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그들이 온다 _ 홍은전
용어 설명
구술자 소개
임직원이 말하다
하나의 시설이 사라지기까지
: 프리웰 이사장이 된 탈시설운동가 김정하
실패한 자립은 없다
: 모두가 떠난 자리에 남은 사무국장 강민정
두려움을 넘어 시도할 때
: 20년차 생활재활교사 박종순
그들과 나 모두를 변화시킨 투쟁
: 20년차 생활재활교사 김만순
들릴 때까지 듣는 태도
: 간호조무사로 일한 생활재활교사 권영자
탈시설 당사자가 보여준 길
: 탈시설을 지원한 사회재활교사 정영미
탈시설이라는 시작점
: 프리웰 초대 이사장이 된 사회복지 연구자 박숙경
시설 종사자의 탈시설을 그리며
: 향유의집 마지막 원장 정재원
거주인이 말하다
나를 움직인 건 분노였어요
: 시설 비리 최초 고발자 한규선
시설이 참 작고 초라해 보였어요
: 비리 투쟁에 합류해 탈시설의 권리를 외친 김동림
자립생활에도 공동체가 필요해요
: 10년차 자립생활인 황인현
이곳을 나가는 게 좋아요
: 탈시설을 앞둔 거주인 문영순
시설과 탈시설, 반반의 마음이에요
: 마지막 탈시설 주자 양남연
아무래도 거기 있을 때가 더 좋았지
: 탈시설을 반대했던 거주인 이정자
부록
연혁
향유의집 폐지, 그 이후
해제 프리웰 사람들이 쏘아올린 탈시설의 지도 _ 전근배
오직 스스로의 의지로 문을 닫은
최초의 시설이 되기까지,
‘향유의집’ 거주인과 임직원이 함께 통과한
놀랍고, 치열하고, 아름답고, 험난했던 연대의 기록
“더 이상 우리를 시설에 가두지 마십시오. 여기서 당신들과 함께 살겠습니다.” 2021년 4월 30일, 한국사회 최초로 장애인 거주시설이 문을 닫았다. 관할 지자체 등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닌, 오직 시설/법인 측이 스스로의 의지로 행한 ‘자발적인 폐지’였다. 이제 더 이상 운영되지 않는 이 시설은 경기 김포에 위치한 ‘향유의집’이다.
발단은 한 장애 당사자 거주인(한규선)이 시설 내부의 비리를 최초로 고발하고 공론화한 사건이었다. 시설을 운영하는 석암재단 측이 거주인 개인에게 지급되는 장애수당을 오랫동안 갈취해온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몇몇 거주인은 대부분의 일상을 같이 보내는 직원(생활재활교사)들에게 비리 폭로에 함께해줄 것을 부탁하고, 거주인과 직원들이 합심해 재단의 각종 비리를 증명할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투쟁의 물결은 급속도로 확산된다. 직원들은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같은 외부의 장애운동단체 및 탈시설운동가들과 접촉하며 비리 문제를 세상에 터뜨린다. 거주인들은 향유의집 관할 지자체인 양천구청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서울시청과 마로니에공원에서 노숙농성을 벌이며 본격적인 투쟁의 시작을 알렸다.
