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방스 햇볕은 내 인생의 축복’
왜 사람들은 프로방스를 찾는가?
유럽도자사와 일본도자사 전반을 완결지어 독자에게 호평을 받은 문화탐사 저널리스트인 조용준 작가가 다시 프로방스로 발길을 돌렸다. 사실 조용준 작가는 프로방스에 ‘라벤더 로드’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던 당시 『프로방스 라벤더 로드』를 출간할 정도로 프로방스 구석구석을 여행했다. 이후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프로방스를 찾는 이유를 알고자 프로방스를 재차 방문하며 그곳의 매력을 탐구했다. 탐구의 결정체가 바로 『프로방스에서 죽다①』이다. 체호프는 결핵을 심하게 앓으면서 요양차 니스에 방문했다가 빛나는 태양 아래 그의 영혼까지 활짝 열린 새로운 경험을 했다. 그리고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마티스 또한 니스에 방문하면서 새로운 인생의 막이 열렸다. 마티스는 “아침마다 새로운 니스의 광선을 발견합니다. 나는 나의 행운을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니스의 부드럽고 완숙한 햇볕에 자신의 후반 인생을 맡겼다. 이외에도 프로방스를 사랑하고 이곳에서 활동한 예술인들은 너무 많아 일일이 다 예를 들지 못할 정도다. 그중에서 『프로방스에서 죽다①』에서 주목한 예술가는 마티스, 피카소, 샤갈이다. 니스를 중심으로 주변에 모여 살던 마티스, 피카소, 샤갈 3인의 거장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강한 라이벌 의식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승화시켜 나갔다. 프로방스가 이들의 거대한 아틀리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삶을 마감했다. 『프로방스에서 죽다①』는 책 제목이 말해주듯, 프로방스에서 정착하고 그곳에서 예술혼을 불태우다 그곳에서 삶을 마감한 사람들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왜곡 없이 사물을 보는 용기를 가진 마티스,
그를 재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책!
야수파의 대가 마티스는 알게 모르게 우리 일상에 깊이 파고든 예술가다. 그의 ‘컷아웃’의 모방품이 전 세계에 퍼져 아이템에 활용됐다. 우리뿐이랴. 그의 작품은 피카소 외 많은 예술가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혹시 여러분이 피카소와 샤갈에 열광하는 반면 마티스에게 다소 한풀 꺾인 반응을 보인다면 이 책을 통해 마티스를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마티스의 행적들을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그의 매력에 푹 잠기게 된다. 21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봄날의 가벼움과 즐거움’을 추구했던 그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햇볕을 찾아 니스를 찾았다. 그곳에서 행운과도 같은 니스의 햇볕에 환희를 느낀 그는 지중해의 미풍에 하루 종일 커튼이 하늘거리는 소박한 호텔 안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후 코트다쥐르로 옮긴 그는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되고 대장암 수술을 받은 후 자신이 완전히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안들에 영향을 미칠 힘도 없는 상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천 가위를 들었고 종이를 오리기 시작했다. 그의 가위질에서 탄생한 작품은 여기서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다 알 정도로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아니 오히려 이전의 작품보다 더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조용준 작가는 『프로방스에서 죽다①』에서 마티스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마티스는 시인으로 보자면 키이즈나 말라르메와 같다. 늦가을의 나무에서 나뭇잎들이 떨어지듯, 그의 컷아웃에서는 새와 꽃들이 날아오른다. 그것이 그가 추구했던 예술과 삶의 균형이다.’
마티스, 피카소, 샤갈
그들은 서로를 경외했다
무명 시간이 짧았던 피카소는 유명해지자마자 자신보다 12살 많은 마티스를 소설가 거트루드 스타인을 통해 만나게 된다. 북극과 남극이 다르듯 피카소와 마티스는 미학적으로 거리가 멀었고, 라이프스타일 또한 달랐다. 더욱이 마티스는 프랑스 북부 사람이고, 피카소는 남부 스페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치 자석처럼 그들은 서로에게 끌렸다. 1954년 마티스가 세상을 떠나자 피카소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제 누구와 대화를 하지?”마티스 또한 자신을 비평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신을 제외하고 오직 한 명, 피카소라고 말하기도 했다. 피카소와 마티스가 서로 주고받은 영향은 너무 자명해서 마티스의 <금붕어와 팔레트>와 피카소의 <할리퀸>, 피카소의 <꿈>과 마티스의 <아시아>를 보면 극명하게 나타난다. 프로방스에서 마티스와 피카소가 북극과 남극이 다르듯 극명한 차이를 보였지만 자석의 이끌림처럼 서로에게 물들어가는 사이, 샤갈도 프로방스에 정착했다. 하지만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히틀러의 나치 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에게 강한 예술혼을 불어주던 사랑하는 아내 벨라가 허무하게 죽자, 샤갈은 다시 프로방스로 와 그곳에서 안식을 찾았다. 샤갈은 젊었을 때부터 피카소를 존경했기 때문에 그와 영감을 주고받고 싶어했다. 결국 그의 바람은 이뤄졌지만 그들의 우정은 길게 가지 못했다. 하지만 피카소는 샤갈의 작품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마티스가 죽으면 샤갈이야말로 진짜 색채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유일한 화가다”라고 평했다. 샤갈 또한 “피카소가 얼마나 천재적인 사람인가. 그가 그림을 안 그려서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왜 고흐는 라벤더를 그리지 않았을까?
『프로방스에서 죽다』 시리즈는 계속된다
고흐를 생각하면 누구나 해바라기를 연상하지만 왜 고흐 그림에 라벤더가 등장하지 않는지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왜 고흐는 라벤더를 그리지 않았을까. 『프로방스에서 죽다』 시리즈의 다음 주인공은 고흐다.