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의 공동체를 담아내는 문화란 무엇인가
사회의 우여곡절을 문화의 눈으로 들여다보다
◎ 도서 소개
격조 있는 문화적 시각으로 바라본 대한민국의 문학, 예술,
그리고 우리 문화의 세계화
문학의 여러 장르 가운데 ‘비평’이란 부분에 대해 회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문학 작품이 그 상태대로 독자를 만나면 오롯이 작가와 독자의 대화가 이루어지는데, 중간에 문학평론가가 끼게 되면 본래 문학이 가지고 있는 형질이 변형되어 버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 이러한 회의론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문학 작품이 숲속에서 길을 잃거나 독자가 길을 잃어버리게 되면 중간에 둘을 이어주는 거간꾼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도 문학평론은 최소한의 존재의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평론가 김종회의 『문화의 푸른 숲』은 그런 의미에서 뜻깊은 책이다. 독자들이 접하고 싶어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작품들을 친절하게 한 군데 모아 두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돋보인다. 게다가 한국 땅에서 자주 접하기 어려웠던 미주 문인들의 작품에 상당량을 할애하여 이 책에 수록했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 땅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만으로 한국문학을 이해해 보려는 대다수 독자들에게 시야를 넓혀 준다는 측면에서도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김종회는 이미 한국 문단에서 30여 년간 탄탄한 입지를 다져온 문학평론가이기에 그의 시각이나 문장 등에 토를 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평론집은 몇 가지 짚고 넘어갈 만한 흥미로운 점들이 있다. 평론들은 대개 그 대상이 되는 원전보다 난해한 것이 일반적이다. 원전을 독자에게 인도하고, 독자를 원래 문학작품에 한 발 더 가까이 이끄는 것이 문평의 역할일진대, 우리 문학평론은 평론을 위해 문학작품을 무자비하게 ‘이용’만 하는 경향이 농후했다. 그러나 김종회는 기존의 문학 평론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마치 일반인들이 어느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망설인다면 『문화의 푸른 숲』은 푸근한 복덕방 영감님처럼 독자와 작가를 편안하게 이어준다. 고압적이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문화의 푸른 숲』은 고마운 존재다.
또 하나, 우리의 평론들이 대체적으로 무미건조하고 날카로운 문체로 작품을 난도질하고 작가를 구경꾼처럼 만드는 것이 다반사이지만, 김종회의 문장은 의외로 품격 있고 따뜻하다. 그 독특한 문장이 작가와 독자 양측에 모두 편안한 즐거움으로 서로에게 다가서게 하고 있다.
김종회의 『문화의 푸른 숲』은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문학 평론은 차갑고 어려운’ 문학의 한 분야라는 고정관념을 바꿀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문학비평의 본령인 독자와 작가를 더 친밀하게 하는 비평서를 만나는 마음이 얼마나 더 행복하고 즐거워질 수 있을지 우리 모두 가늠해 보기를 권한다.
◎ 책 속에서
국제교류재단에서 계획한 한국문학선집-소설 2권의 출간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다. 특히 한국 현대사회의 내면 풍경을 담은 단편소설 20편을 상·하권으로 나누어 상재하게 되었으니 이 소설들을 읽는 일이 한국과 한국문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어떤 장황한 설명보다도 더 명료한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설은 구체적인 담론을 서술함으로써 그 시대와 사회를 반영하며, 생동하는 인물의 묘사와 이야기의 재미를 통해 독자와 가장 용이하고 친숙하게 만날 수 있는 장르적 특성을 지녔다. _14~15쪽
그런데 「소나기」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이야기의 줄거리가 아니다. 간결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속도감 있는 묘사 중심의 문체가 우선 작품에 대한 신뢰를 움직일 수 없는 위치로 밀어 올린다. 정확한 단어의 선택과 그 단어들로 이루어진 문장이 읽는 이에게 먼저 속 깊은 감동을 선사할 수 있다는 범례를 우리는 여기서 볼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은 단 한 차례도 글의 문면을 따라가는 이에게, 토속적이면서도 청신한 어조와 분위기 밖으로 나설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기·승·전·결로 잘 짜인 플롯의 순차적인 진행을 뒤따라가는 일만으로도, 문학이 영혼의 깊은 자리를 두드리는 감동의 매개체임을 실감케 한다. _28쪽
나림의 소설은 장대하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유장(悠長)하게 풀어 나가는 데 특장이 있다. (…)
오랫동안 그의 소설들과 더불어 살아온 필자의 시각에는, 그 소설들이 역사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줄기의 형용으로 양립되어 있다고 인식된다. 『관부연락선』·『지리산』·『산하』 같은 한국 근·현대사 소재의 3부작과 『바람과 구름과 비』 또는 『그해 오월』 같은 작품은 웅장하고 견고한 역사성의 성채와 같다. 그런가 하면 『낙엽』·『허생과 장미』·『행복어사전』 같이 시대와 사회 속에서 구체적인 삶을 엮어가는 이들의 디테일한 담화들은 다채롭고 윤기 있는 대중성의 모형을 이룬다. 이 양자를 기축(基軸)에 두고 나림의 문학은 한껏 그 날개를 펼쳐 비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의 산문들이 탐사하는 철학과 사상, 인문주의의 식견은 그것대로 또 하나의 괄목할 만한 획을 이루고 있다. _33~34쪽
영화 제목 ‘말모이’는 ‘우리의 말과 마음을 모은다’라는 뜻으로, 그 정치적 혹한의 시기에 조선어학회가 편찬하고자 했던 사전의 이름이자 사전에 수록될 말을 모으는 운동이었다. 영화 밖 실제의 의미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으로, 주시경 등이 1910년 무렵에 조선광문회에서 편찬하다 끝내지 못한 사전’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1957년, 조선어학회가 여섯 권으로 완간한 〈큰사전〉의 원고가 이 ‘말모이’였다. 우리나라 사람이 편찬한 최초의 국어사전은 1938년 문세영의 〈조선어사전〉인데, 그 이후 지금까지 1999년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비롯한 여럿이 있다.