시설 내부 비리를 척결하자는 취지였던 애초의 투쟁이 탈시설운동으로 확장되고, 시설이 스스로의 의지로 문을 닫게 되기까지는 탈시설 장애운동가들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투쟁이 단지 비리 사실 폭로에 그치지 않고 시설 자체를 폐지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고, 실제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직접 시설 내부로 들어가 임원/운영진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시설을 해체하러 온 시설 운영진(장애운동가), 거주인, 시설 직원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탈시설’과 ‘자립’을 일궈내기까지, 그 치열하고 아름답고 험난했던 연대의 과정을 이 책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한국사회 최초의 자발적 시설 폐지라는 이 전례 없는 사건은 ‘시설사회’와 ‘시설 vs 탈시설’ ‘가족 vs 시설’ 따위의 이분법을 뒤흔들며 탈시설운동의 대전환을 일으키고 있다. 국가와 재벌 사회복지법인이 공고히 해온 침묵의 카르텔과 그것이 만들어낸 전제(‘장애인이라면 당연히 시설에 살아야 한다’)를 이제는 깨부술 때가 되었다. 향유의집 거주인과 임직원이 보여준 뜨거운 투쟁은 앞으로 무수히 많은 탈-시설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한국사회 최초의 장애인 거주시설 폐지 사례: 비리·인권 침해 고발에서 탈시설운동까지
한국사회 최초로 스스로 문을 닫은 시설이 되기까지, 사회복지법인 프리웰(구 석암재단) 산하 시설 향유의집(구 석암베데스다요양원) 거주인과 임직원은 장장 12년에 걸친 투쟁 과정을 통과했다. 그 결과 2021년 3월 3일 모든 거주인이 탈시설을 마쳤고, 4월 30일 향유의집은 설립 36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향유의집을 폐지하기에 앞서) 탈시설 장애운동가들은 2009년 옛 비리 세력을 몰아내려 애쓰며 석암재단을 사회복지법인 프리웰로 탈바꿈했다. 새로이 운영권을 쥔 이들은 시설 내부로 들어가 거주인들의 탈시설을 적극 지원했다. 그저 ‘탈시설’만이 아니었다. 거주인은 물론 그들과 오랫동안 함께해온 직원들까지,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탈시설’을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한때 120명 이상의 거주인을 거느렸던 대형시설이 폐지되기까지의 과정은 놀랍고도 험난했다. 처음에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 싸움이 시설 자체를 거부하는 지난한 투쟁의 시작이라는 것을. 재단 측의 비리와 횡령, 인권유린 행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 시설에 복귀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나리오였다. 실제로 2007~2008년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의 거주인과 직원들은 거주인의 장애수당을 오랜 시간 갈취하고 각종 학대 행위를 일삼아온 석암재단 운영진 일가를 퇴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내부에서는 장애 당사자 조직 ‘석암재단 거주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석암 비대위)와 직원 조직 ‘민주노총 공공운수연맹 공공노조 사회복지지부 석암재단지회’(석암 노조)가 꾸려졌고, 외부에서는 시민사회 연대조직인 ‘석암재단 비리척결과 인권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석암 공대위)가 조직되어 비리 책임자 13명을 검찰에 고발했다.
그러나 거주인들을 둘러싼 세계는 이미 손쓸 수 없이 달라지고 있었다. 2009년, 비리 척결과 인권 보장, 재단 이사진 전원 교체를 요구하며 싸우던 일부 거주인들은 문제가 해결되자 보란 듯 시설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시설은 인권이 보장되는 곳으로 거듭났고 장애인들은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라는 결말로 마무리될 줄 알았던 이야기는 이날을 기점으로 급반전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탈시설과 자립생활을 향한 이들의 진짜 투쟁이 시작되었다.
세계가 달라지는 시간: 집을 만드는 싸움을 시작하다
“그때 우리 내부에서는 형님들을 계속 시설에 살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모이고 있었어요. 아무리 싸운다 해도 그 삶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건 아니니까요. 투쟁을 하면 할수록 결국 대안은 시설에서 찾을 수 없다는 걸 더 절실히 알아갔어요.” (김정하)
2009년 6월 4일,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 살던 장애인 여덟 명이 시설을 퇴소해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으로 향했다. 탈시설을 위한 노숙농성 채비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런 그들을 맞이한 건 장애운동가들만이 아니었다. 수백여 명의 사복경찰들이 공원을 에워싸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들의 이삿짐을 확인한 경찰들은 금세 물러난다. 장롱 두 짝, 작은 냉장고 하나, 전자레인지 하나, 서랍장 하나, 옷가지와 이불, 자잘한 가재도구를 담은 종이박스가 전부인 초라한 세간들이 공원 한복판에 끌러졌다. 앙상했던 시설생활을 증언하는 살림살이였다. 훗날 ‘마로니에 8인’으로 불리며 두고두고 회자될 이들의 이름은 김동림(48세), 김용남(51세), 김진수(59세), 방상연(38세), 주기옥(63세), 하상윤(37세), 홍성호(56세), 황정용(53세). 대부분은 시설에서 20년 이상을 산 이들이었다.
2009년 당시 마로니에공원 농성을 조직했던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 겸 프리웰 법인 이사장 김정하는 탈시설운동은 곧 ‘주거권운동’이라고 강조한다. 시설에 사는 장애인이 지역사회로 나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활동지원서비스, 소득, 집 세 가지인데, 이 중 가장 중요함에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주거 공간이었던 것이다. 전장연과 힘을 모으기로 한 김정하 활동가는 석암재단 투쟁 당사자들에게 그 ‘집’을 함께 만들기 위한 싸움을 제안한다.
