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예술가 23인이 창조한 오월의 미학
★★★ 『오월의 미학』 1권 이후 10년 만의 신작 ★★★
◎ 도서 소개
전 광주시립미술관 큐레이터가 말하는
우리 시대 대표적 민중미술가 23인 이야기
한국의 리얼리즘 화가들을 소개하는 『오월의 미학 2: 서슬에 새겨진 평화』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전작 『오월의 미학 1: 뜨거운 가슴이 여는 새벽』이 출간된 지 10년 만에 나온 저작이다. 1권 또한 2권과 함께 표지와 본문을 새롭게 단장한 리커버판으로 새롭게 선보인다. 1권에서는 30명의 민중화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그 경향과 의미를 소개했고, 이번에는 23명의 작가를 추가하여 우리 민중미술의 넓어진 지평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의 민중미술은 40년이 넘도록 사회, 정치는 물론 생명과 환경, 인권에 이르기까지 인간사회의 여러 문제를 예술에 녹여왔다. 이와 같은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하기 때문에 외국의 미술연구가와 전시기획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민중미술’이 일반 대중들에게는 ‘무서운 그림’, ‘왠지 거북하고 어려운 미술’로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민중미술처럼 건강하게 우리 민족의 정서와 시대 상황을 기반으로 자생하여 시대의 정당성을 외치면서 진정한 현대성을 확보해온 예술형식도 없다. 이 책이 민중미술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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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월의 미학 1: 뜨거운 가슴이 여는 새벽(리커버) | 장경화 지음 | 23,000원
◎ 출판사 서평
미술은 감상의 대상이지 해설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술작품 앞에 서기를 망설인다. 추상미술은 말할 나위 없지만, 구상 계열의 미술품 앞에서도 사람들은 선뜻 그림 속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한다.
민중미술이라는 장르의 작품들을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주저함에 어색함까지 더해진다. 익숙한 장르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장르의 예술품 앞에서 어떤 걸음걸이를 해야 하는지 더 막막해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출간된 『오월의 미학 2: 서슬에 새겨진 평화』는 민중미술을 대하는 일반인들에게 매우 친절한 지팡이가 될 것이다.
『오월의 미학 2』는 9년 전 출간된 『오월의 미학 1: 뜨거운 가슴이 여는 새벽』의 후속작이다. 『오월의 미학 1』은 광주항쟁 당시의 기억에서 태동해 시대의 불의와 정당성에 맞서는 작품을 주로 다루며 민중미술의 탄생과 발전을 서술했다. 이 책에서 언급된 작가들은 이제 우리 화단의 거목이 되어 민중미술이라는 우람한 숲을 만든 산증인이 되었다. 저자는 1권에서 미처 다루지 못했던 작가 23인을 일일이 찾아 인터뷰하면서 그들의 예술 세계를 직접 들여다보고, 일반인들이 민중미술이라는 분야에 좀 더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즉 전문가들을 위한 전문 비평서가 아니라, 민중미술이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들에게 보다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안내하는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10년의 작업, 합본으로 집대성
화가는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감정, 신에 대한 신실한 마음, 사랑하는 상대에 대한 열정, 자신이 꿈꾸는 이상향 등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한 편의 그림으로 완성한다. 그들에게 그림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충실한 도구다. 동시에 이렇게 탄생한 그림은 보는 이들에게 저마다의 감정과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이 된다. 관객들은 한 편의 그림 앞에서 울고 웃고 용기를 내고 위로를 받는다.
하지만 그림이 역사 속에서 단순히 표현과 감상의 대상이 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정의롭지 않은 사회를 조롱하고 풍자하는 그림,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사회를 비난하는 그림, 다수에 의한 폭압을 고발하는 그림도 있다. 작금의 서울 모 서점 벽면에 그려진 작품이나 저항의 상징으로 알려진 세계적인 그래피티 작품들은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처럼 그림은 때론 해학과 풍자의 방법으로, 때론 사회와 권력에 대한 극단적인 감정을 표출하며 사람들을 일깨우고 선동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1979년 이후 독재에 대한 반작용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예술 운동이 일어났다. 이렇게 탄생한 ‘민중미술’은 광주민주화운동과 6ㆍ10민주항쟁 등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민중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위로하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았다.
