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누구이고, 하느님 나라는 무엇이며, 나의 신앙은 어떤 것인가?
역사상 오늘날 우리나라에서처럼 특정 종교가 동시에 열광과 비판의 대상이 된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자신의 신앙생활을 되돌아보고 거기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는 신자들로선 많은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배냇교인으로서 평생을 습관적 일요일 신자로 살아온 지은이도 그런 갈등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수십 년 동안 해직기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온 지은이는 자신이 추구하는 자유언론과 크리스천으로서의 사명을 조화시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며 살아 왔다. 그러나 이 땅의 교회들은 이러한 지은이의 고뇌와 열망에 제대로 답해 주지를 못했다.
지은이는 종심(從心)의 나이를 훌쩍 넘기면서 예수는 누구이고, 하느님 나라는 무엇이며, 자신의 신앙은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어떤 확신을 가지고 싶었다. 일요일마다 끼고 다니던 성경을 다시 펴들고 꼼꼼히 읽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출간하는 《믿음의 배냇저고리를 벗고》는 그 결과물인 동시에, 기독교 역사와 한국 기독교 현실에 대한 일말의 비판이기도 하다.
유신독재 시절 자유언론운동에 나선 지은이는 1978년〈민주·인권 일지〉 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 항소심 최후진술에서 ‘회개와 구원’의 의미를 말한 적이 있다. 이번 출간된 책에서 밝힌 지은이의 신앙과 맥이 통하는 것으로 보여 여기에 옮겨본다.
“10.24 자유언론 실천선언에 앞장섰던 우리들은, 우리가 그렇게 고결했던 언론인들이었다거나, 언론인으로서 사명을 다했던 언론인들이라고 결코 생각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부패했고,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었으며, 무기력하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있던, 그런 아주 평범한 언론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자유언론을 위해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우리 직장까지도 걸고 투쟁을 했고, 그 때문에 우리가 젊음을 바쳐 일해 왔던 직장에서 쫓겨나고 만 4년여 동안 거리를 방황하면서…(중략)…그러고 지금까지도 자유언론을 위해서 우리가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 이것은 분명히 하나의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기적이 결코 문자 그대로의 기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기적은 바로 우리 참회의 과정을 통해서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
나는 기독교 신자입니다만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터득하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1974년 10월 24일 이후, 우리가 자유언론실천운동을 통해서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비로소 그 의미를 조금 터득하게된 것 같습니다. …(중략)… 이러한 심한 고통과 시련을 우리가 이겨내고 지금까지 견뎌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가 자유언론 실천을 통해서 이 민족과 이 민중 앞에 참회를 했고, 그를 통해서 우리가 이 민족사 속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그런 확신, 바로 그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79년 7월 25일 서울고등법원 항소심 최후진술 중에서)
■ 책의 특징 및 내용
I. 떠나보낸 여호와 하느님
"이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 무겁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하느님을 뵙지도 못하고,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창세기 4: 13~14)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이라니!
여호와께서 흙으로 빚어 만드신 아담과 하와 말고 또 다른 사람들이 이미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살게 된 가인이 아내를 얻어 아들까지 낳을 수 있었겠는가?(창 4: 17)
그렇다면 과연 아담과 하와를 모든 인류의 유일한 조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시시콜콜 따지며 읽어가다 보면, 구약성경에는 앞뒤가 서로 안 맞는 이야기도 많고, 허무맹랑하게 보이는 이야기도 수두룩하다.(신약성경에도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들이 적지 않지만.) 내가 이렇게 유치해 보이는 질문을 먼저 던져보는 것은, 이제까지 교회가 성경 속의 모든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믿도록 요구해왔고, 많은 크리스천이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II. 내가 믿는 하느님
우리는 얼마 동안 ‘하느님 없음’을 열심히 논증하고, 그분을 우리의 의식 밖으로 내던지고, 그분 없이 아주 편안하게 잘 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 논증들을 거듭 되새김질해 보면, 우리가 그렇게 거부하려고 안간힘 쓴 그 하느님이 사실은 진짜 하느님이 아니라 그분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들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된다.
사람의 상상력과 소망의 산물인 하느님, 사람과 같이 욕망하고 분노하는 하느님, 사람의 위안거리로 만들어진 하느님은 얼마든지 논박당하고 거부될 수 있다. 그러나 정말로 털끝만큼의 의문도 없이 하느님의 현존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마찬가지로 누가 나에게 왜 하느님의 현존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런저런 이유를 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명백히 증명해 보일 수는 없다.
사실 인간의 지능으로 증명할 수 있는 하느님이라면. 그런 하느님은 결코 하느님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한때 인간의 이성이 자연과 역사를 정복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겉껍데기 현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 누가 모든 존재의 심연에서 타오르는 생명의 불꽃을 보고 하느님을 뵈었다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하느님의 현존을 굳게 믿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 했던가?