2009년의 마로니에공원 농성은 바로 그 연대의 산물이다. 동시에 이는 먹고 자고 씻는 사소한 일상생활이 전부 문제가 되는 무모하고 전례 없는 투쟁이었다. 그러나 될 때까지 한다는 모두의 의지는 결국 ‘기적’을 이뤄내고 만다. 이들은 오세훈 시장과 접촉해 한국사회 최초의 탈시설 정책을 마련한다. 이로써 시설에서 나온 사람들이 자립을 준비할 수 있는 체험홈과 최대 5년까지 거주할 수 있는 자립생활주택 도입 계획이 발표되고, 여덟 명의 중증장애인들은 사회복지재단이 운영하는 자립주택 평원재에 정식으로 입소하게 된다. 장애 당사자들과 비장애 활동가들이 노숙농성을 하며 매일 함께 밥을 지어 먹은 두 달의 시간이 일궈낸 쾌거였다.
탈시설을 주도하는 시설의 탄생: 석암재단에서 사회복지법인 프리웰로
바깥에서 이런 변화가 이루어지는 동안, 마로니에 8인이 박차고 나간 시설 내부에서도 치열한 투쟁이 계속되었다. 탈시설운동가들의 끊임없는 문제 제기와 영향력 행사 끝에 2009년 석암재단은 ‘사회복지법인 프리웰’로 이름을 바꾸고 과거의 역사와 단절할 수 있게 된다. 장애 당사자들의 인권과 사회 통합을 기치로 내건 진보적 운영진들이 석암재단 측 비리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한 것은 2013년에 들어서였다. 그 후 프리웰은 거주인의 탈시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다. 탈시설운동을 최전선에서 이끈 김정하 활동가는 2018년 이사장으로 부임하자마자 산하 시설인 향유의집(구 석암베데스다요양원) 거주인 전원의 신속하고도 안전한 탈시설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3년이 지난 2021년, 그 계획은 현실이 되었다.
향유의집 폐지 직전부터 폐지 이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에서 거주인들은 한층 더 자유롭고 생기 있는 모습이었다. 황인현은 투쟁을 같이했던 거주인 한규선과 (김동림을 포함한) 마로니에 8인방이 자립해서 나갔을 때, 서운하면서도 이해가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2010년 향유의집 산하 체험홈을 통해 자립생활에 도전한 그는 현재 김포의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다. 기초생활수급비와 장애연금을 합친 101만 원 남짓의 돈으로 풍족한 생활을 꾸리긴 어렵지만, 24시간 활동지원을 받으며 자신이 원하는 일을 원하는 시간에 할 수 있음에 만족한다. 2011년 그는 동료들과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을 통해 김포시 장애인 콜택시 확충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2021년 3월 3일 향유의집 마지막 탈시설 대열에 합류해 시설을 나온 양남연(71세)과 문영순(60대)도 장애인 지원주택에서 자립생활을 하고 있다. 양남연은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아직 적응이 필요하다면서도, “갇혀 사는 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문영순 역시 “징글징글”한 시설에선 가질 수 없었던 자신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데 크게 기뻐했다. 그는 가족들을 초청해 마음껏 담소를 나누는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은 탈시설: 시설 직원들의 탈시설 이야기
이러한 대전환 뒤에는 탈시설을 마냥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의 아픔도 있었다. 거주인과 수십 년을 함께 생활해온 시설 직원들이 그랬다. 2008년 일부 거주인(마로니에 8인방)이 석암재단 측과의 투쟁이 끝난 뒤에도 복귀하지 않고 시설을 나갔을 때, 그 후 2009년 석암재단의 비리 세력을 몰아내고 새롭게 태어난 프리웰이 거주인 전원을 대상으로 한 탈시설 계획을 발표했을 때 직원들은 크게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거주인들의 세계가 급격히 변할 때, 직원들의 세계는 무너져 내렸다.
모든 거주인이 떠난 향유의집에서 시설 폐지 과정을 마무리한 마지막 사무국장 강민정은 2002년 향유의집이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이던 시절 입사했다. 생활재활교사로 일을 시작한 그는 식사, 목욕, 여가 등 가장 가까이에서 거주인들의 생활을 지원하며 호흡해온 베테랑이었다. 그런 그에게 ‘탈시설’이라는 말은 자괴감을 안겼다. “나쁜 기억만 있지는 않을 텐데 향유의집이 그 정도로 싫었나? 내가 근무하는 곳이 누군가에게는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곳이라는 걸 확인하니 종사자로서 죄짓는 느낌도 들었어요. 우리가 거주인을 가둬놓고 있는 건가?”
