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이야기꾼 권리가 만난
마술적 리얼리즘의 거장 가르시아 마르케스
◎ 도서 소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라틴아메리카의 비극적 현실을 탁월하고 독창적으로 형상화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길을 따라가다
20세기 들어 대중과 유리된 이른바 ‘예술소설’이 성행하고, 기존의 소설 양식으로는 현실의 복잡하고 다변적인 리얼리티를 담아 낼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소설의 종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 콜롬비아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백 년의 고독』이라는 작품으로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소설 미학을 보여 주며 전 세계를 매혹시켰다. 작가는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을 특유의 마술적이고 시적인 현실로 변용함으로써 ‘현실’을 전에 없이 넓고도 깊게 확장시켜 주었다. 작가의 초현실주의적 세계 안에서 얼음은 뜨겁게 펄펄 끓고, 난로에 얹어 둔 우유가 끓지 않아 뚜껑을 열어 보니 구더기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자식의 죽음을 알아채며, 가문 최초의 인간이 죽었을 때는 노란 꽃비가 밤새 소리 없이 내려 바깥에서 잠자던 짐승들은 질식하고 사람들은 삽으로 꽃송이들을 치워야 했다. 현대판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라 불러도 좋을 만큼 특출한 이야기꾼의 면모를 보이며 죽어 가던 소설이라는 장르를 소생시킨 그의 대표작 『백 년의 고독』에 대해 체코의 거장 밀란 쿤데라는 “책꽂이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을 꽂아 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인가”라고 했고,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에스파냐어로 쓰인 소설 중 『돈키호테』 다음으로 훌륭하다”라고 극찬했다.
1982년, 가보(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애칭)에게 노벨문학상의 영예까지 안겨 준 『백 년의 고독』은 유토피아 같은 마을 마콘도를 세운 부엔디아 가문의 6대에 걸친 흥망성쇠를 그린 작품이다. 마콘도에 철도가 들어오고 미국인들에 의해 바나나 농장이 들어서면서 마을은 한때 번영을 누리지만,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일으킨 바나나 농장의 노동자들이 대거 학살되고 이후 가뭄과 폭우와 집단 불면증이 길게 이어지면서 그곳은 깊은 고독에 휩싸인다. 결국 100년이 흐른 뒤 부엔디아 가문에 돼지 꼬리가 달린 아이가 태어나면서 마콘도는 폐허가 되어 사라지고 만다. 라틴아메리카가 처한 고통스럽고 복잡다단한 현실은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작가의 초현실주의적 상상력에 의해 한층 심오한 현실로 다가오게 되었다.
가상의 유토피아 마콘도의 배경지인 아라카타카에서부터
문학청년 시절을 보낸 보고타와 바랑키야를 거쳐
카리브적 서사의 상징 카르타헤나까지
‘남미의 세르반테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자취를 좇는 콜롬비아 기행
1928년, 콜롬비아 북부의 작은 마을인 아라카타카에서 11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가보는 어린 시절을 외조부모의 슬하에서 보냈다. 외할아버지는 어린 손자에게 1928년 콜롬비아 시에나가에서 일어난 바나나 농장 학살 사건 같은 내전에 대한 이야기를 천 번도 넘게 이야기해 주었고, 외할머니는 카리브 지역에 떠도는 각종 전설과 미신과 신화를 실제로 있었던 일인 양 천연덕스럽게 들려주었다. 외할아버지에게 들은 콜롬비아의 비극적 현실과, 외할머니에게 들은 기괴하고 불가사의한 이야기는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대변되는 20세기 최고의 이야기꾼이 탄생하는 데 핵심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훗날 외할아버지는 『백 년의 고독』의 무대인 마콘도의 최대 영웅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모델이, 외할머니는 마콘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우르술라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한편 전신 기사 출신의 떠돌이 약장수였던 가보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야기꾼에게 필요한 ‘약 파는’ 솜씨를 물려주었고, 강인하면서도 침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족을 지배한 어머니는 여성들을 사랑했던 가보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소설가 권리는, 생의 낭만을 알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가보의 마법에 걸린 듯 그가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자 마콘도의 배경지인 아라카타카에서부터, 문학청년 시절을 보내고 저널리스트로도 활동한 보고타와 바랑키야를 거쳐, 카리브해를 상징하는 도시이자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배경지인 카르타헤나에 이르기까지 콜롬비아의 여러 도시를 여행했다. 아라카타카에서는 100년 전 가보가 살았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특유의 그 ‘없음’을 좋아했고, 몸포스에서는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콘도의 실제 모습에 가까운 유토피아라는 생각을 했으며, 카르타헤나에서는 충동과 우연과 축제로 이루어진 가보의 카리브적 서사가 어디에서 연원했는지를 보았고, 엄청난 파고를 자랑하는 바람의 도시 리오아차에서는 오랜만에 편안함을 느꼈다. 가보의 환상적 이야기만큼이나 강력한 환영을 본 것 같은 70여 일의 콜롬비아 여행을 마치면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를 통해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좋아하게 되었고, 콜롬비아가 단지 커피와 마약의 나라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로 인해 6개월 넘게 라틴아메리카 대륙을 여행할 만큼 그곳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곳 출신의 작가들 하나하나가 온전한 하나의 대륙임을 알게 되었다.”
