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아가면서 한두 명의 스승을 만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할 거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두 분의 스승을 만나서 섬기고 배울 수 있었으니 아마도 매우 축복받은 행복한 삶을 이끌어왔다고 말할 수 있다.
신촌에 있는 정석해 선생님의 한옥에 매주 한 번 가서 골방에 마주앉아 여러 사상가들의 사상에 관해 담론했다. 햇수로 9년간 둘만의 세미나가 계속되었고, 가끔 병원으로 가는 언덕길을 따라 둘이 산책했다. “책을 너무 많이 읽지 말게나. 나는 책을 너무 많이 읽다보니까 아무것도 쓰지 못했네. 그 대신 많이 생각하게나.” “네, 벌써 선생님과의 인연이 9년이네요. 세월이 낙엽 지듯 빠르네요.” “허허, 그런가? 나처럼 칠십을 넘어보게. 세월은 책장 넘기듯 빨리 흘러간다네.” 스승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푸르른 가을 하늘을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쓴다. 이런 내 행동은 꽤 오래 계속되었다. 그것은 철학하는 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철학이라는 껍질을 쓰고 있지만 내 일상의 행동은 삶의 날갯짓이고 내가 걸어가는 발자국의 연속이다. 내 삶의 발자국은 히나야나(Hinayana, 작은 수레)와 마하야나(Mahayana, 큰 수레)의 두 수레를 하나로 만들려는 노력이며 현실과 이상의 거리를 줄이려는 끊임없는 시도다.
독일 뷔르츠부르크 시내의 레지덴츠에서 나는 또 한 분의 스승 베를링거 선생을 만나 햇수로 6년간 모시고 배울 수 있었다. 날씨 좋으면 선생과 꽃이 만발한 레지덴츠 정원을 산책했다. “바람이 참 향기롭지?” “예, 꽃들이 활짝 피었습니다.” “나이가 칠십이 넘었는데 늙어 보이지?” “이 나무는 이백 살은 되었을 텐데 아주 튼튼하네요.” “하하! 우리는 철학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그저 인생을 즐기는 놀이꾼들이야! 자네, 고국으로 돌아가지 말고 나와 함께 여기서 오래도록 놀이꾼으로 놀이나 할 생각 없는가?” “고향에 가야지요. 가서 보다 더 진지한 놀이를 해볼 겁니다.”
두 스승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시고 지금 나는 현기증 나는 세월의 수레바퀴를 돌리면서 여전히 철학이라는 껍질을 뒤집어쓴 채 히나야나와 마하야나의 덜컹거리는 마차를 번갈아 탄다. 정년퇴직이라는 말이 침울한 모습으로 내 뒤를 바짝 따라붙는다. 이제부터는 교수가 아니고 명예교수이며 시간강사다. 철학이라는 딱딱한 껍질을 벗어던질 때가 되었다. 이제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바람부는 대로 발길따라 삶의 흔적을 그리리라 마음먹지만 그리 쉽지는 않으리라. 이러한 껍질철학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그대로 남아 마르크스와 니체와 프로이트를 함께 묶어 구경거리를 만들어보았다. 이들 20세기 3대 혁명적 사상가를 들먹인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의 얼굴과 우리 얼굴을 단 한순간이라도 제대로 보자는 목적의식에서 생긴 것인데….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 8월까지 건국대학교 철학과교수를 역임했고,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 프랑스 슈트라스부르대학 교환교수를 지냈다. 건국대 문과대학장, 부총장을 역임했다. 현재 중국 서안의 서북대학교 객좌교수이고 한국니체학회회장이다. 주요저서로 [청소년을 위한 철학 에세이][바보와 천재][니체와 정신분석학][헤겔][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이야기][기독교 신비주의철학]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