20년차 생활재활교사 박종순과 김만순 역시 그랬다. 억압적인 시설 환경에서 이리저리 눈치를 봐가면서도 최대한의 힘과 마음을 쏟아 거주인을 지원했던 그들이었다. 그들은 오랜 시간 거주인들에게 자행되어온 학대와 인권유린을 매우 심각하게 여겼고, 그런 행태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거주인들이 석암재단과의 싸움을 시작했을 때 함께 투쟁 현장에 나서 물심양면 도운 것도, 거주인에 대한 깊은 존중과 애정, 연대의식 때문이었다. 거주인의 투쟁에 동참하며 직원들 역시 노조를 꾸릴 수 있었고, 그 활동을 통해 재단의 케케묵은 검은 진실들을 파헤쳤다.
그러나 재단 이사진을 겨냥했던 투쟁이 탈시설운동으로 확장되자, 직원들은 더 이상 거주인들의 싸움에 함께할 수 없게 된다. 거주인들의 탈시설을 이끌며 2018년 프리웰의 이사장이 된 활동가 김정하는 그 분열과 갈등이 필연적인 수순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싸우면 싸울수록 권리의식이 높아지고 그러니까 보이는 게 달라지는 거예요. 구체적 사건과 계기를 통해 분열하고 멀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장애 당사자들의 권리의식이 높아지면서 더 이상 시설 직원들과 같은 선상에 있을 수 없는 시기로 들어갔다는 생각이 들어요.”
탈시설운동가들과 시설 직원들은 그럼에도 서로를 포기하지 않았다. 탈시설운동가들은 직원들에게 투쟁에 나서지 않아도 좋으니 뒤에서 지켜봐달라고 부탁했고, 직원들은 자립한 거주인들의 삶이 바뀌는 것을 목도하며 탈시설에 회의적이었던 자신들의 태도를 성찰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 자신과 거주인이 오랜 시간 함께 겪어온 시설생활 전체를 곱씹는 과정이기도 했다.
향유의집이 폐지된 이후 열린 집답회 자리에서 직원들은 탈시설한 거주인들에게서 자신이 알지 못했던 표정을 보았다고, 그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런 근황을 주고받는 직원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저분 표정이 달라졌다고 같이 일하는 사회복지사가 그러더라고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죠? 내가 계약한 집에서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다른 삶인 거죠. 그분 얼굴 표정만 봐도 그냥 알게 되는 것들이 있어요.”(강민정)
프리웰은 끝내 직원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김정하 이사장은 시설을 폐지하면서도 직원들의 고용 승계를 위해 애썼고, 세 명을 제외한 모든 직원들이 새로운 곳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대부분의 생활재활교사들은 시설 밖 활동지원사로 직무를 전환했고, 프리웰 산하의 다른 시설이나 체험홈, 지원주택으로 일자리를 옮긴 이들도 다수 있다. 프리웰은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은 탈시설을 오직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이루어냈다.
반대 혹은 두려움의 진짜 이유: ‘시설-탈시설’의 이분법을 넘어
《집으로 가는, 길》은 마지막까지 탈시설을 반대했던 거주인, 탈시설을 통해 자립을 이루고도 여전히 시설과 탈시설에 반반의 마음을 두고 있는 거주인의 목소리에도 주목했다. 이들의 발화는 한층 더 세심하고 복합적인 독해를 요한다. 일례로, ‘아무래도 시설에 있을 때가 더 좋았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장애 당사자 이정자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함의는 무엇일까? 이것을 과연 문자 그대로 탈시설에 대한 반대 혹은 시설 예찬론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이 물음에 답하려면 먼저 그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기차 사고를 당해 중도장애인이 된 이정자는 46세에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 입소했다. 그는 시설을 비리와 폭력, 인권침해가 들끓는 곳으로 만든 주범인 옛 비리 세력 이부일 이사장/회장을 지나치게 찬양하는 한편, 그런 사실을 세상에 알리며 투쟁을 조직한 거주인들에 대해서는 무섭고 삭막하다며 거리를 둔다. “회장님이 이 요양원 안 해놨으면 우리는 어디서 살았겠어.” “그 돈(장애수당) 타고 나서부턴 식구들이 아주 야박해지고 다 나갔어요. 애들이 건방져지고 이상하더라고. 무서워.”
