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절기를 2년 꼬박 쉬지 않고 따라다니며 그렸다. ‘농가월령가’도 아닌 것이, 사랑월령가도 아닌 것이 내 뜰에 들어와서 가을비에 젖으며 수채화를 쓴다. 가을장마가 아무리 정체전선을 두텁게 형성하여도 계절에 떠밀려 물러나고야 만다.…”
한국수필문학상 수상자인 우초 고재동 수필가가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강아지와 아기염소가 쓰는 서사시』(북랜드 2021)에 연이어 수필집 『경자야』를 펴냈다. 책에는 춘하추동 계절의 길잡이가 되는 24절기를 두 해에 걸친 따라가며 바라본 귀촌 풍경을 동화를 쓰듯, 수채화를 그리듯 천진하고 투명하게 담았다. 시인이기도 한 고재동 표 산문 형식이라 할 만한, 자작시 한 편이 편마다 수록되어 언제나처럼 읽을거리가 풍성하다.
작가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음 가는 대로 정했다는 책 제목 『경자야』 가 참 정감이 간다.
벽 하나 사이 두고/ 허한 밤 가슴 앓던/촌뜨기 소나무는/ 한마디 말 못 하고/뒷모습/ 애잔하게 보낸/ 옆집 누나 경자야// 반세기 건너와서/ 다시금 가슴앓이/ 젖은 맘 달래려다/ 타는 놀 뚫린 저녁/ 내 고향/ 산마루터기에/ 긴 목 빼고 서 있다 -「소나무」-
강아지와 아기염소, 돋을별 찬란한 아침, 경자야, 입추에서 대한까지 4부, 48편의 작품이 실렸는데 입춘부터 대한까지 어김없는 24절기와 함께 흘러가는 소박한 시골에서의 일상과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 소재이다, 사람, 동식물, 자연 심지어 우주가 별개가 아닌, 소통 상생하는 일체 합일의 세상을 그리기 위해 작가는 서정과 서사, 대화체나 산문체, 시와 동화 등 다양한 글쓰기 방식으로 독창적인 수필을 선사한다. 담백한 듯하면서 시적인 문장과 문체가 편마다 일품이다. 편안하게 읽히면서도 깊이 있는 교훈을 주는 수필가의 개성 있는 글에 감탄하게 된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 탓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몸을 튼실하게 보존한 냉이는 제 몸 불살라 아낌없이 60대 우리 부부에게 행복을 선사한다. 종족 번식하기 위해 악착같이 겨울을 났지만, 밭 한가운데 냉이는 어차피 자리를 비워줘야겠기에 아낌없이 우리에게 봄을 지폈다. 밭 가장자리나 밭둑에 우뚝 서서 자랄 동료에게 훗일을 부탁하고. -경칩 「강아지와 아기 염소·2」-
…나는 달이 대낮에 어느 하늘에 떴는지 뭇 사물들이 감지조차 할 수 없을 때의 낮달이고 싶었다. 아니 진작부터 그런 낮달이었다. 해와 인간, 모든 생물과 무생물체가 깨어 있으니 달의 존재 가치가 하늘에도 그 어디에도 없을 때 나는 숨죽이며 늘 등 뒤에 있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후미진 곳에 무지렁이로 살고 있다. 해가 지고 사물이 잠들 때 노랗게 빛을 내는 달은 너무나 먼 곳에 있었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우주의 끝 간 데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평생 동경하는 나의 애장품이었다. 그의 마음을 훔친 뒤부터. -입하 「두 개의 아기별」-
네가 떠날래?/ 내가 떠날까?/ 우주 밖 나무집 한 채 지어줄 테니/ 코로나와 곳간 비운 생쥐는/ 거기 가서 살건 말건/ 지구의 빈 곳간은/ 황소바람 맞으며 내가 지킬게. -소한「생쥐와 황소」-
은종일 수필가 ((사)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이 말한 바와 같이 『경자야』에는 “한 편 한 편에 사랑으로 점철된 자연이 있고, 꿈을 보듬는 우주가 있다. 동식물, 심지어 무생물에까지 생명력을 불어넣어 교감하는, 상상력의 세계”가 있다. 그 세계가 참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