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다양한 문학적 현상들은
다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비판을 요구하고 있다”
대산문학상 수상작 『길 찾기, 길 만들기』 이후
10년 만에 펴낸 황광수 평론집
끝없이 열리는 문들
비평적 개입을 통해 ‘확장’과 ‘심화’의 지향과 다양한 작품들의 독서에서 발생하는 감각과 의식의 확산을 하나의 운동성으로 수렴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책 소개
“우리 시대의 다양한 문학적 현상들은 다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비판을 요구하고 있다”
대산문학상 수상작 『길 찾기, 길 만들기』 이후 10년 만에 펴낸 황광수 평론집
꽤 오랫동안, 하나의 화두가 간간이 거북한 체증처럼 의식되곤 했다.
리얼리즘 논쟁의 끝자락에서 결론처럼 제시된 ‘확장’과 ‘심화’가 그것이다.
그 주역들은 어디론가 떠나버렸는데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던 나는
그들이 남긴 표지 앞에서 하염없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어떤 때에는 그것이 종착역의 기표처럼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그쪽 방향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낯선 징후들이 문학의 지평에 나타나 끝없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길 떠날 채비를 갖추어야 했다.
라캉이 ‘근원적 환상’이라고 부른 것을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나 자신의 시각을 확장하지 않고서는 낯선 징후들과의 소통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찬바람처럼 끼쳐왔다.
「책머리에」 중에서
2004년 평론집 『길 찾기, 길 만들기』로 대산문학상(평론부문)을 수상했던 문학평론가 황광수가 10년 만에 세번째 평론집 『끝없이 열리는 문들』을 펴냈다. 민중서관, 을유문화사, 지식산업사, 한길사 등의 출판사에서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편집 일을 하며 항상 문학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고, 한국작가회의 편집위원장, 문화정책위원장, 민족문학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며 충실한 현장비평으로 정평이 난 저자는 이번 평론집 『끝없이 열리는 문들』에서 첫번째 평론집과는 다른, 뚜렷한 시각적 차이가 존재함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동안 저자의 비평이 (단순히 말해) 역사변혁 주체의 시각을 요구한 것이었다면, 이번 평론집에서는 작품 속에 세계와 맞닿아 있는 접촉점 또는 접촉면들에 좀더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며 다채롭게 펼쳐지는 작품들을 그 자체의 미학으로 접근하는 쪽으로 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변화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복잡하고 중층적인 세계에 맞서는 정신적 모험이 고스란히 담”긴 김정환의 장시 세 편이었다. 또한 저자는 이 시들로 인해 오래 묵혀두었던 원고들을 수습하여 평론집을 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끝없이 열리는 문들』은 저자가 ‘확장과 심화’의 사례를 탐색하며 자신의 비평논리를 가다듬는 10년 동안의 문학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고민을 담아 완성한 평론집으로, 글쓰기와 문학 전반에 걸친 쟁점을 비롯해, 시와 소설에 관한 글들이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카오스적인 세계를 관통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모험
이 시집은 형식과 내용 면에서,
그리고 이 시대의 문학예술이 생각조차 하기 싫어하는 ‘총체성’을
그 자신의 몸으로 드러내며 우리 시문학의 영토를 한껏 넓혀놓았다.
마루 밑의 벌레 한 마리나 비루한 일상적 요소들이 남루를 벗고
거룩함으로 떠오르는 가없는 도정은 오디세우스의 항해보다 광대하다.
화자는 귀를 막기는커녕 사이렌의 노래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에 잠재해 있는 소리들까지 온전하게 ‘노래 속’으로 수습해간다.
이렇게, 시인은 상징계의 질긴 그물망을 찢고
절망적으로 천박하고 왜소해진 우리의 의식이 거할
새로운 세계를 건설했다.