『오월의 미학 2』는 1979년 이후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뜨거운 순간들을 한 필의 붓으로 그려낸 대표적 민중미술가 23인의 예술 세계와 작품을 정리한 책이다. 광주시립미술관 큐레이터인 저자는 저항 운동이 뜨거웠던 80년대의 순간들부터 지난 30년 동안 민중미술에 대해 연구하고 직접 전시를 기획했다. 이 책은 지금도 어둡고 습기 찬 작업실을 고통스럽게 지키면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만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예술적 삶을 걸고 붓을 잡고 있는 이 땅의 모든 민중미술가들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한, 작가의 뜨거운 애정의 결과물이다. 또한 이번 출간을 계기로 그동안 절판되었던 1권을 함께 출간, 합본으로 묶어 민중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집대성한 의미도 남다르다.
꺼지지 않은 촛불로 남은 오월의 미학
한국 민중미술은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자생적으로 발생한, 진정성 있는 한국 현대미술의 한 장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23인의 작가들은 형식 미학의 모더니즘과 자연주의 미술 등 서구 미학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당시의 미술계를 비판하고, 유신 독재와 광주 학살로 정권을 잡은 이들의 부당함에 대한 저항을 표현한 진보적 미술인들이다. 이 책에서는 대중에게 오랫동안 거칠고 투쟁적으로만 비쳤던 민중미술이 시대와 역사 속에서 어떻게 대응해왔고, 미술사적으로 어떻게 정리되었으며, 이후 자본주의와 환경, 생태, 인권 문제에 어떠한 입장을 취하며 진화해왔는지, 그리고 현재 어떠한 자취를 남기고 있는지에 대해 평가한다.
분단 70년을 일으켜 세운 야생미학의 송창, 일그러진 초상이 빚어낸 생명을 그리는 안창홍, 무거운 주제를 고독과 슬픔의 서정에 담아내는 한희원, 서슬에 새겨진 광주의 5월을 그림으로 녹여낸 하성흡 등 한국 민중미술사에서 큰 활약을 보인 작가들의 작품과 예술 세계를 보여준다. 또한 부록에서는 한국 민중미술사 연보를 통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민중미술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이렇듯 저자는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인 ‘5월 광주’의 관점에서 한국 민중미술을 바라보고, 그 연장선상의 시각과 미적 체험으로 한국 민중미술 주요 작가의 작품을 분석하고자 했다. 그리고 1980∼90년대 군부독재 정권에 쫓겨 숨어 다니고, 더러는 체포되어 고문받고 더러는 작품을 빼앗기며 독립군의 심정으로 투쟁했던 민중미술화가에 대한 깊은 애정과 격려를 담았다.
한국의 민중미술은 지난 40여 년 동안 사회, 정치는 물론 생명과 환경, 인권에 이르기까지 인간 사회와 관계의 문제를 예술에 이입해왔다. 사람들은 흔히 민중미술을 무서운 그림, 왠지 거북하고 어려운 작품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민중미술은 시대의 아픔을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한, 너무나 현실적이고 지극히 자유로운 예술의 한 장르이다. 세상이 주는 삶의 무게와 현실에 대한 고민을 온몸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민중미술가 30명의 삶과 예술작품을 통해 현재 내가 서 있는 곳이 아무리 힘들고 아프고 어려울지라도 그곳에서 희망과 사랑과 온기를 다시금 발견할 만한 여유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책 속으로
송창은 대학시절부터 ‘노동요’를 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하여 왔다. 시골의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농부의 애환과 한을 흥으로 전환하였던 민속놀이가 주제였다. 그러나 80년 이후 그의 예술관은 시대를 읽는 눈을 훈련시키면서 ‘예술이란 사회와 어떠한 관계를 갖고 접근해야 하는가? 즉, 예술과 사회는 어떠한 관계를 정립시켜야만 하는가? 그리고 동시대성을 어떻게 예술에 반영시킬 것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부의 격차에 대해 예술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새로운 예술관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1980년 5월 광주’가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화우들과 거듭되는 토론을 해가면서 이념적 논리를 세우던 시기에 같은 생각으로 고민과 토론을 하던 몇몇의 화우들과 함께 ‘임술년’(1982) 그룹을 결성한다.