오늘에 와서는 남북한이 함께 편찬하는 〈겨레말큰사전〉이 진행 중이다. 이는 국가의 공식적인 지원을 받고 있으니, ‘말모이’가 당대의 극단적인 탄압과 희생을 감수한 데 비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형국이다. 영화 속 탄압은 우리말이 점점 사라져 가던 1940년대 경성을 무대로 하고 있으니 당연하다. _63쪽
해외의 다른 나라에서 우리말이 사용되고 또 그 말로 문학작품이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곳은 크게 네 군데가 있다. 이른바 ‘한민족 문화권 문학’이라고 불리는 그 해당 권역과 문학은 미주 한인문학, 일본 조선인문학, 중국 조선족문학, 그리고 중앙아시아 고려인문학이다. 여기에 남북한의 문학을 더하여 6개 권역인데 공교롭게도 이는 북한 핵문제 협의체인 ‘6자회담’과 지역적 기반이 거의 일치한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하여 문화적 기반과 정치적 기반이 유사하다는 것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 힘의 충돌이 있다는 논리를 가능하게 하는 대목이다. 필자는 남북 간의 대화가 어려울 때 이 민족적 울타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의미에서 오래 전부터 ‘2+4시스템’이란 전문용어를 사용해 왔다.
이 디아스포라란 어의(語義)의 핵심은 타의에 의해 고향을 떠났다는 것이다. 한국의 월남 실향민을 두고 ‘1천만 이산가족’이란 표현을 쓰는 것은, 6·25동란을 거치면서 북한의 고향을 떠나 남한에 가호적 신고를 한 5백만 명의 실향민이 북한에 그만큼의 가족을 남겨두었다는 뜻이다. _100~101쪽
그런데 여기 하이쿠를 넘어설 하나의 문학사적 변혁이 시작되었다. 한국문학사에 새로운 문예장르가 탄생한 사건이다. (…) 15년 전 이 지역에서 시작된 ‘디카시’가 삼남 일대와 한국을 넘어 세계무대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세계적 확산을 보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문예장르에 있어 전자매체 영상문화 시대의 새로운 예술형식을 담보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디카시는 디지털 카메라와 시의 합성어이며, 우리 시대에 누구나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으로 순간포착의 영상을 확보하고 거기에 두세 줄 촌철살인의 시적 언어를 덧붙이는 것이다. 동시에 이를 그 동호인 그룹 상호간에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현장성과 속도감을 갖는다.
