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지나
대학에서 일본학을 전공했다.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다 지금은 일본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작품으로는 오노 후유미 『시귀』, ‘십이국기’ 시리즈, 미야베 미유키 『지하도의 비』, 모리미 토미히코 『거룩한 게으름뱅이의 모험』, 나쓰키 시즈코 『흑백의 여로』, 야마다 아키히로 『영원의 정원』, 기타가와 에미『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등이 있다.
피비린내 나는 참극 속에서 생존은 과연 축복일까
주인공의 아버지는 이웃의 밀고로 경찰에 끌려갔고, 어머니는 독약을 마시고 아버지를 따라 자살했다. 이복동생은 원인 모를 병으로 갑자기 죽었고, 가난 속에서도 서로 돕던 이웃들은 하나둘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 사라졌다. 그로부터 6년 뒤 1945년, 독일이 패전하면 예전처럼 평화가 올 줄 알았던 그 자리에는 승전국들의 압제와 살아남은 자들 사이에 피어오른 또 다른 혐오만 들끓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소중한 사람을 모조리 잃고 살던 집마저 사라진 채 홀로 남은 열일곱 소녀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아우구스테가 할 수 있었던 건 인종 청소의 소용돌이에서 은신처를 찾아 떠돌고, 배급표를 팔아 목숨을 연명하다 급기야 자신을 덮쳐온 군인에게 그녀가 한 번도 쥐어본 적 없던 총부리를 겨누는 것이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소설임에도 이야기는 끝날 때까지 그녀에게 안락함을 허락지 않는다. 그녀 주위에는 온통 진실을 숨기고 지원군인 척 그녀와 여정을 함께 하면서 그녀를 감시하거나 그녀가 죽든 말든 방관하는 이들뿐이다. 아우구스테는 이런 상황에 절대로 순응하지 않는다. 그저 누구보다 빠르게 결단하고 실행에 옮기며 움직인다. 소련군에게 협력하고, 미군이 가하는 위협에 굴하지 않으면서 계속 여정을 이어갈 수 있도록. 자신을 구명하려면, 이름만 알고 있는 에리히라는 남성을 이틀 안에 찾아야 하기에.
상흔이 증오가 되는 순간에도 체제는 변하지 않는다
일본 유명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천사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소설은 전쟁을 겪어본 적 없는 작가가 치밀한 준비 끝에 전쟁 한복판에 있는 듯 실감 나는 감각을 선보이며 독자를 사로잡았다. 특히 잔인한 장면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방식을 썼음에도 읽다 보면 절로 몸서리치게 만드는 끔찍함이 전해지는 게 압권이다. 그래서 쉽사리 읽어내기가 힘들다는 독자의 평은 이 책에서만큼은 호평으로 통한다.
또 전쟁소설에 그치지 않고, 미스터리와 역사적 요소를 두루 활용해 누군가에게는 유대인 학살이 떠올라 눈물짓는 가슴 아픈 이야기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폭압을 막기 위해 어떤 상황에서도 지치지 말고 행동하라는 용기를 주는 이야기로 거듭났다. 한 권의 소설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꿀 순 없지만, 결단이 필요할 때 용기를 주는 책을 남기고 싶다는 작가의 열망이 이야기 곳곳에 절절히 드러나 있다. 그런 연유로 후카미도리 노와키는 특별히 출판사에 요청해 한국어판 첫머리에 ‘침략과 학살을 자행했던 나라임을 기억하라’는 뜻을 담아 소설을 썼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지금도 세계에서는 전쟁이 자행되고 있어 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몰고 있다. 이 소설을 통해 증오와 혐오를 극복할 수 있는 희망과 틀 밖으로 나갈 힘을 얻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