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경 시몬 베유는 한 편의 글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유럽 대륙에 불길한 전쟁의 기운이 감돌던 시점에 쓴 이 글은 뜻밖에도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서사시를 다루고 있다. 시몬 베유의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논고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가 바로 그 글이다.
리시올 출판사는 이제까지 국내에 번역된 적 없는 베유의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를 처음 번역 출간한다. 이 글에서 베유는 독창적인 방식으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해석한다. 그가 보기에 이 서사시의 진짜 주인공이자 중심 주제는 위대한 영웅들이 아니라 힘이다. 베유는 힘의 논리에 입각해 『일리아스』를 읽고 이 서사시가 전쟁의 차가운 잔혹성과 공평성을 서구 역사상 그 어떤 작품보다도 선명하고 생생하게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베유에게 이 시는 여러 형태의 순수한 사랑을 그림으로써 사람들이 힘의 포획에서 벗어나 영혼을 지니게 되는 “그 짧고 신적인 순간”을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은 또 베유의 미완성 원고 「마르크스주의적 독트린은 존재하는가」를 함께 수록하고 있다. 중력과 은총의 대립으로 잘 알려진 베유의 사고 체계는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에서 힘과 거기서 빠져나오는 은총의 대립으로 형상화된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적 독트린은 존재하는가」에서 이 대립은 베유가 마르크스주의 사고의 약점으로 지적하는 필연성과 초자연적인 것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두 글은 『일리아스』와 마르크스라는 상이한 대상을 다루지만 힘과 필연성, 전쟁, 은총 등의 주제를 중심으로 동일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힘과 권력이 숭배되고 힘의 격차는 나날이 벌어지는 오늘날 힘과 필연성, 불행, 선, 은총, 주의(관심), 교육 등에 대한 그의 성찰은 우리에게 사고와 태도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이 새로운 번역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오해받았거나 잊혔던 시몬 베유의 생각들을 더 체계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문제들에 그가 어떤 도전을 제기하는지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