그의 예술적 태도와 입장은 역사와 시대 앞에 진솔함으로 증언자가 되어야 하는 리얼리즘(realism) 예술론을 존중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비현실적인 상상력을 경계하며, 현실에 충실한 형상성을 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신만의 형상성을 이끌어 내는 것에 대하여 미술평론가 성완경 씨는 그의 첫 전시에서 “분단이라는 현실적 주제를 ‘냄새’로 그려 낸다.”라고 평하고, 이를 다시 미술평론가 이영욱 씨는 “놀라운 예술적 직관력을 드러내는 다른 측면으로 ‘냄새’라는 표현이 암시하는 분단의 생태학적 포착”이라고 규정하였다. 두 사람의 평가는 그가 역사와 시대를 읽어내고 주제를 마주하는 통찰력과 미학적 아우라aura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느껴진다는 의미로 읽힌다.
[분단 70년을 일으켜 세운 야생미학 · 송창: 25~26쪽]
1980년대와 90년대의 서울과 광주, 그리고 전국 주요 도시의 광장과 아스팔트 거리가 최루탄과 화염병으로 뜨겁게 달구어질 때, 그는 생계를 위한 삶의 현장과 비좁고 음습한 작업실을 오가면서 붓을 세워가며 투쟁하였다.
그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현재적인 모순의 반복과 정당치 못한 불공정의 악순환에 대한 실마리를 온당치 못했던 역사에서 주목하고, 역사를 거슬러 역 추적하는 탐구 활동은 ‘동학’에서 멈추었다. 이는 오늘의 삶이 결코 과거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이러한 예술적 화두를 마주할 때마다 밀려오는 두려움과 피해의식은 거친 호흡과 신음소리가 되어 붓끝에 모아진다.
구한말, 우리 근대사는 격동의 시간이며 사회?정치적 전환기이자 출발시점인 ‘동학’에 집중된다. 이러한 역사의 전환기에서 근대주의와 식민지문화를 극복하고자 하는 민중의 주체적 의식은 역사의 정당성으로 한 시대의 거대한 무덤이 되었다. 그리고 성공하지 못한 역사는 고스란히 민중의 고통으로 이어져 신음과 희생으로 점철되어 한탄의 강으로 남겨지고 말았다. 이렇게 근대의 출발이 ‘동학’이라는 고통으로 서막을 열게 되었다. 김재홍의 작품 〈근정전-혁명의 역사, 1994〉는 구한말 청치의 상징이자 민족의 심장부로 ‘동학’의 비운을 함축하고 있다.
[거인의 땅에서 역사의 우물을 긷다 · 김재홍: 39쪽]
박진화의 부친은 전남 장흥 안양면 농협조합장을 역임할 정도의 지도력으로 주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부끄럽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4남 1녀 중 2남으로 출생하여 고등학교까지 고향에서 학업을 마쳤다. 초등학교 시절, 외삼촌의 그림에 매료되어 모사를 시작하고 중?고등시절 미술 선생님의 관심 속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학창 시절에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었지만 체력도 약하고 내성적인 성격에 사교적이지도 못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미술선생님의 도움으로 늦은 밤까지 학교에 홀로 남아 데생과 수채 그림을 그려 미술대학에 입학한다.