◎ 본문 속에서
가보는 여러 똥 같은 상황 속에서도 카리브인의 낙천성을 잃지 않았고, 언제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을 두었다. 그는 인간을 사랑했다. 새와 강과 돌과 하늘을 사랑했다. 여성을 사랑했다. 그는 실수투성이 인간을 비난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는 현실을 즐겼다. 놀 줄 알았다. 혼자 있는 것보다 타인과 함께 있는 것을 즐겼다. 아마도 그는 내가 아는 작가 중 친구가 가장 많았던 사람일 것이다. 휴머니즘은 기자로서의 경험과 이야기꾼으로서의 타고난 본성을 적절하게 배합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대중적으로’ 완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12~13쪽)
그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줄 아는 인간 프로작Prozac이다. 내가 그의 책에 중독된 것은 그가 생의 낭만을 잘 아는 작가이기 때문이다.(17쪽)
썰에 끌리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누구나 끝없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셰에라자드에 관한 환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잠들 때까지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어 불면의 고통 없이 잠에 빠져들게 만드는. 이제 그 역할을 담당하는 이들은 현대의 작가들이겠으나 20세기 작가들은 정치, 혁명 등에 관한 우의로서의 문학에 집중하느라 철학의 옷을 입은 소설을 내고 말았다. 그런 면에서 가보의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의 힘, 원초적인 그 힘, 그래서 원시적이고 마치 설화를 듣는 듯한, 남미 신화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힘을 가지고 있다. 특히나 ‘제3세계’로 취급되는 남미 출신 작가의 셰에라자드식 화법, 즉 썰은 이방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22~23쪽)
나는 아라카타카의 ‘없음’이 좋았다. 이곳에서는 가보가 100년 전 그 마을에 살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수년 전 쿠바에 갔을 때 받은 느낌과 비슷했다. 가보가 태어난 지 이미 100년이 지났지만 아라카타카는 아직 자본의 손길이 여전히 미치지 않은 곳이었다. 빵집이나 사진관, 카드 계산기, 자동판매기 등 늘 사용하는 물건이나 장소가 그대로 있었고, 아몬드나 무와 벤치, 카드 게임을 하는 노인, 초등학교처럼 꼭 있어야만 할 풍경만 보였다. 마을 전체를 둘러보아도 가보의 동상은 찾기 힘들었고 기껏해야 소설 구절이 적힌 책 기념물이 기차역 주변에 있었다. 기차역에도 기차가 그다지 오가지 않아 조용했고, 역사 근처에 가보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때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어 ‘이곳이 아라카타카가 맞긴 맞구나’ 하고 안심시켜 줄 정도였다.(62~64쪽)
『백 년의 고독』에서 ‘마콘도’는 178회, ‘고독’은 48회 등장한다. 아라카타카에 대학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가보가 소설로 겨우 살려 내지 않았다면 여전히 마콘도는 고독한 채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고독은 마콘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어다. 고독은 불안, 절망, 포기, 후회 등과 함께 온다. 소설의 인물들은 반복되는 행동을 통해 해소하려 한다. 뭔가를 계속 반복한다는 것, 그것은 주로 의미 없는 행동을 뜻한다.(74쪽)
몸포스 기행에 대해 쓰면서 나는 다시 한 번 행복해졌다. 뒤늦게 생각해 보니 몸포스야말로 마콘도의 실제 모습에 가까운 유토피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아침 심한 알레르기로 늘 재채기를 하며 기상하던 내가 몇 년 만에 비염이 말끔히 사라지는 기적을 맛보기도 했다. 콜롬비아를 여행한 35일 가운데, 아니 이번에 남미를 여행한 약 70일간의 여행 가운데 가장 행복한 나날이었다. ‘행복’이라는 단어 사용에 무척 인색한 내가 이런 말을 거리낌 없이 쓸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85쪽)
유럽에서 온 윤락 여성들이 우글대는 성매매 업소 근처에서 스물세 살의 가보는 제멋대로 살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임질과 담배를 달고 살고 면도도 안 하고 꽃무늬 셔츠를 즐겨 입던 보헤미안이었다. 패션만큼이나 문학에 대한 목마름을 느끼던 가보는 그를 작가로 만들어 주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바랑키야 그룹을 만났다. 당시 산블라스가(35번가)에는 유명한 지식인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곳에는 콜롬비아카페, 시네콜롬비아, 로마카페 등 모던한 상점들로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문도서점(세계 서점)은 바랑키야 문학의 중심지였다. 책방의 주인은 60대 후반의 돈 라몬 비녜스였다.(161쪽)
가보는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정치적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글을 쓰는 데 의미를 두었다. 그런 그가 쿠바혁명의 지도자인 카스트로와 두터운 친분을 쌓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둘의 인연은 거의 30~40년에 걸쳐 단단하게 이어졌다. 1948년, 보고타 사태로 카스트로와 우연히 마주친 20대의 가보는 그때부터 그에게 푹 빠졌다. 가보는 쿠바의 야당 성향 방송국인 라디오 레벨데의 방송을 매일 듣고, 카스트로에 관한 기사를 전부 읽었다.(165~166쪽)
전형적인 카리브인인 가보 역시 바로 이 충동과 우연에 기반한 독특한 서사를 구사했다. 그것은 ‘우연’을 플롯이나 복선의 실패로 취급하는 영미의 서사와는 몹시 다르다. 일반적인 서사 구축 방식은 독자의 콧속에 깃털을 넣고 간질이듯이 복선을 주고 호기심 가루 맛을 본 독자가 마침내 재채기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가보의 서사는 시에스타를 즐기는 여유 자적한 카리브의 생활을 소설에 옮겨 놓은 느낌이다. 조금 느슨하지만 물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 말이다.(181~182쪽)
그는 만성 우울증 환자가 비루한 삶으로부터 회피할 수 있게 단단한 몰입을 선사한다. 이야기의 끝을 알고 싶지 않고 그의 이야기 안에서만 머무르고 싶게 만든다. 그는 손가락으로 한곳을 응시하고 독자가 그 손가락에 의지하는 동안 능구렁이처럼 그 손가락을 타고 넘어간다. 농담에 웃어 버리는 순간 독자는 최면에 걸려 버린다.(1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