그러나 이부일 회장에 대한 이런 식의 찬양은 아이러니하게도 오랜 시간 그가 겪어온 노동착취에 기인한다. 시설 측은 중도장애인인 그에게 더 중증인 장애인들을 케어하도록 시킴으로써 일손을 덜었고, 실질적으로 월급을 주지 않으면서 직원으로 등록해 그 앞으로 나오는 월급을 다른 직원에게 심부름값으로 주곤 했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겨우 외부 업체에서 후원한 물품이나 식료품 일부뿐이었다. 다시 말해 ‘돈 생각 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일했다’던 그의 발화 안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그의 돌봄노동을 무상으로 착취한 시설 측의 행태를 확인하게 된다. 하반신이 마비되어 꼼짝할 수 없던 자신에게 시설이 노동을 통한 회복의 기회를 제공했다고 믿는 그가 탈시설을 두렵고 번거로운 변화로 인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는 노동에 대한 그의 자긍심과 별개로 다뤄져야 하는 심각한 인권 문제다.
다른 한편으로 탈시설에 대한 두려움은 시설 밖 지역사회, 더 나아가 우리가 사는 사회 자체의 본질과 연관되어 있다. 흔히 사람들은 ‘시설은 곧 감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이 덧붙여지지 않는다면, 이 말은 절반만 옳다. 시설 이전에 지역사회, 즉 이 사회 자체가 감옥이라는 점이다. 애초 시설을 만들어낸 것은 지역사회이며, 장애인을 비롯한 약자·소수자에게 취해지는 분리와 통제는 ‘그들’이 아닌 ‘우리’를 위한 것이다. 시설 내부에서 발생하는 억압과 폭력은 다름 아닌 시설 밖 사회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이다.
‘거주 공간’이 아닌 ‘관계’를 바꾸는 운동: 앞으로 탄생할 무수한 탈-시설들을 위하여
“시설에서 거주인과 직원이 맺는 관계가 바로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맺는 관계이다. 그 관계가 변하고 있다는 것은 사회 전체의 관계가 변하고 있다는 뜻이다.” (홍은전)
결국 탈시설은 단지 거주 공간을 옮기는 문제가 아니다. 탈시설은 곧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맺고 있는 차별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운동이다. 《집으로 가는, 길》 역시 바로 그 관계에 관한 책이다. 척박한 조건 속에서도 용감하게 탈시설을 감행했던 장애인의 이야기는 물론, 시설을 나오는 순간까지도 탈시설을 거부했던 장애인의 이야기, 거주인의 자립과 행복을 응원하지만 ‘탈시설’이라는 단어엔 자괴감을 느끼고 시설 폐지에 끝내 흔쾌할 수 없었던 직원의 이야기, 이 모든 갈등들을 조율하며 시설 안팎의 변화를 견인했던 탈시설운동가 겸 시설 운영진의 이야기가 각양각색의 스펙트럼으로 펼쳐진다.
이런 구성은 시설을 그저 ‘감옥’이 아닌 그 내부에서 복잡다단한 관계가 작동하는 곳으로 사유할 수 있도록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 관계가 점점 변해가는 모습을 입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다. 장애 당사자의 목소리만큼이나 시설 직원의 목소리가 귀중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거주인이 바꾼 것은 자기 자신의 삶만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무수한 관계들이었다. 가장 먼저, 시설이 일터였던 직원들이 바뀌었다. 이들은 자립한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자신과 같은 동료 시민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마주한 뒤 거주인의 탈시설을 진심으로 응원했고, 스스로가 얼마나 큰 편견에 둘러싸여 있었는지 기쁘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견고했던 차별과 억압의 성 하나가 마침내 허물어졌다. 200년은 걸릴 줄 알았던 그 꿈 같은 일을 단 12년 만에 실현시킨 것은 다름 아닌 관계였다. 시설 안의 관계가 변하자, 시설도 변했다. 향유의집 폐지는 앞으로 더 큰 물결을 일으킬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 동료 시민들의 차례다. 여덟 명의 장애인이 개척한 길을 따라 “모험과 자유의 여정”을 시작해보자. ‘집으로 가는 길’이자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한때 120명이 빽빽하게 살고 있던 향유의집엔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다. 그들 모두 지역사회로 돌아와 자기만의 집에서 자유롭고 위태로우며 기쁘고도 슬픈 자기만의 삶을 향유하고 있을 것이다.” (홍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