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시서스호의 검둥이(The Nigger Of The "Narcissus": A Tale Of The Forecastle by Joseph Conrad)(1897)는 대표작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1899)을 비롯해 ‘린가드 3부작(Lindard Trilogy)’ 섬의 추방자(An Outcast of the Islands)(1896), 올마이어의 어리석음(Almayer's Folly: A Story of an Eastern River)(1895), 구조(The Rescue: A Romance of the Shallows)(1920)와 같은 장편소설은 물론 에세이와 대본까지 서른 권 이상을 출간한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의 영국 작가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1857~1924)의 장편소설입니다.
관습적인 표현인가, 인종차별인가? : 책 제목의 검둥이(Nigger)란 인종차별적인 표현은 출간 당시는 물론 현대에 이르러 논란이 되었고, 이 때문에 출판사는 미국판과 개정판(2009) 등에서 바다의 아이들(The Children of the Sea), 바다 이야기(A Tale of the Sea), 나시서스호의 N단어(The N-Word of the Narcissus) 등으로 순화(?!)하여 출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화제성과 별도로 나시서스호의 검둥이(The Nigger Of The "Narcissus")(1897)는 책 제목으로 인한 논란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측면이 있다고 평가될 청도로 조지프 콘래드의 초기작과 중기를 구분 짓는 분기점(the start of Conrad's major or middle period) 혹은 최고의 초기 작품(the best work of his early period)으로 평가받는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주인공 제임스 웨이트(James Wait)는 인도 런던에서 영국 런던으로 향하는 상선 나시서스호(the Narcissus)에 탑승한 서인도 출신의 흑인 선원입니다. 한 사회의 축소판인 고립된 배란 공간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궂은 일을 해야 하는 처지입니다만, 그는 열심히 일하기는커녕 결핵(tuberculosis)에 걸려 생사를 오가는 얄궂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나시서스호는 아프리카 대륙 남단의 희망봉(Cape of Good Hope)을 지날 무렵 강풍으로 인해 선체가 물에 잠지고 적잖은 수하물을 잃는 위기에 처합니다. 가까스로 배를 수습한 일행은 항해를 재개하지만, 끼니조차 채울 수 없는 상황에서 선원들의 불만은 고조됩니다.
백인 선장 알리스토운(Captain Allistoun)과 백인 선원 싱글톤(Singleton)은 항해 초반에는 웨이트에게 별다른 관심조차 갖지 않았으나, 선원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다다른 최악의 시점에 이르러서야 선장은 그가 힘든 일을 피하기 위해 웨이트가 꾀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챕니다!! 실제로 웨이트는 자신이 아픈 것보다 좀 더 과장하고 있음을 돈킨(Donkin)이란 동료에게 고백하기도 했죠.
뒤늦게나마 열심히 일하겠다는 웨이트에게 일을 주지 않는 선장! 그러나 선장의 예상과 달리 나시서스호는 선장의 결정을 지지하는 세력과 웨이트를 동정하는 세력으로 양분되는데...?! 혼란한 상황에서 웨이트는 실제로 상태가 악화되었고, 불길한 일만 가득한 항해에서 선원들은 그가 죽어야 순풍이 불거란 근거 없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과연 혼돈의 나시서스호는 무사히 런던에 도착할 수 있을까요? 주인공답지 않은 우리의 주인공 웨이트는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영어고전(English Classics)과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문학여행을! B
TO MY READERS IN AMERICA. From that evening when James Wait joined the ship?late for the muster of the crew?to the moment when he left us in the open sea, shrouded in sailcloth, through the open port, I had much to do with him. He was in my watch. A negro in a British forecastle is a lonely being. He has no chums. Yet James Wait, afraid of death and making her his accomplice was an impostor of some character?mastering our compassion, scornful of our sentimentalism, triumphing over our suspicions.
미국 독자들에게. 제임스 웨이트가 선원 모집에 늦은 그날 저녁부터 항구를 통해 돛대에 싸인 채 우리를 외해로 떠나보내는 순간까지 저는 그와 많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는 내 감시 하에 있었어요. 영국식 창고에 있는 흑인은 외로운 존재입니다. 그는 친구가 없어요. 하지만 제임스 웨이트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녀를 공범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동정심을 지배하고 우리의 감상주의를 경멸하며 우리의 의심을 이겨내는 어떤 성격의 사기꾼이었습니다.
But in the book he is nothing; he is merely the centre of the ship's collective psychology and the pivot of the action. Yet he, who in the family circle and amongst my friends is familiarly referred to as the Nigger, remains very precious to me. For the book written round him is not the sort of thing that can be attempted more than once in a life-time. It is the book by which, not as a novelist perhaps, but as an artist striving for the utmost sincerity of expression, I am willing to stand or fall. Its pages are the tribute of my unalterable and profound affection for the ships, the seamen, the winds and the great sea?the moulders of my youth, the companions of the best years of my life.
그러나 책에서 그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단지 배의 집단 심리의 중심이자 행동의 중심일 뿐입니다. 하지만 가족이나 제 친구들 사이에서 흑인으로 불리고 있는 그는 저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에 대해 쓴 책은 일생에 한 번 이상 시도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설가로서가 아니라 표현의 진심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 노력하는 예술가로서 제가 기꺼이 서거나 쓰러질 수 있는 책입니다. 이 책들은 배, 선원, 바람, 그리고 큰 바다에 대한 저의 변함없는 깊은 애정을 기리고 있습니다. 제 젊음의 제작자이며 제 인생의 전성기의 동반자입니다.
After writing the last words of that book, in the revulsion of feeling before the accomplished task, I understood that I had done with the sea, and that henceforth I had to be a writer. And almost without laying down the pen I wrote a preface, trying to express the spirit in which I was entering on the task of my new life. That preface on advice (which I now think was wrong) was never published with the book. But the late W. E. Henley, who had the courage at that time (1897) to serialize my “Nigger” in the New Review judged it worthy to be printed as an afterword at the end of the last instalment of the tale.
그 책의 마지막 말을 쓰고 난 후, 저는 그 과제를 완수하기 전 감정의 역겨움 속에서, 제가 바다와 끝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이후로 저는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펜을 내려놓지 않고 서문을 썼습니다. 제가 새로운 삶의 과제로 들어가는 정신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조언에 대한 서문은 책과 함께 출판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시(1897년) 제 "검둥이"를 뉴 리뷰(New Review)에 연재할 용기가 있었던 고(故) W. E. 헨리는 이 책이 이야기의 마지막 회에 후문으로 실릴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