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론 대공가의 농노 가수, 알페릴.
지나친 아름다움은 독이 되어 그녀의 가는 목을 조르고
원한 적 없는 재능은 날카로운 덫처럼 팔다리를 짓눌렀다.
평생 대공의 손끝에 묶여 꼭두각시 인형처럼 살 신세라고 생각했건만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그의 죽음 후 갑작스레 자유가 찾아온다.
외딴 저택에 버려진 그녀 앞에 나타난 사내.
비운의 천재 피아니스트라 불리는 대공의 사생아, 테렌치오 헤론.
“앉아, 네 덕분에 완성한 곡이니 처음 듣는 사람도 너여야겠지.”
“역시 저희는…… 만난 적이 있나요?”
단순한 외로움에 의한 호의일 뿐일까.
묘한 변덕으로 시작된 관계가 깊어지고 길어질수록
알페릴의 고요했던 삶은 거센 폭풍처럼 흔들리는데…….
*
“괜찮아, 기억해야 하는 건 모두 남아 있으니까.”
“기억해야 하는 게 뭔데요?”
“너.”
알페릴이 뚫어져라 바라보자, 테렌치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너를 기억해, 알페.”
그녀는 그것을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다.
영원토록 그 웃음만을 눈에 담는다 해도, 그 안에 담긴 뜻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