이 새 시문학은 이제 미국, 중국,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한글로 활발하게 창작됨으로써 또 하나의 한류를 이루고 있다. 디카시라는 용어가 국립국어원에서 공식적인 문학용어로 인정되었고, 여러 곳의 교과서에 실리고 있다. 경향 각지의 문학제에서 공모전이 시행되는가 하면 계간 〈디카시〉를 비롯한 디카시집의 발간도 줄을 잇는다. 남녀노소 누구나 영상과 시적 언어의 조합을 즐거워 할 수 있고 이를 쉽게 공유할 수 있으니, 문학이 일상이 되고 일상이 문학이 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올해 안으로 한국디카시인협회도 결성된다는 소식이다. 가장 큰 과제는 하이쿠의 문학적 수준을 능가하는 예술적 성취를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앞으로 큰 기대와 더불어 그 추이를 예의주시 해보려 한다. _129~130쪽
쉬지 않고 높은 산을 오를 수는 없다. 개별의 사람이나 공동체나 쉬면서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구상하는 과정을 갖지 못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갖기 어렵다. 일본의 혼다 기업 창업자 혼다 쇼이치로는 “휴식은 대나무에 비유하자면 마디에 해당한다”고 했다. 마디를 맺어가며 성장해야 키 큰 대나무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기업도 중간 중간에 쉬는 구간을 가져야 강하고 곧게 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의식주 자체가 어렵던 옛날에는 허리띠를 졸라매며 열심히 일하는 것이 미덕이었으나, 지금은 잘 노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전혀 다른 조어(造語)가 일반화 되어 있다. _143~144쪽
고성의 ‘월이’를 설화 속에서 불러내고 그 삶의 행적을 재구성하며 기림의 방향성을 탐색하는 일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근년에 고성문화원과 고성향토문화선양회의 활동에 힘입어 ‘월이’의 재조명 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참으로 높이 평가할 만한 국면의 전환이다. 기실 고성에 거주하거나 고성 출신인 많은 이들이 이 설화의 구체적 내용을 모르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월이’는 왜란 때 고성 무기정이라는 주점의 기생으로 왜국 첩자의 지도를 조작함으로써 병선(兵船)의 진로를 호도했다.
그 결과로 해전의 큰 승리를 견인했으나 정작 ‘월이’ 자신은 왜장의 칼 아래 목숨을 잃었다. 진주 의기 논개나 3·1운동 때 앞장섰던 해주 기생들과 같이 민족혼의 정화(精華)를 보였지만, 그 사실(史實)은 역사의 갈피 속에 묻혀 있었다.
이와 같은 마당에 ‘월이’ 현양사업을 새롭게 부양하는 데는 몇 가지 유의해야 할 대목이 있다. 먼저 이 소중한 설화가 그 존재 및 가치를 오늘의 현실 가운데 정초하도록 사실성을 강화하는 일이다. 그러하기 위해서 ‘월이’ 담론을 증빙할 수 있는 자료를 모으고 이를 체계적이고 객관적으로 해석하여 그 정본을 확정해야 한다. 사료의 수집과 학술 연구가 병행되어 설화가 역사로 납득되면 우리의 ‘월이’는 옛이야기 속에서 실제적인 오늘의 현실 가운데로 걸어 나오게 된다는 뜻이다. _187~188쪽
그런데 한일관계의 외교채널은 이미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이번 일본의 무역 보복조치와 한국의 반발이 이어지면서, 필자는 십여 년을 계속해온 문화 행사에서 예정된 일본 작가 초청을 중도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오랜 경과 과정이 있으므로 그대로 진행해도 할 말이 없지 않겠으나, 전반적인 사회적 분위기에 비추어 이를 그대로 추진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이 난국이 만만치 않다는 뜻이다. 어차피 정부가 이 쟁투에 앞장서 있고 온 국민이 이 대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정부도 국민도 지금 선 자리와 갈 길을 지혜롭게 바라보면서 이길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일본이 과거사 부인에서 보이는 후안무치한 태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감정적으로 일본을 탓하기에 앞서, 그러한 관성을 가진 상대방을 두고 우리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 먼저 살펴야 한다. 곧 우리 생각과 논리의 허점을 먼저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우리의 주의주장이 밖으로는 국제사회를 설득하고 안으로는 국민을 견인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국내의 자성론(自省論)과 냉소적 분위기가 현저히 살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_209~210쪽
미국 텍사스의 댈러스에서 소설가 손웅(손용상) 선생이 시작한 《한솔문학》은 ‘타향과 본향을 잇는 징검다리 문예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미주에서 활동하는 문인들의 작품과 그에 대응하여 한국에서 활동하는 문인들의 작품을 함께 수록하고 있으니, 그에 걸맞는 편집 방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
기실 이는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를 막론하고, 글쓰기에 삶의 무게중심을 두려는 사람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창작문법이다. 20년이 넘도록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을 탐색해 온 필자의 경험적 생각으로, 해외에서 모국어로 글을 쓰는 한인 문인들에게 반복적으로 따뜻한 손길처럼 건네고 싶은 말이 있다. 곤고한 이중 언어 이중문화의 환경 속에서 어렵게 쓰는 글인 만큼, 그 문화충격을 회피하지 말고 창의적 소재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디아스포라 문학의 현장에서 그리고 그와 관련된 여러 부면에서 필자는 이 소재가 오히려 독창성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그렇게 산출된 수작(秀作)들을 목도해 왔다. 그와 같은 창작이 갖는, 다른 유형으로는 모방하기 어려운 특장이 있다는 의미다. 이번에 발간된 《한솔문학》 제2호에서도 이 관점을 여러 작품에 적용할 수 있었다. _224~2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