1979년, 진보지식인 그룹에서는 한반도의 총체적인 문제는 분단과 계급에 관한 이념적인 논쟁을 시작점으로 보고 있었으나 그의 시점에서는 별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1983년경, 뒤늦게 ‘광주 5?18’에 관한 구전과 자료를 접하고 한국 근현대사와 분단의 질곡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는 이 시기 이후 점차 의식 있는 지식인이자 화가로 민중미술을 시작한다. 거칠고 어두운 그림으로, 현실사회와 역사비판을 예술이라는 무기로 적극적으로 작품제작을 했으나 진보미술계에서는 그에게 쉽게 존중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는 실망과 아쉬움으로 고향으로 내려가 수년간 칩거하다 다시 강화도에 정착하면서 거친 그림에 전념한다. 그의 그림은 분단의 무겁고 어두운 주제를 가슴에 묻어가며 강화의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며 임진강과 분단의 사유를 미학언어로 담아가고 있다.
[강화의 춤추는 꽃, 분단에 새기다 · 박진화: 61쪽]
그리고 이 시기, 기념비적인 회화적 성과를 올리게 된다.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가족사진〉과 1980년대 들어 작업한 〈봄날은 간다〉 연작은 과거 근현대사의 이름 없는 자들에 대한 기록으로, 개인과 그 가족에 집중한다. 사진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민중인 그들은 목숨을 내려놓고 항일운동을 했던 독립군이거나 그 가족들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군부 독재에 맞서 고문과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던 민주투사였거나 그 가족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역사와 시대의 중심에 서보지도 못하고 희생된 민중들이다.
이렇게 불안정한 역사의 피지배계급은 작품에 등장하는 사진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강한 이미지를 드러낸다. 양식적으로는 자그마한 사진 자체를 작품으로 활용하기도 하고, 사진을 캔버스에 확대한 후 탁월한 묘사력으로 회화적인 재구성을 했다. 오래된 사진 속의 인물은 눈을 검게 칠하거나 감고 있어, 영혼이 없이 맞닥뜨린 죽음을 이미 받아들였거나 또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역사를 망각하고자 눈을 감고 있다. 작품 속의 인물들에서는 현실의 고통과 궁핍, 슬픔과 아픔, 배고픔과 상실들로 이루어진 막다른 현실을 넘어서고자 비극의 삶을 초월하여 공존하기 위한 삶의 긴장감이 읽힌다.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의 예견된 죽음을 아무런 저항 없이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실이탈의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일그러진 초상이 빚어낸 생명 · 안창홍: 93쪽]
1980년 5월, 이명복은 서울에서 미술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모든 신문과 방송에서는 ‘광주는 북한군 진입과 폭도에 의한 소요사태’라고 했다. 언론보도가 모두 거짓인 줄 직감할 수 있었을 즈음 서울의 거리와 광장에서도 송화가루에 눈물을 섞어 날려 보내야만 하는 날이 많아졌다. 느글거림의 무거운 시절이었다.
그에게 광주를 방문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1980년 7월이 되어서야 광주 여행일정을 마련할 수 있었다. 광주의 금남로와 무등산에 올라가 본 인상은 죽은 유령의 도시, 침묵의 도시, 공포가 휩쓸고 간 도시로, 거리에는 시민의 활기가 없고 광주음식은 그의 혀끝에서 비린내로 다가왔다.
작품 〈그날 이후, 1983〉는 민중미술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작한 초기작품으로 당시 진보적인 지식인에게 관심을 끌었던 작품 중 하나다. 작품의 배경은 중학교 시절부터 지켜봐왔던 이태원의 탐욕이 넘쳐흐르던 거리에 미군과 어린 양공주가 있는 풍경이다. 시대를 바라보는 예리함과 상상력이 절제된 것은 역사로부터 강요받은 것이다. 이는 군부독재정권과 독점적 자본주의의 야합을 통해 체류하는 강대국의 군인에 대해 이름 없는 민초의 끊임없는 식민주의희생을 강요하는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이태원을 통한 시대의 어두움은 희망이 보이질 않는다. 다만 강대국의 힘과 자본주의의 깊은 그림자는 뼛속까지 침투하여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고통을 감내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결국 〈그날 이후〉는 이태원의 풍경을 그렸으나 단지 이태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태원을 통해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실, 몸에 새기는 문신처럼 끝없이 밀려오는 아픔을 견디어 내기를 요구받는 시대의 슬픔을 역사에 고발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을 시작으로 한동안 ‘그날 이후 연작’을 제작했다.
