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향 (1902-1926)
나도향은 양의사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18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문학에 뜻을 두고 중퇴, 일본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집필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가업을 잇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도향의 문학 활동을 반대하던 조부가 독립운동에 가담하면서 가세가 기울게 된다. 조부의 생활비 원조 중단으로 1920년, 학비가 부족해진 나도향은 결국 귀국하게 된다. 이후 25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하기 전까지 주로 애정 윤리를 주제로 한 감상적이며 낭만적 분위기의 작품들을 다수 남겼다.
나혜석 (1896-1948)
일본 도쿄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서 서양화를 공부. 이후 화가, 작가, 여성운동가로 활동하였다. 자신에게 청혼하는 변호사 정우영에게 요절한 첫사랑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 신혼 여행지를 그곳으로 정할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처 소생 자식과 떨어져 지내게 해줄 것 등의 조건을 제시하며 화제가 되었다. 이후로도 조선 여성 최초로 유럽일주를 하던 중 만난 남편의 친구와 염문을 뿌리며 이혼을 하고, 이후 그 남성에게 정조 유린을 이유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거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 행보를 이어갔다. ‘조선여자도 사람 될 욕심을 가져야겠소.’ 라고 주창한 나혜석은 가장 유명한 일제강점기 신여성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다.
계용묵 (1904-1961)
평안북도 선천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이후 외숙부의 호적에 올라 ‘하태용’이라는 이름으로 개성의 외갓집에서 생활하였으나, 5세 때 외조부와 친모의 사망 이후에 다시 선천으로 돌아와 생부 밑에서 성장한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다녔지만, 신식교육을 반대하는 조부의 반대에 부딪혀 중퇴 후 서당을 다니게 된다. 성인이 되어 뒤늦게 일본으로 유학, 도요대학교 철학과에서 공부하였으나 집안이 파산하는 바람에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한다. 이후 1920년에 소년 잡지에 소설을 발표하며 등단하였고, 1935년에 대표작 '백치 아다다'를 발표한다. 정교한 묘사와
백신애 (1908-1939)
작가, 여성운동가, 배우로 활동. 영천의 보통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며 경북 지역 최초의 여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했단 이유로 해임되고, 이후 여성 최초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풍족한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궁핍한 삶과 조국을 떠나 타지에서 떠도는 실향민의 처지에 관심을 두었고 이를 '꺼래이' 등의 작품으로 남겼다. 시베리아를 여행하며 밀정으로 오인 받아 일본의 고문에 건강이 상하게 되고, 이때 얻은 병이 이혼 후에 급속도로 악화되어 32세라는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