III. 내가 사랑하는 하느님
예수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참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예수 시대의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 많은 그릇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걸핏하면 분노하고 질투하고, 숨어서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벌을 주는 하느님, 사람보다 예배의식이나 희생 제물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하느님, 그런 잘못된 관념들이 지배적이었다.
예수는 이런 잘못된 관념들을 바꿔놓으려 애썼다. 예수가 보여준 진짜 하느님의 얼굴은 전혀 달랐다. 모든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는 생명의 하느님, 아무리 비천한 사람이라 하여도 빠짐없이 사랑하여 주시고,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받아주시는 넓은 품의 하느님, 부유하고 권세 있는 사람들의 편에 서시는 분이 아니라 힘없고 가난하고 밀려난 사람들의 편에 서시는 하느님, 그런 하느님의 진짜 얼굴을 오롯이 보여주었다.
예수가 꿈꾸는 세상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힘 있고 부유한 사람들이 위세 부리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은 짓눌리고 부서지는, 하느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불공정한 사회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존중받는 ‘새 하늘과 새 땅’이었다.
IV.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
예수가 가르쳐준 기도문을 보면,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오는 것이지, 우리가 그리로 가야 할 나라가 아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 하루속히 이 땅에서 이루어져서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 땅이 하느님 나라가 되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성경에는 많은 크리스천이 죽어서 영원한 복락을 누릴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천당’에 해당하는 말을 찾아보기 어렵다. 예수가 ‘지옥’이니 ‘불구덩’이니, ‘영원한 생명’이니, ‘하느님 나라’라는 말은 했지만, 크리스천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같은 ‘천당’을 말하지는 않았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보면 천당과 지옥을 연상케 하는 내용이 있지만, 그건 천당과 지옥에 대해서 말하려 했다기보다는, 원래 제 것도 아닌 부(富)를 제가 잘나 쌓아 올린 양 거만 떨면서 하느님의 본성인 자비와는 담을 쌓고 살아가는, 부자의 삶의 방식을 꾸짖으려 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V. 다시 읽는 구약성경
구약의 편협하고 변덕스럽고 전제군주 같은 여호와는, 진짜 하느님의 모습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모습의 여호와도 만난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다 보면 큰 혼란이 생기게 된다.
근본주의적 크리스천들은 성경이 하느님의 계시에 의해 쓰였으므로 한 점 오류도 없는 절대 진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관점에서 구약성경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 참으로 많다. 그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전혀 무의미한 내용도 허다하다. 그래서 성경 무오류설을 주장하는 신학자나 목사들은, 마치 숨겨진 다른 큰 뜻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억지 해석을 하기도 한다. 《히브리 성경》은 수백 년에 걸쳐 기록되고 거듭 고쳐지고 편집된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적 산물이자 문화유산이다.
모든 저작물이 일관성 있게 조직적으로 수집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주제나 형식이 다양할 뿐 아니라 반복과 모순도 많다. ‘토라’를 읽어보면 그걸 금방 느끼게 된다.
모세가 여호와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그 이야기는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반복되어 나오는데, ‘만남의 장막’ 안에서 모세와 만나는 여호와는 사람이 친구에게 말하듯이 얼굴을 마주하고 말하는 것으로 그려져 다른 지역 신화 속의 신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 보인다.
십계명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윤리의 원형(原形)이다. 그런데 그 십계명이 과연 온전히 지켜졌는지도 의문이다. 계명은 아무 전제 없이 “살인하지 못 한다”고 못 박았다.
그러나 《히브리 성경》을 읽어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무 죄 없는 사람일지라도 이방 민족이라면 모조리 살해하고 그걸 자랑하는 일이 허다했다. 그뿐 아니라 지난 2,000여 년 동안, 그리스도교 교회들과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종교적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살해하고, 이교도라는 이유만으로 살육하기를 서슴지 않았으며, 한 손에 십자가를 든 채 다른 손에 칼을 들고 약소민족들의 죄 없는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VI. 경계 크리스천 단상
예수가 가겠다고 한 ‘내 길’은 어떤 길인가? 가난한 사람, 천대받는 사람,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 갇히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소망을 선포하고, 새 희망을 주는 길이었다. 가난하다고 차별받지 않고, 장애가 있다고 차별받지 않으며, 낮은 계층 출신이라고 차별받지 않고, 이방인이라고 차별받지 않는 세상, 모든 갇혀 있는 이들이 해방되고, 모든 피압박 민족이 해방되며, 모든 계급적 착취로부터 해방되고, 모든 질병과 전쟁의 공포로부터 해방되는 세상, 누구나 다 똑같은 한 형제로 대우받고, 누구나 다 필요한 몫을 분배받고, 누구나 다 똑같은 사람의 권리를 보장받는 세상, 그런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