「거룩함이 흐르는 ‘노래 속’」 중에서
시와 소설에 관한 저자의 10년 동안의 흔적을 이 책에서 총 4부로 나누어 담고 있는데, 그중 전체 분량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제1부는 김정환의 장시 세 편에 대한 비평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가 자신의 “시각을 확장하지 않고서는 낯선 징후들과 소통하기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느끼며 ‘끝없이 열리는 문들’ 속으로 들어가보고 있을 때, 그 옆에는 “든든한 길동무” 시인 김정환이 있었다. 김정환이 5년여에 걸쳐 출간한 장시 세 편은 저자로 하여금 한동안 그의 시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했다. 유년의 경험과 오래된 식민지성에 대한 새로운 역사의 창조(『유년의 시놉시스』), 다양한 경험 요소들을 노래 속으로 끌어안으며 불어넣은 거룩함의 숨결(『거룩한 줄넘기』), 감각의 총체성으로 깨트려버린 이분법적 통념(『드러남과 드러냄』) 등 그 시들은 저자를 “가없는 모험” 속으로 이끌며 방대한 분량의 글을 쓰게 했다. 이처럼 “카오스적인 세계를 관통하는 자유로운 영혼”과 함께한 모험이 이 평론집의 제1부로 자리하게 되었다. 또한 이 장시들은 저자가 새로운 비평논리의 관점을 찾아가는 데 밑바탕이 되었고, 새로운 비평을 위한 저자의 행로가 이어진다. 이는 제2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평은 다른 미래를 실천하는 선택이다!
우리 문학이 관심을 기울여온 두 가지 문제의식이 따라 나온다.
하나는 사회적 현실로부터의 도피 또는 귀환에 관한 담론인데,
그것은 이제 작가가 현실과의 관계를
얼마나 긴장되게 유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로 치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환상에 이끌려 사회적 현실에서 벗어날지라도
그것에 대한 긴장의 끈을 놓아버리지 않는 한
거기에는 새로운 의미를 띠고 (달라진) 현실로 귀환활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문제의식은, 지난날 리얼리즘 논쟁에서 제기된
‘확장과 심화’에 대한 요청을 현재의 작품들에 투사해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의식은 결국 '현실'에 본래의 중층적 지위를
되돌려주려는 일과 관련될 수밖에 없다.
「현실의 퍼스펙티브와 새로운 서사」 중에서
위 인용문은 저자의 비평적 시각이 변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적절한 예이다. 고유명사로서의 문학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즉 다양한 층위와 범주들과 결부된 복수의 문학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과 함께, 랑시에르가 말하는 고유명사의 ‘문학’이 다소 협소한 철학적 가설에 지나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저자의 머릿속에서 생겨난 듯하다. 이런 생각과 더불어 저자는 “문학적 현상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창작 활동의 전 과정을 추동하는 에너지는 비평의식의 개입을 통해 ‘파장과 순환’의 회로 속에 놓이게 될 때 텍스트적 기능을 좀더 온전하게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저자는 자신의 생각에 대한 도정의 지도를 그리며 비평적 태도를 재정립해가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노력과 사유의 흔적―새로운 문학적 시도의 시발점으로서 의미를 가지는 글―들이 제2부에 담겨 있다.
시와 소설, 중견 작가와 젊은 작가를 모두 아우르는 문학평론의 결정체
이처럼 저자가 자신의 비평적/문학적 태도가 변화됨을 느끼며 시와 소설에 관해 쓴 글들이 제3부와 제4부에 실려 있다. 그 글들은 문학사적 입장에서의 “거시적 성찰”보다는 작품에 따른 개별적 분석을 토대로 나름의 문학성을 성찰하고 있다. 제3부와 제4부에 실린 시 비평과 해설, 소설 비평과 해설이 그 결과물들이다. 또한 이 글들은 “새롭게 열리는 문들로 들어서며 머뭇거린 주저의 몸짓들과 포기할 줄 모르는 진정성들이 빚어낸 성과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있다.
백석, 설정식, 황석영, 조정래, 김훈, 이문구, 윤후명, 윤흥길, 임철우, 김초혜, 신대철, 오수연, 이재웅, 홍명진, 고운기, 손필영, 홍새라, 신용목, 구병모, 김지우, 서성란 등을 비롯해 인천 작가 공동소설집까지, 제3부와 제4부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수많은 작가와 작품의 면면을 보면 저자의 비평 활동이 얼마나 다양하고 폭넓은지 알 수 있다. 시와 소설, 중견 작가와 젊은 작가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평론가가 지금 현재 시점에서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평론집에서 시와 소설, 중견 작가와 젊은 작가 등 최근 10년 동안의 문학 작품과 작가 전반에 대해 폭넓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현재 문학평론의 수준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지점이 ‘여기’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