그는 ‘5월 광주’라는 주제에 시대를 살아가는 화가로 그 책무감이 자유롭지 않았을 것이다. 늦게나마 광주에 대한 기운과 인상으로 5월, 1990>을 제작했다. 태극기가 걸려 있는 화려한 방의 샹들리에는 무거운 그림자를 중첩시켰으며, 방의 두터운 콘크리트 외벽은 가시가 돋아 있다. 권력과 자본의 화려함을 화면의 중앙에 배치하고, 하단에서 죽은 자는 총검에 심장이 찔렸고, 늑대 3마리는 뼈가 남을 때까지 주검을 처리하고 있다. 그리고 어둠속의 어린이는 이러한 광경을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다. 작품에서 진회색 톤의 무거움과 황금빛의 대조는 극한 상황을 설명하고 ‘5월 광주’라는 상징적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다만 작품에 광주의 형상은 깊숙한 곳에 묻어둔 채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담았다고 본다.
[이름 모를 바람에 남겨진 생명의 흔적 · 이명복: 128~130쪽]
이러한 사회상황을 주시하면서 노동운동을 시각매체운동으로 확산시켜가던 중 1989년 7월, ‘임수경의 평양축전’을 놓치지 않고 5년간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제작했다. 1990년대 대표작인 〈분단의 기억〉은 44년 만에 남북통일의 씨앗을 뿌린 사건으로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대형 캔버스 중앙에 ‘임수경’ 양과 ‘문규현’ 신부를 중앙에 배치하여 한국현대사에 존재해 왔던 주요사건의 상징적 이미지를 담아내었다. 그리고 6.25 전쟁에 고아가 된 소년, 광주 5.18의 계엄군과 아버지의 영정을 든 어린이, 6.10 항쟁의 화염병과 경찰, 김재규, 4.3 제주양민 학살, 삼청교육대 등 과거 부당한 권력의 역사적인 사건을 서술적으로 나열했다. 또한 그 이미지는 같은 화면에 사실적인 정밀묘사방식의 인물재현도 있지만 각 시대의 주요 사건을 투박한 선으로 그린 거친 형상도 있어 크게 대비되면서, 색상도 붉은 색상과 푸른색, 그리고 진회색으로 톤을 이루고 있다. 동일한 화면에 서로 상반된 이미지의 병합과 교차로 격렬했던 긴장감과 함께 시각적 효과를 높인 것이다.
작품 〈분단의 기억〉은 한반도 분단이라는 무거운 시대 상황과 통일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담아내기 위해 부당한 권력의 폭력을 함께 녹여냄으로써 더욱 굳건하게 다가온다. 이렇듯 주제를 담아내는 방식을 ‘환유법’이라는 문학적 표현기법을 인용하여 시각화한 것은 독창적이고 성공적인 화법이라 볼 수 있다.
