지를 반환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의 편지를 출판 대리인(literary executor) 로버트 로스(Robert Baldwin Ross)(1869~1918)에게 맡겼는데, 로스는 오스카 와일드의 연인이기도 했습니다. 로스는 와일드와 단순한 출판 대리인(literary executor)을 넘어선 관계로 그가 프랑스로 망명한 후에도 그의 작품을 출간하기 위해 정신적, 재정적 조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오스카 와일드가 사망할 당시에도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심지어 그의 유골 또한 19050년 오스카 와일드 사망 50주년을 기념해 그의 곁에 안치될 정도니 둘의 관계는 오히려 보시보다도 친밀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로스는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을 퀸즈베리 가족에 대한 일체의 묘사를 잘라내었으며, 작가가 사망한(1900) 후 5년이 흐른 1905년 출간하였습니다. 책 제목은 시편 130편(Psalm 130)의 첫 문장에서 따와 붙였습니다. 친필 원고는 로스가 1960년까지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영국 박물관(British Museum)에 기증하였으며, 현재까지 영국도서관(British Library)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영어고전(English Classics)과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문학여행을! B
This New Life, as through my love of Dante I like sometimes to call it, is of course no new life at all, but simply the continuance, by means of development, and evolution, of my former life. I remember when I was at Oxford saying to one of my friends as we were strolling round Magdalen’s narrow bird-haunted walks one morning in the year before I took my degree, that I wanted to eat of the fruit of all the trees in the garden of the world, and that I was going out into the world with that passion in my soul. And so, indeed, I went out, and so I lived. My only mistake was that I confined myself so exclusively to the trees of what seemed to me the sun-lit side of the garden, and shunned the other side for its shadow and its gloom. Failure, disgrace, poverty, sorrow, despair, suffering, tears even, the broken words that come from lips in pain, remorse that makes one walk on thorns, conscience that condemns, self-abasement that punishes, the misery that puts ashes on its head, the anguish that chooses sack-cloth for its raiment and into its own drink puts gall:?all these were things of which I was afraid. And as I had determined to know nothing of them, I was forced to taste each of them in turn, to feed on them, to have for a season, indeed, no other food at all.
오스카 와일드의 묘소가 영국이 아닌 프랑스에 있는 이유는?! : 오스카 와일드는 출옥 후에도 프랑스에서나마 작품 활동을 하고자 애썼습니다만……. 예전의 명성은 물론 건강과 재정마저 악화된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소소한 성공은 거두었으나 빈곤한 생활을 면치 못했고, 결국 1900년 46세의 그리 많지 않은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오스카 와일드의 묘비는 영국이나 아일랜드가 아닌 프랑스에 있죠. 그의 육신은 비록 사라졌으나, 그의 명성은 불멸하였기에 그의 묘소는 세계 각지에서 그의 흔적을 만나기 위해 방문한 여인들의 ‘키스마크’로 가득합니다.
남편을 만난 영국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은 오스카 와일드의 아내 : 번외적으로 여자도 아닌, ‘남자와의 부적절한 관계’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남편 오스카 와일드의 아내 콘스턴스 메리 로이드(Constance Mary Lloyd)는 법적으로 이혼을 요구하지는 않았으나, 아예 영국을 떠나 자녀와 함께 스위스, 독일 등을 떠돌았습니다. 자녀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는 것 또한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녀들의 성마저 와일드(Wilde)에서 홀랜드(Holland)로 바꿔 그의 흔적을 철저히 가렸습니다. 자녀들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아내가 아닌 다른 이, 그것도 동성을 사랑한 오스카 와일드에게도 큰 충격이자 평생 안고 살아야할 고통이였습니다. 그녀는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가 수술 부작용이 겹쳐 남편보다 일찍 사망하였는데(1898), 인근의 묘지에 안장됨으로써 남편과 함께 했던 영국으로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동성애 문학가?! : 오스카 와일드는 이성과 결혼해 자녀를 둔 이성애자이자 남성을 사랑한 동성애자의 특성을 모두 갖춘 양성애자였습니다만, 혹독한 수감 생활을 거친 후에는 별다른 염문은 없었습니다. 작품 못지않게 아름다운 외모와 당대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든 스캔들 덕분에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동성애 문학가’를 꼽으라면 단연 오스카 와일드가 거론됩니다.
I don't defend my conduct. I explain it. Also in my letter there are several passages which explain my mental development while in prison, and the inevitable evolution of my character and intellectual attitude towards life that has taken place, and I want you and others who stand by me and have affection for me to know exactly in what mood and manner I face the world. Of course, from one point of view, I know that on the day of my release I will merely be moving from one prison into another, and there are times when the whole world seems to be no larger than my cell, and as full of terror for me. Still at the beginning I believe that God made a world for each separate man, and within that world, which is within us, one should seek to live. preface(1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