[시대에 맞선 붓 끝은 신자유주의를 해명하다 · 김영진: 245~246쪽]
황영성의 어린 시절은 한국동란으로부터 출발한다. 6?25 동란은 칠흑의 두려움과 잔혹함, 그리고 이념전쟁으로, 그는 고향 강원도 철원과 부모님을 뒤로하고 어린 두 동생과 함께 1?4후퇴 때 남으로 내려온다. 그의 나이 10살이었다. 이렇게 그는 한국현대사의 고통과 함께 출발한 불운한 시대의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세상을 마주해야 했다. 그는 동생들과 서울의 친척집에 잠시 기거하다 광주로 내려와 전쟁고아로 고아원에서 생활하며 중학교까지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진학은 포기하고 ‘광주사범’에 입학하여 초등학교 선생을 꿈꾸었고, 그림 그리기가 즐거워 미술반 활동에 열중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처음 부임한 ‘영등포초등학교’ 시절, 조선대학교의 ‘임직순 교수’를 숙명적으로 만나게 된 것은 큰 전환점이 되어, 조선대학교수로 정년퇴임한 이후 오늘까지 작품생활을 하게 되었다. 40여 년 동안 대학에서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며 체험했던 예술에 이념적으로 고통받거나 착오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그의 노력은 한국미술계 곳곳에 훈훈한 교훈으로 남는다.
예술에는 작가의 삶과 인품이 어떠한 유형으로든 고스란히 담겨 있어 거울이자 시대정신이며 정서인 것을 증언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바라보면 그의 예술에서는 삶과 인품의 체취가 묻어나기에 그가 살아왔던 시대의 미적 정서를 읽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예술은 시대가 바뀌어도 존중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의 예술세계는 인품에서 우러난 따뜻한 가족 공동체가 주제이고, 그러한 세계관을 확장시켜가는 미학어법으로 작품 활동을 해왔다. 그리고 마르지 않는 샘처럼 그의 조형성을 계속 변화 발전시켜 왔다. 매너리즘이라는 단어는 그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으며 항상 청년작가의 정신으로 새로운 재료와 조형언어를 변화시켜 온 것이다.
[광주 정신, 사랑과 생명의 자유로운 미학 여행 · 황영성: 308~309쪽]
하성흡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아픔으로 새겨진 ‘5월 광주’의 현장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책무감은 그를 끈질기게 따라 다녔다. 특히 ‘광주민주항쟁’ 20주기(2000년) 이후 기념이 되는 해에는 더욱 충동이 심했을 것이다.
매년 5월 관련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간헐적으로 작품을 남기긴 했으나, 특히 그가 목도한 도청 앞의 발포가 시작되었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다. 그는 야심찬 〈1980년 5월 21일 발포〉라는 명제의 대작을 연이어 제작(2010, 2017)한다. 도청 앞에 대치 중인 공수부대와 시민 시위대, 그리고 군인들의 총기 난사로 아스팔트에 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시민, 하늘에서는 헬리콥터가 총기를 난사하고 삐라가 뿌려지고 있다. 도청 주변 곳곳은 화염에 싸여 있고 건물 옥상에는 총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금남로 시위자들과 함께 급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는 이렇게 급박한 발포 현장의 상황을 사실대로 기록했다.
〈1980년 5월 21일〉 연작을 비롯한 거의 모든 작품도 대작 중심의 ‘부감법’으로 제작되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더 넓게, 그리고 더 멀리 바라보고자 하는 그의 강렬한 의지를 드러내는 세계관이자 예술관이다. 그는 시대를 읽고 관통하는 날카로운 예지력으로 세상을 열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수묵화는 특성상 어려운 예술 양식이다. 대학에서 올곧게 전공을 해도 계속해서 필법과 먹을 익혀가야만 한다. 이러한 수묵화는 80년대 후반에 들어 서서히 미술시장에서 밀려 점차 외면받아 전업화가에게는 어려움이 커져갔다. 민주화의 열풍과 함께 자본의 논리와 포스트모던 예술 이념은 무차별적으로 우리의 생활 깊숙하게 자리하면서 수묵화 양식은 미술시장의 진부함으로 치부되었다. 시대의 문화적 정서변화라고 이해하더라도 우리 선조가 남긴 전통의 가치이자 정신이요 삶의 자취를 우리 스스로가 외면하는 꼴이 아니던가? 우리 자신의 문화적 주체성과 자존감이 부족한 일면을 스스로 드러내는 문화사대주의의 부끄러운 민낯일 것이다.
[서슬에 새겨진 5월의 증언들 · 하성흡 327: 339~3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